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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Apr 02. 2020

5.18민주광장에서 진행된 홍콩 지지 1인 시위

지속되는 연대활동

 (이 글은 경향신문 릴레이 기고 '홍콩 민주항쟁에 함께하는 한국 청년들 이야기 #4'로써 전국 각지의 청년들이 홍콩 시위에 대한 지지를 표명, 1인 시위를 진행한 후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 중 하나입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홍콩 연대'를 아카이브 하는 과정에서 해당 활동도 축적할 필요성이 있을 것으로 보여, 숫자를 맞추었습니다.)


 2019년 12월 3일, 5.18 민주광장에서 홍콩 연대 1인 시위를 진행했다. 피켓에는 "보고 듣고 배워온 광주가 홍콩에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는 선거 결과 인정하고 5대 요구 수용하라!"라고 적었다. 해당 1인 시위는 각 지역 청년들이 각자의 장소에서 1인 시위를 진행한 후 경향신문에 릴레이로 기고를 하는 캠페인이었다. 나는 4번째로 1인 시위를 진행한 후 기고문을 제출했다.



<나 김동규는 광주의 이름으로 홍콩에 연대하기 위해 5.18 민주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하겠습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는 외로운 섬이었다. 도청에 남아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던 시민들은 자신들의 삶이 영영 끝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적막이 내려앉은 새벽 3시, 한 여성이 도청 방송실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시작했다. “사랑하는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시민들이 나오셔서 학생들을 살려주세요.” 방송이 끝난 직후 M-16 소총을 앞세운 3공수여단이 도청으로 진입했다. 10일간의 항쟁은 막은 내렸다. 그러나 광주의 외침은 세계로 전달되었다. 이윽고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부름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광주의 핏빛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홍콩의 소식은 또 다른 광주였다. 보고 듣고 느껴온 오월의 광주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홍콩의 소식을 접할 때면, 마치 1980년 5월 27일 새벽 3시, 도청에 남은 누군가가 자꾸만 전화를 걸어오는 것 같았다. 홍콩 시민들이 압제에 맞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는데, 그곳에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난 11월 14일, 5.18 민주광장에 홍콩 시위 지지를 표명하는 현수막을 게시했다. 해당 사실을 SNS를 통해 알리자, 전남대학교에 레논 벽을 설치하겠다며 함께하자는 연락이 왔다. 어느새 여섯 명의 시민이 모여 함께 레논 벽을 설치했다.


 지금 홍콩 시민들은 5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한 상황이다. 이중 ‘송환법 공식 철회’를 제외한 4가지는 광주 시민들이 계엄사에 요구했던 조건과 완벽하게 동일하다. 지난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민주파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홍콩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경찰은 다시금 최루탄과 고무탄을 발사했고 지하철역에 진입했다. 대표와 의회 구성원의 절반을 시민의 손으로 선출하지 못하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일 수 없다.


 돌이켜보면, 1980년 5월 이후 광주는 세계의 시민들에게 빚을 졌다.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목숨을 걸고 광주의 사진과 영상을 독일로 보냈다. 독일 공영방송 9시 뉴스에 보도된 광주의 소식은 다음날 오전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분노한 교민들과 미국인들은 광주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의 소식을 접한 일본의 인권작가 도미야마 다에코는 눈물을 흘리며 광주를 그렸다. 우리는 그들을 잊을 수 없다. 지금 홍콩이 광주를 부르고 있다. 나는 오늘 광주의 이름으로 홍콩에 연대하기 위해 5.18 민주광장에서 1인 시위를 한다. 우리는 홍콩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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