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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21. 2019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갈길을 잃다 (2019~2020)

학생사회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2019년 1월 18일, 황법량 총동아리연합회장이 중앙운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지난 1998년, 1999년, 2004년, 2011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비(非) NL 출신이 총학생회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위상을 상실한 총학생회는 이미 방향성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3월 6일, 전남대학교 전체학생대표자회의가 중도 폐회되었다. 전학대회의 권한을 위임받은 확대운영위원회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황법량 의장은 4월 1일을 기해 사퇴문을 발표했다. 최강록 자연대학 학생회장이 남은 기간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는 사퇴문에서 이전 학생회 세력을 철저히 비판했다. "학생과에서 제공했다는 노트북 4대가 사라졌습니다. 이전 총학 간부들에게 되돌려 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총학 내부 휴게공간 TV의 경우 모니터와 연결장치가 서로 달랐습니다. 수리기사의 말로는 벽에 설치되어 있는 연결장치와 바닥에 놓여있는 TV는 서로 다른 모델이라고 합니다. 원래 TV를 처분하고 그보다 값싼 모델로 바꿔치기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입니다. 대학 축제의 경우 전체 예산이 8천만 원으로, 축제 기획사에 문의한 결과 결코 전년도와 같은 수준이 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만들어졌다. 1980년 4월, 총학생회의 깃발을 치켜세운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학원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5월에는 민족민주화성회와 금남로 횃불집회를 주도하여 5·18 민중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그는 2년간의 도피생활 후 내란주요임무종사죄로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1985년, 재건된 전남대 총학생회는 소외받는 모든 이들의 벗이 된 '임'들의 이름으로 투쟁했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해왔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특정 정파가 양적우위를 기반으로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1997년, 어느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재학생들의 여론도 악화되었다. 이후의 전남대 총학은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들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세대교체가 실종되고 더 이상의 인적 유입마저 사라졌다. 재학생들의 분노와 실망감도 극에 달해, 사회운동에 나서는 다른 정파들의 행보마저 제약받고 있다.


 2019년 9월, 전남대학교 축제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임창정 등의 가수의 공연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진행과 구성, 기획 자체가 트렌드에 맞게 잘 진행되었다. 학생들이 소통하는 공간인 전남대 에브리타임에는 축제에 대한 칭찬의 글들이 올라왔다. 이어 몇 년 전의 축제를 경험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전 총학에 대한 비토도 쏟아졌다. 총학이 없어도 축제가 잘되니까, 앞으로도 '그 총학' 없이 좋은 축제를 즐기며 행복한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 이것이 학생들을 부끄럽게 만들던 전 총학이 조성한 2019년 현재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의 압도적인 여론이다.



 재학생들은 총학생회를 해체하고 축제준비위원회 등의 자치기구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글도 올렸다. 이제는 '사회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총학생회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기에서 '총동아리연합회'를 구성할 시점의 고민을 되돌아본다. 19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은 지하서클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의 압제가 공기처럼 만연해있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성장을 시작한 서클 운동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를 기반으로 각 대학별 총학생회가 건설되었다. 공개조직인 대학 총학생회가 구성되자 단과대학 학생회와 과학생회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는 학생운동 전국 조직인 전대협 구성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서클의 활동가들은 곧 학생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에 여러 서클들이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고 남은 서클들은 총동아리연합회를 구성했다.


 사회운동을 동아리 중심에서 총학생회 중심으로 옮긴 일은, 결론적으로는 학생운동의 약화를 불러왔다. 1997년 비권 학생회가 전국 대학을 석권한 후 학생운동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학생회가 2만 대학생의 대표성을 갖는다는 특성에 비춰,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과거의 서클 해체가 남긴 아쉬움을 돌아보게 된다. 이제 학생사회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한다. 현재의 학생회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2019년 11월, 2020년도 총학생회 선거가 공고되었다. 2019년 11월 18일, 그러니까 오늘로부터 3일 전, 전대신문은 올해 총학생회 선거가 역사상 처음으로 후보등록 부재로 무산되었음을 보도했다. 이 씁쓸한 소식으로 학생운동이 전환점을 맞이한 1997년 이래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 연재를 마친다.


 필자는 광주청년유니온에서 김설씨와 함께 활동해왔고, 황법량씨와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왔다. 2016년 이후의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기도 했다. 기록은 의무이기에, 현재 시점에서 조망할 수 있었던, 기록되어 마땅한 역사를 이렇게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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