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 총집 편
본 글은 학생운동이 전환점을 맞이한 1997년부터 2020년까지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앞서 22편에 걸쳐 자세히 쓴 내용을 하나의 글로 모아내는 과정에서 편집과 생략이 있었기 때문에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해당 번호에 부합하는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문의 및 제보 : 1980may18@naver.com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역대 대표자 (1987~2021)
* 1980년 박관현 총학생회장(15대)
1987년 김승남 총학생회장 (NL-삼민투)
1988년 최완욱 총학생회장 (NL-전대협)
1989년 조정신 총학생회장 (NL-전대협)
1990년 송갑석 총학생회장 (NL-전대협)
1991년 노훈오 총학생회장 (NL-전대협)
1992년 송진환 총학생회장 (NL-한총련)
1993년 오창규 총학생회장 (NL-한총련)
1994년 진재영 총학생회장 (NL-한총련)
1995년 이몽석 총학생회장 (NL-한총련)
1996년 정명기 총학생회장 (NL-한총련)
1997년 강위원 총학생회장 (NL-한총련)
1998년 노영권 총학생회장 (非한총련-청년공동체)
1999년 곽대중 총학생회장 (非한총련-청년공동체)
2000년 변재훈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1년 이용헌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2년 김형주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3년 윤영일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4년 문용득 총학생회장 (反운동권)
2005년 박한균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6년 장송회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7년 류선민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8년 김현웅 총학생회장 (NL-한총련)
2009년 오주성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0년 김유리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1년 박은철 총학생회장 (反운동권)
2012년 권민영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3년 김민규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4년 장민규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5년 김한성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6년 정상엽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7년 주철진 중앙운영위원회 의장 (NL-한대련)
2018년 최도형 총학생회장 (NL-한대련)
2019년 황법량 중앙운영위원회 의장 (PD)
2019년 최강록 중앙운영위원회 의장
2020년 노의찬 중앙운영위원회 의장
2021년 임기안 총학생회장 (~2월/사퇴)
2021년 이명노 총학생회장
*2019년 최강록 대행 이후에는 '운동권'을 기준으로 한 분류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따로 분류하지 않았습니다.
- 목차 -
8. 전대 총학, 적폐 세력의 '몰락' (2010) 上
13. 전대 총학, 4년간의 찬반 선거 (2012~2015)
17. 전대 총학, 차떼기 사건의 파장과 선거 무산 (2016)
18. 전대 총학 재선거, 신천지 세력의 난입 (2017)
20. 전대 총학, NL 세력의 무능과 부패 (2018)
번외 23. 전남대 총학생회 신천지 논란 (2021)
1. 학생운동에 '결정타' 이종권, 이석 구타치사사건 (1997)
- 1997년, 학생운동은 왜 전환점을 맞이했는가? -
2019년의 전남대학교는 평화로운 공간이다. 현직 전남대 총동아리연합회장 황법량과의 친분으로 전남대 1학생회관 2층 왼편에 위치한 총동연 사무실에 종종 방문한다. 이곳에서 업무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친구를 내버려 두고 안쪽에 위치한 방과 창고를 한 번씩 열어볼 때가 있다. 그곳에는 몇몇 난해한 전공서적과 담요가 어질러져 있는 온돌방과 버려진 물품들로 가득한 창고가 방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공간은 불과 20여 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의 현장이었다. 그것도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던 학생운동의 간부들이 저지른 파렴치한 범죄행위의 장(場)이었다.
1996년 8월 위대했던 광주항쟁을 기반으로 급성장한 한국의 학생운동은 16년 만에 역사적인 변곡점을 마주했다. 연세대학교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8·15 범민족대회 및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김영삼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하고 원천 봉쇄했기 때문이다. 이 결정 이후 벌어진 학생운동 세력과 국가권력의 전면적 충돌은 학생운동 세력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선사했다. 일명 '연대사태'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그해 11월, 격전지였던 연세대학교에서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비운동권 계열 후보는 모든 단과대에서 과반수 득표를 받고 당선되었다.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996년 11월 강위원 후보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강위원은 한총련 제5기 의장으로도 당선되어 전임 한총련 의장이자 전남대 출신으로서는 두 번째로 학생운동권의 수장이 된 정명기 총학생회장의 뒤를 이었다. 이 시점까지 전대협, 한총련으로 이어지는 학생운동사에서 '의장'을 맡았던 전남대생은 1990년 5·18 민중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전대협 의장이 된 송갑석과 한총련 4, 5기 의장 정명기, 강위원 세 사람뿐이다. 그러나 강위원 의장은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학생운동이 몰락의 길에 접어들 것을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 -
1997년 5월 26일, 어느 필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던 니체의 경고는 실로 이날을 위해 예비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보다 한 달 앞선 1997년 4월, 전남대학교를 동경하던 송원대학교 졸업생 이종권이 '박철민'이라는 가명으로 전남대 기계공학과 1학년생을 가장하여 문화동아리 '용봉문학회'에 가입했다. 그러나 이종권이 선배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아리 회장 구영민은 이종권을 경찰이 보낸 프락치로 오인했고, 그를 총동아리연합회 사무실로 호출했다. 1997년 5월 26일 오후 8시 30분, 이종권은 총동연 사무실에서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남총련) 정책위원 이승철에게 인계되었으며 마스크를 쓴 여러 학생들에 의해 동아리실 내부 별실로 끌려갔다. 그 다음날은 하필, 5월 27일이었다. 정확히 17년 전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광주시민들은 최후까지 전남도청을 사수했다. 그들은 비어있는 도청을 계엄군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광주의 새벽은 민주주의의 아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항쟁에서 비롯된 학생운동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기념비적인 날, 수치스러운 범죄를 역사에 남겼다. 총동아리연합회실에 모인 남총련 간부들은 끌려온 이종권을 다짜고짜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락치라는 사실을 실토하라며 5월 27일 새벽 3시경까지 무려 7시간 동안 조사를 빙자한 가혹행위를 지속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를 물고문 끝에 살해한 독재정권의 폭력이 떠오를 정도였다. 폭행에 가담한 건 남총련 정의찬(조선대 총학생회장) 의장, 이승철 정책위원, 장형욱 정책위원, 전병모(전 순천대 총학생회장) 기획국장, 전남대 총학생회 최석주 오월대장, 전연진 투쟁국장 등 6명이다. 이들은 이미 '괴물'이었다. 이들은 주먹과 쇠파이프를 이용해 이종권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결국 이종권은 강제로 삼킨 소화제가 기도에 걸려 질식으로 사망했다.
이종권이 사망하자 당황한 남총련 간부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실에 조동호 연대사회국장, 이진실 선전부장, 구광식 섭외부장, 남총련 김형환 투쟁국장, 송선주 투쟁국장 (95년), 강재학 고문 등 전남대 총학생회 및 남총련 간부 8명이 모였다. 이들은 사망 장소가 2층 동아리실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하고 "전남대 대강당 옆 잔디밭에서 우연히 이씨를 발견하여 응급조치했으나 사망했다"라고 말을 맞추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종권의 어머니가 사건 당일 "이종권이 대학을 다니는 게 맞느냐"고 추궁하는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 측은 기지국 조사를 통해 해당 전화가 전남대 총동연실에서 걸려왔음을 파악했다. 결국 추가 수사 결과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종권 살인사건에 연루된 피의자 18명은 차례로 검거되어 법정에 섰다. 묵묵부답이던 정의찬 남총련 의장은 폭행에 가담하여 가혹행위를 격려했음을 자백했다. 법정에 선 정의찬 의장에게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3년, 벌금 2,000만 원의 중형이 선고되었다. 이승철, 장형욱, 전병모 등 피고 3명에게는 징역 4년형이 선고되었다. 최석주 피고에게는 징역 2년형이 선고되었으며 18명의 관련자들은 모두 법적 심판을 받았다.
조선대 총학생회장과 남총련 의장을 역임한 정의찬은 2020년 현재 조선대학교 민주동우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사건에 가담했던 전남대 총학생회 구광식 섭외부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으나 2003년 3개월에 걸쳐 20여 차례의 강도, 강간 범죄를 저질렀다. 8월 21일 구광식은 광주 북구 문흥동의 한 호프집에서 성폭행 범죄에 실패한 직후 피해자 A를 칼로 마구 찔러 살해했다. 결국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구속 수감되었다.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에 가담했던 이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활동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용납될 수 없는 반인륜 범죄에 가담했다. 광주항쟁은 바로 이러한 폭력에 당당히 맞섰던 사건이었다.
- 이석 구타치사 사건 -
1997년 5월 31일, 한총련 5기 출범식이 한양대학교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경찰은 출범식을 철저히 봉쇄하겠다고 쇄기를 박아놓았다. 결국 그해 한총련 출범식은 한양대학교에서 열리지 못했다. 출범식 일정은 1주일에 걸쳐 진행되었고 6월 5일 서울대학교에서 마무리되었다. 그 사이 한총련이 자행한 또 한 건의 범죄가 대한민국을 전율케 했다. 바로 '이석 구타치사 사건'이다. 1997년 6월 3일 오후 6시, 여전히 출범식장으로 예정되어 있던 한양대학교에서 한총련 간부들이 근방을 지나고 있던 선반공 이석을 납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은 이석을 경찰 프락치로 몰았고 다음날 오전 9시까지 고문했다.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으로부터 불과 1주일이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한총련 간부들은 이석을 침낭으로 감싼 후 물을 뿌려가며 경찰 진압봉으로 쉴 새 없이 폭행했다. 한양대학교 투쟁국장 배주환은 의식을 잃어가는 피해자의 코에 최루가스 분말을 집어넣는 등의 고문까지 시행했다. 그들의 폭력성은 이미 도를 넘어 있었다.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 이준구는 폭력을 주춤하는 구성원들을 향해 "전쟁상황인데 인륜을 생각할 때냐"라고 말하며 고문을 독려했다. 결국 피해자는 뒤늦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과 달리 이석 구타치사 사건은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국무총리, 내무부장관, 제1야당 당수가 이석의 빈소에 조문을 가는 등 사회적 공분이 확산되었다. 한총련은 이석의 죽음을 놓고 내부 갈등에 빠졌다. 당시 한총련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던 80년대 후반 학번들은 "김영삼 정권이 죽인 것으로 발표"하자고 주장했다. 한총련은 우선 "한총련 사무실 주변을 서성거리던 이석씨를 발견하고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폭행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진술서를 쓰게 한 뒤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이씨가 갑자기 달려들어 목을 조르는 바람에 이씨를 묶어 놓은 채 사무실을 나간 것으로 안다"라고 발표했다.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고 있다는 이유로 일말의 도덕성마저 상실한 한총련은 이 사건으로 중대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들이 저지른 고문치사는 불과 10년 전 독재정권에 몰락을 제공했던 단초였다. 이석 폭행 가담자는 22명에 이르렀으며 길소연(한양대 교육학과 졸), 권순욱(건국대 2년), 이호준(건국대 3년), 정용욱(건국대 1년), 정욱열(건국대 황소대원), 김호(서총련 투쟁국장), 배주환(한양대 투쟁국장), 이준구(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를 비롯한 한총련 간부들이 차례로 검거되어 법정에 섰다. 6월 5일 한총련은 서울대학교에서 '고 이석씨 애도식 및 5기 한총련 출범식'을 진행했다. 한총련은 이창희(단국대 3년)를 이석 구타치사 사건 진상조사위원장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학생운동의 도덕성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한총련 강위원 의장은 1997년 7월 2일 전남대 농활 출범식 참석 직후 광산구의 한 아파트에서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전국 대학에서 실시된 총학생회 선거 결과 비(非) 운동권이 전체 대학교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반미구국의 철옹성으로 불리던 전남대학교 마저 비(非) 한총련을 내세운 선본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들은 1998년 5월 13일부터 이틀간 전체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총련 탈퇴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17,422명의 전남대 재학생 중 44%인 7,691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이중 6,565명(86%)이 한총련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학생운동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린 무고한 청년들에 대한 고문살인으로 한총련은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남총련은 주요 간부들의 구속 이후 급격히 세력을 잃었고 한총련 내부 주도권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6기 한총련 의장에는 손준혁 영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 당선되었다. 이창희는 "강위원 의장이 체포되기 직전까지 북한과 소통하던 비선 간부들과 심각한 갈등을 벌였고, 그들이 누설한 정보에 의해 (강위원 의장이) 궁지에 몰렸다"라고 주장한다. 이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몰려 주요 간부들이 모두 수배되었고 사수파와 혁신파로 나뉘어 내부 갈등을 이어갔다. 이미 앞선 사건들로 인해 시민들의 지지를 상실한 뒤의 일이다.
결국 1980년 오월 광주에서 비롯된 학생운동의 뜨거웠던 맥박은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함으로 인해 그 고동을 멈추게 되었다. 그 결정적 계기는 1996년 연대사태와 1997년의 두 고문살인이었다. 이 역사의 교훈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2.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세기말 (1998~1999)
- '청년공동체' 세력의 등장 -
1997년, 두 건의 고문치사 사건 직후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남총련) 주요 간부들은 줄줄이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단언컨대, 몇몇 활동가들의 공백보다 더 뼈아팠던 것은 시민들의 지지를 상실했다는 데에 있었다. 남총련과 전남대 총학생회는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제대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념적 선명성의 빛이 밝아질수록 반작용의 에너지도 커져갔다. 이보다 조금 전인 1997년 3월 남총련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100여 명 중 30여 명이 총궐기 투쟁 노선에 반대표를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의원은 단체 구성원들을 대변하는 사람들로서 특정 안건 혹은 노선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할 권리를 가지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남총련은 징계위원회를 열어 반대표를 던진 간부들을 해임시키는 중징계를 감행했다.
해임된 이들은 남총련을 집단적으로 탈퇴한 후 '학생운동 강화 혁신을 위한 전남대 위원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1997년 7월 단체명을 '청년공동체'로 변경하고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전향의 대가는 혹독했다. 이들은 남총련 간부들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수모를 당했다. 역적, 안기부의 끄나풀이라는 소리를 듣고 술세례, 돌세례를 당했다. 하긴 1992년 백기완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감히 김대중 선생님 말고 다른 후보를 지지해?"라며 전남대학교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백기완 선본원들을 집단 폭행한 일이 '남총련 3대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데, 조직을 이탈한 '배신자'들에게는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수모는 역설적이게도 '청년공동체'에게 더 큰 자기 동력을 선사하는 일이었다.
이들은 '학생회와 정치활동의 분리', '비폭력 평화선언', '전남대 오월대 해체' 등의 안을 마련하여 전남대 재학생 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1997년 11월에 열린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다. 이전까지의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는 사실상 NL계열이 완전히 주도해왔고 경선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1997년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무고한 청년을 고문 끝에 살해한 남총련의 어리석음에 비토를 토하는 재학생들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청년공동체는 노영권 후보를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시켰고, 그는 434표라는 큰 차이로 NL 측이 내세운 오태욱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그는 NL비주류를 자처했지만, '복지와 취업', '축제와 문화예술' 등을 주장한 전형적인 비권후보였다. 그는 5·18 광장 집회를 5월 18일 당일에만 열고 '한총련 탈퇴' 여부를 학우들의 의사를 통해 결정하겠다고 선언했다.
1998년 5월 13일, 예정되었던 대로 한총련 탈퇴를 두고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한 찬반투표가 실시되었다. 전남대학교 재학생 17,422명 중 7,691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이중 86%에 달하는 6,565명이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틀에 걸친 투표 이후 NL계열의 총여학생회와 일부 단과대가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했기에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총학생회는 고심 끝에 "일부 학생들의 투표 저지 행위와 총학생회의 홍보 부족 등으로 투표율이 과반수를 넘지 못해 탈퇴 여부에 대한 공식 결정을 유보한다"라고 밝혔다. 당시 전남대학교의 NL 세력은 투표를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노영권 총학생회장은 한총련 탈퇴를 유보하며 "한총련 대의원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한총련의 사업과 투쟁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1998년 11월에 열린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도 청년공동체 후보가 출마했다. 총학생회장 후보로 나선 곽대중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10년간 NL운동에 몸담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투경찰로 군 복무를 하고 있던 96년 8월 연대사태에 투입되었습니다. 학생들이 휘두르는 각목과 쇠파이프에 전투경찰들이 맞는 것을 보면서 연대사태는 분명한 실패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총련은 '영웅적 투쟁'으로 평가하더군요. 잘못을 떳떳하게 인정하지 못하면 그건 학생운동의 자세가 아닙니다" 곽대중은 한총련 주류와 같은 이념적 세계관을 공유하던 활동가였기에 그들의 실태를 똑똑히 목도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상반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도 96년 연대사태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99년 민중 대격돌'을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NL 세력의 몰락을 한 문장에 담아내는 표현이다.
1998년 11월, 1999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선출하는 선거에 출마한 곽대중 후보는 NL주류 임영진-민기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지난 10년간 NL주류가 총학생회를 완전히 장악해온 것에 대한 완벽한 반발이었다. 1999년 2월 25일, 남총련 세력과 곽대중 총학생회장은 전면으로 충돌한다. 남총련이 5·18 광장에 진출하여 집회를 열고자 하자, 곽대중이 허가되지 않은 집회라며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이들을 막아섰다. 결국 시위는 육탄으로 저지되었고 남총련은 '반민중적인 김대중 정권 1년 결산과 남총련 김대중 퇴진 선포식'의 장소를 바꿨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기성 총학생회 세력에 대한 강렬한 반감을 바탕으로 감행된 것으로, 허가되지 않았다고 해서 집회를 막아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21세기를 앞두고 벌어진 이러한 사태들은 결국 그동안 활동해왔던 자들의 어리석음과 부도덕성에 대한 반감이 뼈아픈 방식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90년대 후반, 전남대 총학생회 비권 세력의 집권에는 '연대사태',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의 전향' 등의 시대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80년 오월의 아픔에서 비롯되어 잘못된 세상을 변혁하겠다고 다짐했던 이들 중 일부는 강철서신을 통해 북한의 '주체사상'을 새로운 세상의 설계도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한국사회를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로 바라보던 NL 세력을 주도했다. NL 세력은 한국사회의 운동세력을 주도했고 학생운동에 있어서는 전국적으로는 한총련을, 광주에서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이념에 경도된 이들이 저지른 광기 어린 행동들은 세기말의 파고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노영권, 곽대중과 같은 사람들은 대중운동의 경험을 통해 성장한 이들이었기에 빠르게 운동의 변화를 이야기하며 실질적인 권한을 획득하기도 했다. 학생운동의 철옹성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를 2년간 함락시킨 '청년공동체'는 결국 남총련 세력의 맹목성과 폭력성이 만들어낸 반감의 집합체였다.
'청년공동체'는 '북한 인권'등에 대한 공부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맹목적으로 북한의 노선을 따라가는 행위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으나, 이들 세력 일부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창립에 참여하는 등, 실제 북한 인권 운동을 진행했다. 청년공동체는 "학우들과 함께 새로운 학생운동을 모색하는 운동권 총학생회가 되겠다"라고 선언했지만 결국 새로운 방향을 찾지 못했고, 2년간의 총학생회 운영을 마치고 총학생회실을 떠났다.
1999년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곽대중은 현재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명과 필명으로 여러 권의 책을 내는 등,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사태 당시 'K에게'라는 공개편지를 통해 NL 세력을 다시 한번 비판했다.
2012년 총선 당시 광주 서구갑 지역구에 출마한 오병윤 후보를 지지하는 전현직 총학생회장단 명단이다. 1998년과 1999년 당시 조국통일위원장을 맡았던 이들이 총학생회장이었던 것처럼 올라가 있다. NL 세력에게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세기말은 '잃어버린 2년'이 되었다.
3. 한총련,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2000~2003) 上
1998년~1999년,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남총련)에 대한 최악의 여론을 등에 엎고 '청년공동체'의 노영권, 곽대중 두 사람이 연이어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남대를 장악하고 있던 남총련 세력이 힘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남총련은 여러 단과대학과 총동연을 장악한 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1999년 11월에 치러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회장 선거에 대거 도전장을 내민다. 결국 남총련 세력은 2년 만에 변재훈 후보를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해 총학생회 선거는 역사상 최초로 투표율 50%를 달성하지 못했고 연장투표가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연장투표 끝에 대부분의 단과대학 및 총학생회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남총련의 저력은 '돈'과 '세력'에서 나온다. 역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의 절대다수는 남총련 계열 단독 후보 출마와 찬반 투표를 통해 치러졌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하게 시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를 치르지 않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의 비민주성을 떠오르게 할 정도다. 이들 세력은 다수의 재학생을 구성원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세력에 합류하지 않고, 단순히 신입생으로 전남대학교에 입학해서 학교생활을 해 온 학생이 이들의 벽을 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즉 피선거권을 가진 전남대학교 재학생이지만, 일반 학생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될 수 없다.
남총련 세력은 선거 출마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비민주적인 장치도 마련했다. 선거 공탁금을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하여 선거 출마를 어렵게 하는 방식이다. 2016년 총학선거에 출마한 김설 후보는 전남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기탁금 405만 원을 내라는 요구를 받았다. 광주 북구의원 선거 기탁금 200만 원, 조선대 총학생회장 선거 기탁금 150만 원 등과 비교했을 때도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이다. 게다가 선거에는 이외에도 많은 돈과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맨 땅에서 시작하는 일반 후보와 달리, 남총련 후보는 이미 형성되어 있는 세력을 통해 선거운동원과 자금을 손쉽게 확보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활동했던 선배들로부터 상당히 큰 자금을 지원받는데, 이것을 내부적으로 '보급투쟁'이라 부른다. 이러한 보급투쟁의 실체는 2016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폭로되어 선거의 쟁점이 되었다. 그해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한 NL계열 후보가 비밀리에 중년 졸업생들에게 후원금을 모집해 온 사실을 해당 중년 졸업생의 자녀인 전남대 재학생이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러한 남총련의 비민주성과 경직성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들의 총학생회장 후보 결정 과정이 폐쇄적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내부 경선을 거치지 않고, 조직 윗선에 의해 결정을 하달받는다. 이 경우 구성원들은 주체적인 사고능력을 상실하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몰주체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만이 더 쉽게 살아남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존 위계질서에 의해 나이가 많은 활동가가 더 요직에 배치되기 때문에 자연스레 조직의 고령화가 진행된다. 달리 적폐(積弊)를 찾을게 아니라, 이러한 비민주성과 폐단의 오랜 축적을 적폐라고 부른다.
1987년에 결성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이 전국 주요 대학 총학생회장들의 협의체였다면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은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회장들의 연합체였다. 전대협 의장은 총학생회장들의 대표였지만, 한총련 의장은 전국 대학생들의 대표를 자임했다. 이를 위해 한총련은 '한총련' - '남총련(광주전남), 서총련(서울) 등의 지역 총련' - '지역 총련 산하 각 대학 총학생회' - '단과대학 학생회' - '과학생회'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구축했다.
이들은 한총련 의장이 전국 대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1994년 월간 '말'지에 실린 한총련 중앙위원회 결의안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실려있다. 이에 반발한 몇몇 총학생회장들이 퇴장하기도 했다.
"한총련 대표자는 백만 청춘의 자주적 이해와 요구의 유일한 체현자이며 통일단결의 구심이며, 백만 청춘의 최고 의사표현이며, 학우에게는 자주적 사상의식과 창조적 활동 능력을 키워 주는 백만 청춘의 유일한 정치 지도자입니다. 대표자를 믿고 삶과 생활, 운명을 의탁하면 삶은 개척됩니다."
2000년, 남총련은 다시 약진했다. 2000년 4월 7일, 한총련 대의원대회가 열렸고 조선대 총학생회장 이희철이 한총련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변재훈은 남총련 의장을 맡게 되었다. 다시 세력을 보존하는 데 성공한 남총련 세력의 당면과제는 '한총련 수배문제'였다. 1996년 연대사태와 1997년 이석 구타치사 사건 직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지정되었다. 한총련의 당연직 대의원인 소속 대학 총학생회장과 각 대학 단과대학 회장은 당선과 동시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되었다. 이때부터 제대로 된 활동이 어려워지기에 이르렀다. 주요 활동가들이 꾸준히 연행되는 사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2000년 11월, 이용헌 후보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역시 남총련 후보였다. 이때의 선거 역시 투표율 50%를 달성하는데 실패하여 연장투표가 진행되었다. 2001년, 전남대 총학생회는 등 돌린 학생들의 지지를 되찾기 위해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나리가 피어나는 3월과 4월에 이러한 활동을 집중하였고 이후 매년 진행하던 활동들을 진행했기 때문에 '개나리 투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01년 4월 21일 전년도 총학생회장이었던 변재훈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7일과 8일에는 1998년도 총동아리연합회장이었던 민기채와 2000년도 자연과학대 회장이었던 정경선이 차례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2001년 11월, 김형주-윤석 후보가 전남대 총학생회장 및 부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002년, 김형주는 제10기 한총련 의장으로 당선된다. 이후 2002년부터 2008년 사이의 한총련 의장 7명 중 4명이 전남대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전남대 출신들의 한총련 의장직 장악은 이들의 실력이나 조직력보다는, 완전히 실패한 한총련 운동의 고립을 보여준다. 2002년부터 한총련 내외부에서 혁신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4. 한총련,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2000~2003) 下
2001년 7월 28일, 한총련 5기 의장 강위원이 4년 2개월 만에 출소하였다. 그는 출감 직후부터 한총련 합법화 범시민대책위원회 구성 작업을 시작했다. 한총련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총학생회장 및 단과대학 회장에 당선되는 것만으로 수배자 명단에 오르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2002년 5월 28일, 한총련 10기 의장 김형주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그는 한총련 의장 및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임기의 절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셈이다. 한총련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
"미제와 반통일세력과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의 애국대오 10기 한총련 의장 김형주 의장님이 미제와 반통일세력들에 의해서 연행되었습니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공안당국이 반미반전반핵, 반통일세력 척결의 선봉장 한총련에게 야수와 같은 탄압을 자행하고 급기야 오늘 백만학도의 단결과 투쟁의 구심 김형주 의장님을 연행해 가는 천추에 용납 못할 범죄행각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한총련 백만학도는 김형주 의장님을 구출하고 한총련에게 들씌워진 이적단체 규정 철회에 적극 나설 것이며 모든 탄압의 주범인 미제와 반통일세력들에게 천배 만 배의 타격을 가할 것을 선포합니다!"
의장의 검거 직후 발표된 한총련의 성명서에는 제대로 된 비판능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현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설명보다는,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과 교조적인 믿음을 전시하는 한심한 수준의 성명문이었다. 이 시점의 한총련은 이미 제대로 된 판단력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2002년 11월 2일, 2003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윤영일 농대 학생회장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남총련은 고심 끝에 윤영일 후보를 그해 총학생회장 선거에 옥중 출마시켰다. 그는 역시나 '단독 후보'였다. 이미 학생들의 관심을 잃은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는 NL계열 단독 후보만이 존재했다. 결국 유일한 후보마저 옥중 출마하자 학내에서는 비판이 쏟아졌다. 단과대학 6곳과 총여학생회 선거에는 후보자조차 없었다. 전대신문은 "단일후보마저 옥중출마 정책 실종 투표율마저 최악"이라는 기사에서 "총학생회 선거는 정후보 없이 부후보만이 선거 유세에 나섰으나 단일 후보로 치러지는 사유로 인해 정책 설명보다는 투표참여만을 유도했다"며 이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윤영일 후보는 찬반투표를 통해 당선되었다. 찬반투표는 투표율 50%를 넘기기만 하면 당선이 확정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학생 의사 반영이 불가능했다. 2003년 3월 13일 윤영일 총학생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그는 총학생회장의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남총련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전남대학교에서 총학생회 선거가 한창 치러지고 있던 2002년 말 동아대학교에서 하나의 제안이 나왔다. 동아대 총학생회가 새로운 단일 학생조직 건설을 제안하며 '대학생 문제 해결'을 내세운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추진위원회가 건설되었다. 이들은 2년 간 새로운 전국단위 대학생 조직 출범을 준비하게 되었다. 한대련은 300만 대학생을 하나로 모아내 등록금 문제 등을 비롯한 학생들의 요구를 그들 자신의 힘으로 실현하는 조직을 목표로 했다. 이 시점의 '한총련'은 이미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2003년 3월 16일, 한총련 합법화 범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집행위원장을 맡은 강위원이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과의 면담을 진행했다. 강위원 집행위원장은 "새 정부가 한총련 합법화를 위한 정치적 결단을 내려달라"라고 촉구했으며 문재인 민정수석은 "단과대학 학생회장 이상이면 자동으로 수배 대상이 되는 건 국제적인 망신"이라며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다음날,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한총련 합법화 문제를 긍정적으로 언급했다. 일각에서 '4월 수배해제설'이 등장했다. 4월 14일 혁신파로 분류되던 정재욱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이 제11기 한총련 의장으로 취임했다. 5월 2일 정재욱 의장이 MBC TV토론 방청석에 깜짝 토론자로 나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직접 한총련의 상황을 설명하고 합법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는 불과 2주 만에 180도로 뒤집히게 된다.
2003년 5월 18일,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첫 5·18 민중항쟁 기념식이 엄수되었다. 이날은 5·18 민중항쟁 23주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두 번째로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남총련을 필두로 한 한총련 소속 활동가 1천여 명이 5·18 묘역 정문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며칠 전에 있었던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규탄과 함께 한총련 합법화 및 수배해제를 요구하며 기습시위를 감행했다. 한총련의 기습시위로 인해 기념식은 20분가량 지연되었으며 대통령은 묘역 후문을 통해 기념식장에 입장한 후 후문으로 퇴장했다. 시민들은 이들의 행동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심지어 일부 활동가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5·18 묘역에 보낸 조화를 쓰러뜨린 뒤 발로 밟기까지 했다. 참으로 몰상식한 행동이었다. 5·18 정신에 따라 5·18 묘역에서의 시위 역시 허용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번 시위를 통해 그 무엇도 바꾸어내지 못했다. 이것은 변화에 기여하기보다는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에 차디찬 냉소를 남기는 행동으로, 전략적으로 가히 어리석음의 극한(極限)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 직후 5·18 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조비오 신부마저 "이들의 행동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가장 크게 분노한 건 전남대 재학생들이었다. 안 그래도 총학생회장 후보의 옥중출마로 답답함을 느껴왔는데, 그의 주도 하에 이런 일까지 일어나자 그간 쌓여온 분노가 폭발했다. 그해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서 NL계열 후보의 단독 출마, 찬반투표는 옛말이었다. 1997년 이종권 구타치사 사건 직후와 같은 강렬한 반 NL 정서가 확산되었다. 그해 11월, 3팀의 선본이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문용득 총학생회장 후보는 '反운동권'이라는 선본명을 내세우고 출사표를 던졌다.
이렇듯 1997년 이후 전남대 총학생회의 역사는 적폐 세력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학생들의 분노가 도를 넘을 때마다 반발하는 세력이 선거에 출마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5.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막장으로 치닫다 (2004)
2003년 11월 19일, 2004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1차 선거에 출마한 문용득 총학생회장 후보는 선본명으로 '反운동권'을 내걸고 출마했다. 그는 지난 일련의 사태에 깊이 분노했다. 이는 명백한 네거티브 선거운동 방식이고 지향해야 할 방식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내건 케치 프라이즈는 분노한 학생들에게 제대로 먹히게 되었다. 1차 개표 결과 총 투표자 9,174명 중 4,316명(46%)이 '反운동권' 선본을 뽑았다. 전남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과반수 득표자가 없다는 이유로 37% 득표에 그친 2위 득표자 김성진과의 결선투표를 진행했다. 최종 개표 결과 '反운동권' 선본이 4,131표를 득표하여 4,128표를 득표한 김성진 선본을 3표 차로 격침시키고 당선되었다. 전남대 선거 시행세칙에는 "결선투표에서 연장투표를 진행했음에도 투표율이 50%를 넘지 않으면 '최다 득표자'를 당선자로 한다"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작은 차이지만 문용득 선본의 승리가 명백했다. 기존 세력(남총련)은 대부분의 단과대학 회장 선거에서 승리했을 정도로 '돈'과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기반 없는 신생 후보에게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단번에 패배할 정도로 학생들의 분노는 컸다.
그러나 전남대 중선관위는 문용득 선본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중선관위는 이전부터 총학생회 활동을 하고 있던 남총련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무효표가 3표보다 많다"며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공고했다.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전남대 중선관위는 중립을 지키지 않았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몰랐다. 남총련의 연장선상에 있는 적폐 세력은 이후에도 전남대학교에 남아 2016년 선거 때도 비슷한 억지를 부렸다.
이에 문용득 후보는 광주지방법원에 당선자 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3월 16일, 광주지방법원 재판부는 "전남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은 오차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위법한 결정이어서, 이 사건 결선투표에서 원고(문용득, 정재환)들이 전남대학교 제36대 총학생회장 및 부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전남대 중선관위는 3월 24일로 예정되어 있던 재선거를 취소하고 "그렇다면 이번 판결을 받아들일지 말지 학생들을 대상으로 찬반투표를 실시하자"는 황당한 주장을 내놓았다. 기성세력의 일부 구성원은 "전남대학교는 학생들이 자치하는 곳으로, 치외법권 지역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본부는 "대학교는 국가기관으로 법원의 판결을 인정하고 따라야 한다"며 예산지원 등을 실시했다. 문용득 후보는 입장문을 발표하고 판결문 수용을 요구했다.
<전남대학교 2만 5천 학우 여러분께>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총학생회 선거에서 최다 득표로 당선된 ‘反운동권’ 총학생회가 2004년도 총학생회를 운영하는 게 당연합니다. 이에 대해 광주지방법원 역시 저희가 신청한 가처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생회(기성세력) 소속의 작년 총학생회 부회장과 중앙운영위원회 임시의장은 "인정할 수 없다"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어떠한 협의도 거부하였습니다. 이들은 행태는 2만 5천 전남대 학우를 우롱하면서 결국은 '우리 학생회'만이 학생회를 운영하겠다는 독단과 독재입니다.
이에 ‘反운동권’ 총학생회는 주장합니다.
첫째, 우리 학생회야 말로 전남대 2만 5천 학우를 그만 우롱하고 '反운동권' 총학생회 당선자를 인정하라.
둘째, 2003년도 중앙선관위 위원들은 선거 시행세칙 유권해석(우리 학생회 당선시키기)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전남대 2만 5천 학우에게 사죄하라.
셋째, 35대 전남대학교 부총학생회장 정달성은 反운동권 총학생회를 인정하고 인수인계에 협조하라"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전남대학교 중앙운영위원회 (기존 세력)는 총학생회 사무실에 대한 인수인계를 거부한다. 해당 사무실은 엄연히 학교 건물이었지만 수배 중인 남총련 활동가들에게는 숙식을 해결하는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양심과 염치가 없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전남대 총학생회실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2004년 3월 23일 문용득 총학생회장이 선본원들과 함께 총학생회 사무실에 들어가자 전남대 중앙운영위원회는 "反운동권 선본 측이 이날 새벽 총학생회실을 점거했다"라고 발표했다. 문용득 회장은 가히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게 당한 정도의 수모를 겪고서야 겨우 임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문용득은 그해 7월 2천만 원의 예산을 사용하여 전남대 1학생회관 2층에 렌트센터를 마련했다. 노트북, 카메라, 빔 프로젝터 등을 자유롭게 대여 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가 만든 렌트센터는 2010년대 후반까지도 성황리에 운영되었다. 문용득은 결국 무사히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
필자는 현재 1997년부터 2019년까지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를 정리하고 있다. 2016년 이후의 전남대 총학생회 상황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이다. 2019년까지도 잘못된 적폐 세력이 사리에 어긋나는 아집에 사로잡혀 비슷한 행동들을 반복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4년'이라는 대학생활의 한계 때문에 기록이 고스란히 이어지지 않고 망각이 되풀이된다. 그래서 2023년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자 기록을 남긴다. 기록은 의무다.
6.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반미와 학내 투쟁 (2005)
한총련의 5·18 기념식장 기습시위는 한총련 합법화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한총련 수배해제에 대한 검토를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비(非) 검찰 출신 법무부장관 강금실은 이에 대한 포석으로 공안수사 경험이 전무한 이기배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을 대검찰청 공안부장으로 임명했다. 대검 공안부장은 전국 일선의 공안검사들을 총지휘하는 검찰 권력의 핵심으로 대한민국 체제수호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린다. 특히 1997년 대검 공안부장을 역임한 주선회는 5기 한총련 간부 전원에게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죄를 적용하여 한총련 조직 와해의 1등 공신이 되었다.
2003년 7월 25일, 대검찰청이 5~10기 한총련 수배자에 대한 전면적인 수배 해제를 발표했다. 지명수배 혹은 내사 중이던 한총련 관련자 152명 중 79명의 수배가 해제되었다. 검찰은 한총련 대의원을 대상으로 한 일괄 수배 방침도 폐기했다. 이로써 한총련과 국가권력의 전면적인 충돌은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한총련은 이미 학내에서도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있었다. 2003년 11월, '반미구국의 철옹성'으로 불리던 전남대학교의 한총련 세력이 '反운동권'을 선본명으로 내걸고 출마한 반권 후보에게 간단히 패배한 것 역시 이에 대한 방증이 아닐 수 없다.
2004년, 전국 주요 대학 학생회의 77%가 '비(非) 운동권'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앞다투어 한총련 탈퇴를 선언했다. 2005년 이후 한총련에는 전남대 총학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세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2004년 11월에 치러진 2005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서는 또다시 NL 세력의 박한균 후보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애초에 이들 이외의 후보가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다른 후보가 선거에서 승리하더라도 2년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1997년 이후의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명예도 긍지도 아니었다. 특정 이념에 경도되어 어리석은 행동만을 일삼는 이들이 기존에 형성된 '돈'과 '세력'을 바탕으로 바통 터치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97년부터 2017년까지의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모두 20명이다. 그러나 이 중 '경선'을 통해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이는 6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14명은 단독 입후보한 후 찬반투표를 통해 당선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찬반투표는 지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6번에 불과했던 '경선'을 분석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NL 세력은 6번의 경선 중 과반수에 해당하는 4차례의 선거에서 패배했다. 1998년, 1999년, 2004년, 2011년에 총학생회장을 맡은 4명은 모두 기성의 적폐 세력을 비판했고, 돈과 세력에 있어서 크게 밀렸지만 학생들의 높은 지지를 받고 당선되었다.
결론적으로 전남대학교의 NL 세력이 학생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이들은 학생들의 지지가 아닌, '돈'과 '노동력'을 비롯한 강력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학생회를 독점해왔다.
오랫동안 전남대 총학생회를 주도해온 세력은 한국 사회를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한국 사회의 성격을 식민지 반(半)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했던 NL 세력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한 이들이 NL 세력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주체사상'을 새로운 세상의 설계도로 수용했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였다. NL 세력은 혁명의 방법으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NLPDR)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적 이론과는 거리가 먼 맹목적이고 교조적인 믿음에만 사로잡힌 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들은 특히 반미투쟁에 집중했다. 전남대 총학생회를 오랫동안 주도해온 우리 학생회 역시 학내문제보다는 반미투쟁에 주력했다. 2005년 5월 13일, 전남대 총학생회 주최로 5.13 반미(反美) 공동행동의 날 행사가 진행되었다. 박한균 총학생회장은 "2005년을 주한미군 철수 원년을 맞이하는 해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 당시에도 학생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해 여름 부총학생회장은 송정리 미사일 기지에서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연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도 전남대 총학생회는 2004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의 뼈 아픈 패배를 교훈 삼아 등록금 문제를 비롯한 학내활동을 병행했다. 등록금 문제는 학생들의 높은 공감을 받을 수 있는 의제였다. 이들은 2004년에 비해 등록금이 8.4% 인상되자 이에 대한 반대를 표방하고 '민주납부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이 주장한 '민주납부'는 본부에 등록금을 내지 않고, 총학생회에서 개설한 계좌에 전년도 등록금을 납부하여 학생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활동이다. 2005년 3월, 총학생회가 3,000여 명의 미등록 학생에게 민주납부 운동을 고지했다. 이 중 백여 명이 운동에 참여하여 등록금을 일시적으로 납부하지 않았다. 144명은 납부기한인 4월을 넘겨 6월까지도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고 본부 측과의 대립을 지속했다.
본부 측은 6월 14일을 최종시한으로 제시했다. 이에 135명이 등록금을 본부에 일괄로 납부했으며 대표단 9명만 납부 거부를 지속했다. 학생처장은 "납부 기간이 끝났음에도 학생들의 제적을 바라지 않았기에 기간을 연장해주었지만 기말고사 기간까지 등록금이 납부되지 않았다"며 이들 9명을 미등록 처리했다. 총학생회는 즉각 총장실을 점거했다. 결국 학생처는 공식적인 사과를 표명했다. 미등록 처리된 이들은 행정절차가 있기 때문에 재입학 절차를 밟기로 했다. 해당 활동은 상당한 정치적 성과를 이루어냈다. 물론 이미 확정된 등록금 상승을 막지는 못했지만 등록금 문제를 환기시켜 학생들의 호응을 받았다. 2005년 11월, 2006년도 총학생회장을 선출하는 선거가 열렸다. 선거는 경선으로 진행되었고 3팀이 선거에 나섰다. NL 세력은 장송회, 류선민을 각각 총학생회장과 부총학생회장 후보로 내세웠다. 안청섭, 이선영 후보가 '반올림' 선본으로 이에 대항했지만 선거 결과 장송회, 류선민의 우리 학생회가 또다시 당선되었다. 이 선거 과정에서 훗날 전남대 총학생회에 파란을 불러일으키는 박은철 후보가 출마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완주하지는 못했다.
2005년 4월 30일,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이 출범했다. 한대련은 학생운동이 학생들의 외면을 받는 현 상황을 진단하고 등록금 등 대학생들의 생활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표방했다. 2005년 11월, 각각 전남대 총학생회장 및 부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장송회, 류선민은 2006년도부터 연이어 한총련 의장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이 시점의 한총련은 과거의 거대한 조직이 아닌, 이미 그 시효를 다한 폐허에 불과했다. 결국 한국의 학생운동은 빠르게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7.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은 찬반 선거였다 (2006~2009)
2005년 11월 선거를 끝으로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는 4년 간 찬반투표로 치러졌다. 2006년 11월부터 류선민, 김현웅, 오주성, 김유리가 찬반투표를 통해 차례로 총학생회장이 되었다. 그즈음 학생들의 무관심은 더욱 보편화되었다. NL 세력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경쟁후보가 없으니 선거는 용이했다. 한총련에서 후보를 정하고 투표율을 채우는 선거운동만 진행했다. 이들은 선거기간에는 '반미', '자주'와 같은 학생들의 공감을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신념을 슬쩍 숨기고 좋은 이야기를 했다. 학생들은 '학생회가 없어지면 생겨날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우려하여 찬반 투표에 참여했다. 대학교는 3년이면 구성원의 상당수가 교체된다는 점도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스스로의 신념과 사상을 드러내고 떳떳하게 진행한 선거는 아니었으나, 이들의 권력은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사상의 자유는 모든 인간의 기본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미국에 반대하고 북한을 높이 평가하는 것 역시 자유롭게 행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들은 맹목적인 반미 주장을 하는 것 외에는 실력이 전무한 이들이다. 이 시점의 전남대 NL 세력은 제대로 된 판단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때부터 많은 학생들이 인터넷 공간에 부끄러움을 토로하는 글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2006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장송회는 한총련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7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류선민 역시 한총련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008년에는 한총련 대의원 중 그 누구도 의장선거에 출마하지 않아 의장 선출이 무산되었다. 결국 김현웅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한총련 투쟁본부장을 맡았고 한총련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 시점의 한총련은 이미 난파선이었다. 서울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여러 대학들이 앞다투어 한총련을 빠져나갔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한총련을 탈퇴하며 다수 학생의 관점과 괴리된 학생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운동방식과 상부 기구에 의한 하향식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등이 지적되었다.
2006년도 총학생회장을 지낸 장송회는 현재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개인의 의사표현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인물이 재임기간에는 학생들의 관점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학교의 이름으로 내세우고, 퇴임 후에는 그 경력을 밑천 삼아 해당 세력의 다른 조직에서 자리를 차지한다. 실로 부끄러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한다.
2007년도 총학생회장 류선민은 지적능력이 의심될 정도로 맹목적인 신념들을 드러냈다. 그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2007년 1월 24일 범청학련 남측본부가 주최한 집회에 참여하여 "핵보유 민족의 존엄과 기상으로 반통일세력의 최후 발악을 저지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는 "선군 정치가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 전쟁의 위협을 막는다"며 북한의 선군 청지를 철저히 옹호했다. 정상적인 민주주의자라면, 군대를 앞세운 정치의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간과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그저 북한의 모든 것을 무조건 옹호하고 미국을 극렬하게 비난했다. 누구에게나 특정 국가를 비판하거나 높게 평가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조적인 믿음에 가까워진다면, 그것은 이념이 아닌 신앙이다.
그는 심지어 북한 인권문제에는 근거가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인권문제에는 근거가 없다 미국의 인권단체들이 공작을 해 탈북자들에게 거짓말을 하게 한 것이다", "탈북자가 아닌 북한 내부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나는 금강산에 가서 북한 동포를 만났었다 동포에게서 인권문제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가 직접 한 발언들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씁쓸한 헛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마치 CIA가 내 귀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는 수준의 말로 들린다. 북한의 실상을 모르던 1980년대도 아닌 2007년에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는 극단적인 수준의 몰주체성이 자리하고 있다. NL조직에 소속된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른다. 그들은 조직의 세계관을 철저하게 내면화한다. 조직의 세계관에는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체계도 있지만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및 북한 체제에 대한 맹목적인 옹호가 포함되어 있다.
류선민은 2019년 현재 37세의 나이로 서울대학생진보연합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정의당 윤소하 의원에 대한 테러사건으로 오랜만에 언론에 등장했다. 2019년 7월 1일, 정의당 윤소하 의원실로 죽은 새 시체, 커터칼과 함께 협박편지가 배송되었다. 이는 명백한 테러리즘이다. 편지에는 "윤소하 너는 민주당 2중대 앞잡이로 문재인 좌파 독재 특등 홍위병이 돼 개지랄을 떠는데 조심하라 너는 우리 사정권에 있다"는 내용이 '태극기 자결단'의 명의로 적혀있었다. 윤소하 의원실은 즉각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CCTV 추적을 통해 협박범을 검거했다. 확인 결과 범인은 류선민이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은 '사기 조작극'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그러나 경찰이 택배가 배송된 편의점으로부터 CCTV 1천여 개를 뒤져 류선민의 집까지 이어지는 동선을 확인했기 때문에 조작의 가능성은 없다.
2008년 전남대 총학생회는 또 하나의 전설을 전남대학교 역사에 남겼다. 총학생회 조직국장과 한총련 대의원을 역임했던 전남대 재학생이 전남대 중앙광장에 주체사상탑 모형을 설치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높이 6m의 주체사상탑 모형을 각목과 흰색 천을 이용해 만들었고 붉은 글씨로 '주체'라는 글자를 새겨 1주일 동안 전시했다. 밤에 빛이 나도록 조명장치를 설치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당시 분향소가 설치되었던 1학생회관에서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장소였다. 이렇듯 2006년 이후 한총련 내부와 전남대 내부에서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는 상황이 되자 전남대를 중심으로 소수 극렬화된 자들이 곳곳에서 한심한 행동을 자행했다.
결국 2006년 이후 4년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는 NL계열 후보의 단독 입후보 및 찬반투표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자행한 어리석은 행동들은 '2010년 사건'의 밑바탕이 된다. 나는 누군가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는 말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를 처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상 고무 찬양죄는 명백한 악법이다. 민주사회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그 불가결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판단은 언제나 엄정하다. 이들이 정치적 대표자로서 했던 행동들은 철저히 기록되어 판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8.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적폐 세력의 몰락 (2010) 上
2006년 이후 4년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는 찬반투표로 진행되었다. 그 사이 대학생 전국 조직이었던 한총련은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학생운동은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었다. 전남대 총학생회 역시 한대련에 가입했다. 2009년 11월에 실시된 2010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에는 역시 NL계열의 김유리 후보가 단독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전남대학교 개교 이래 57년 만에 등장한 첫 여성 총학생회장이었다. 그는 전남대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한대련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지난 4년간 쌓인 학생들의 분노는 만만치 않았다. 선거 당시 다양한 학내 공약들이 발표되었지만, 총학생회의 역량은 서울에서의 활동에 집중되었다.
김유리 총학생회장은 전남대 총학생회 산하 위원회에서 열린 33번의 회의 중 단 한 차례의 회의에만 참석하고 나머지 회의에는 불참했다. 학생들은 학내 소통 부재에 큰 불만을 느꼈다. 김유리 총학생회장은 "이정성 부총학생회장에게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학생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많은 학생들이 학내 소통의 부재를 지적했다. 전대신문은 "소통 공약 많았지만 실천력은 부족했다", "학생 복지 등을 위해 노력 성과는 '글쎄'" 등의 특집기사를 편성하여 보도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11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던 세력이 있었다. 전남대 산림자원학과 98학번 박은철이 주도하던 '전설'이다. 전설은 '전남대학교를 다시 설계합니다'라는 뜻이다. 2005년 11월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했던 박은철은 2006년 이래 학내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여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해 왔다. 그는 마침내 2010년 11월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기존 총학생회와 결을 달리 한 3차례의 앞선 총학생회들과는 달랐다. 1998년, 1999년, 2004년에 집권한 총학생회는 기존 세력에 대한 반감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지만, 단과대학 학생회에서는 기존 학생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결국 총학생회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여전히 '우리 학생회'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권교체는 단발성으로 그쳤다. 이는 마치 김대중,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음에도 여전히 의회 권력을 한나라당이 틀어쥐고 있었던 상황과 비슷하다. 그래서 3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NL 세력이 학생회를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은철의 '전설' 세력은 오랜 준비를 통해 대부분의 단과대학에 학생회장 후보를 내세울 수 있는 조직력을 갖추고 있었다. 5년간 공석이었던 총여학생회장 후보도 준비되었다. 당시 박은철 선본을 취재했던 전대신문 기자는 "어느 중식당 2층에서 열린 전설 선본 출정식에 취재차 참여한 바 있다. 당시 13개 이상의 테이블이 있었고 총학생회와 총여학생회 및 각 단과대학 선거를 준비하는 후보 및 실무자들이 각 테이블에 모여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라고 전한다. 박은철 선본은 상당히 준비되어 있었고 기존의 NL학생회 세력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기존 학생회 세력의 대응은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준비되었다. 2004년과 2016년에 사용된 방식과 같은, '네거티브'와 장악되어 있는 권력을 활용한 '민주주의 파괴'였다.
우선 총학생회 선거를 관리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구성에서부터 기존 세력의 부정이 시작되었다. 세칙상 '호선(선출)'해야 하는 선거관리위원장을 대의원들이 지명한 것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자 기존 학생회는 "호선의 정확한 뜻을 몰랐다"고 해명했다. 총학생회 후보자 모집 결과 박은철(산자98), 송은광(경영01)의 '전설' 선본과 윤주삼(경영07), 노승아(신방06)의 '로그인'(우리) 선본이 출마했다. 단과대학들에서도 두 선본 소속 후보들의 경선이 이루어졌다. 한편 선거 진행 직후부터 '전설' 선본이 뉴라이트라는 소문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해당 소문은 기존 학생회 세력 구성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2010년 11월 16일부터 이틀간 전년도 부총학생회장 곽성용이 '총학생회 선거 뉴라이트 개입'이라는 내용이 담긴 홍보물을 학교 전역에 부착하고 다닌 것이다. 이는 기존 학생회 간부가 직접 비겁한 방식으로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는 점에서 추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홍보물에는 "뉴라이트가 전국적으로 학생회 선거에 개입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마치 이미 확산된 소문과 맞물려 전국적인 흐름 속에서 '전설' 선본이 선거에 나섰다고 이해할 수 있는 홍보물이었다. 전설 선본은 즉시 항의했다. 홍보물 부착은 심지어 총학생회 내부 회의를 통해 결정된 일이었다. 총학 측은 "뉴라이트를 반대하는 대학생 연합의 요청으로 부착했을 뿐이다"라며 "2007년 부산대 사건 이후 매년 선거 기간에 관례적으로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곽성용은 "전설 측을 뉴라이트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존 총학생회의 이런 행동에 크게 분노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건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정이었다. '우리' 측 단과대학 선관위원들은 '전설' 측 후보들의 입후보를 방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법과대학 선거관리위원회는 학생회장으로 출마한 '전설' 측의 김성원, 김상호 후보를 자격 박탈시켰다. 사유는 '법대 선관위 비방'이었다. 이의제기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관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후보자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폭거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그 어떤 선거에 출마해도 선관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후보자 자격이 박탈되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선거 이후 선거법 위반 등을 이유로 재판을 받을 수는 있지만, 선관위가 출마한 후보의 자격을 임의로 박탈하는 건 불가능하다. 전남대 선거세칙에 이러한 독소조항이 존재하는 것은, '전년도 총학생회 멤버들로 구성'되는 선관위를 보호하고 기존 세력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가 아닐 수 없다.
인문대 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전설' 측 후보의 후보자 등록이 무산되는 사건도 있었다. 당시 선거세칙에는 "4학기 이상 본 '대학'에 등록한 학생만이 학생회장 선거에 나올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에 인문대 선관위는 여기서 말하는 '대학'이 '전남대학교'가 아닌, '전남대 인문대학'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일반 학부에서 전과한 바 있는 전설 측 후보의 등록을 무산시켰다. 여기에 대해 선거세칙에서 말하는 '대학'이 상식적으로 '전남대학교'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반발이 있었다. 이렇듯 2010년의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기성 세력과 이에 대항한 신생 세력의 갈등 속에서 치러졌다.
9.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적폐 세력의 몰락 (2010) 下
2010년, 전남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기존 세력에 의해 구성되었다. 김소망, 나승현이 각각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맡았다. 김소망(법학07)은 2016년 11월 선거 때까지 학교에 남아 이들 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현조-정강현 선본의 선본장을 맡았다. 이때 이들이 같은 계열 선배들로부터 비밀리에 후원금을 모았다는 사실이 전남대학교 대나무숲에 폭로되었다. 2000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변재훈은 단톡방에서 비공식 출범식 참석자를 모집했다. 당시 폭로된 비밀 웹자보에는 '후원문의 : 김소망'이라는 이름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었다.
2010년 11월 23일 숱한 논란을 딛고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가 시작되었다. 총여학생회와 각 단과대학 선거도 함께 진행되었다. 선거는 지난 몇 년간 3일에 걸친 연장투표 끝에 개표 여건인 투표율 50%를 넘겼던 것과 달리 이틀 만에 투표율 50%를 넘겨 개표 여건을 채웠다. 그러나 개표는 중선관위의 갑작스러운 발표로 하루 미루어지게 되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4일 오후 11시부터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로그인 선본(우리)' 측 이의제기로 '전설 선본' 징계와 관련된 긴급회의를 진행한 것이다. 이들은 송은광 부총학생회장 후보가 이력 사항에 명시한 '숭일고 학생회장' 문구가 허위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학인 결과 송은광은 1999년 7월 6일 숭일고 학생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회장이 개인 사정으로 사퇴하자 학생회장으로 임기를 수행했다.
11월 25일 오후 8시 30분, 중선관위의 긴급회의가 열렸다. 중선관위는 징계 여부를 표결에 넘겼다. 여기서 징계를 받게 되면 '전설' 측 후보 자격이 박탈되는 상황이었다. 이날 회의에는 선관위원 16명 중 13명이 참여했다. 표결 결과 제적 13명 중 찬성 7명, 반대 6명으로 찬성표가 전체의 2/3를 넘지 못해 징계안은 부결되었다. 이에 당일 오후 9시부터 개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정을 넘긴 11월 26일 오전 2시 25분경 또다시 개표가 중단되었다. 개표 직전 자리에 없던 나승현 중선관위 부위원장이 나타나 갑작스러운 사퇴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 진행을 책임지는 막중한 위치에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사퇴를 발표하고 전반적인 선거 진행에 문제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그는 선거 시행세칙상 2/3 이상의 의결이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이용되어 '전설' 측에 합당한 처벌을 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중선관위는 부위원장 사퇴 직후 긴급회의를 열고 개표를 중단했다.
중선관위는 "이번 선거가 흑색선전 등 유세과정에 있어 기성 정치권과 다름없는 행태를 보였고 전반적으로 선관위의 시행세칙이 지켜지지 않아 위상이 실추됐기에 전학대회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민주적 의사가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결국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전대신문 신대희 편집국장은 "중선관위는 개표중단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묻고 또 물었지만 인터뷰하지 않을게요, 내일 공식 입장 표명하겠습니다 라는 공허한 답변 만이 돌아왔다.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개표 중지를 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등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일이 벌어진 개표 현장의 상황에 너무 안타깝다"고 의견을 밝혔다.
학생들의 분노는 인터넷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대부분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다음날인 11월 27일, 중선관위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선관위원들은 2/3 이상의 찬성으로 개표 재개를 결정했다. 중선관위는 회의 직후 "28일 혹은 29일 오후에 개표를 다시 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11월 28일 오후 5시, 김소망 선관위원장이 중대발표를 했다. 그는 "26일 오전 회의에서 선거 전반의 문제를 전학대회로 위임하겠다고 결정했으나 다음날 오후에 똑같은 안건으로 회의를 진행했으니 이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위배된다"며 "개표를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전대신문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은 형사 사건에서 확정된 판결에 대해 다시 재판하지 않는다는 형사상의 원칙"이라며 선관위원장의 황당한 주장을 비판했다. 결국 선관위원장의 황당한 주장에 재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11월 28일 오후 8시 김소망 선관위원장은 "26일 회의는 공식 회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개표를 하기로 했다"라고 입장을 번복했다. 중선관위는 이 과정에서 입장을 3번이나 바꿨다.
결국 2010년 11월 29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개표가 진행되었다. 투표 결과는 전설 측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전설 측은 59.93%를 득표하여 27.1%를 득표한 우리 학생회 측 로그인 선본을 완전히 격침시켰다. 전설 측은 재학생이 324명인 수의과학대학에서는 80.86%를 득표하여 14.84%를 득표한 '우리' 선본을 앞섰고, 모든 단과대학에서 2배 이상의 차이를 거두며 완벽하게 승리했다. 기성세력은 학생들의 여론이 숫자로 드러나자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지난 4년간 학생회를 운영해온 세력에 대한 학생들의 준엄한 심판이었다. 결국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기존 세력은 4년간의 찬반투표 이후 오랜만에 치러진 경선에서 대안세력에게 완벽하게 패배했다. '전설' 선본은 단과대학 학생회장 선거가 경선으로 치러진 경영대, 농생대, 사회대, 자연대에서 모두 승리했으며 대부분의 단과대학 및 총여학생회와 총학생회를 완전히 장악했다. 우리 학생회는 유일하게 공과대학 회장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제4 투표소에서 대리투표로 추정되는 집단 서명이 발견되어 투표함 전체가 무효표로 처리되기도 했다. 결국 전남대학교에서 상식과 이성을 상실한 채 횡포를 부리던 우리 학생회 세력은 1년간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이는 '전설' 세력의 준비와 더불어 기존 세력이 스스로 저지른 잘못된 행동들을 통해 자초한 일이었다. '전설' 측은 전남대학교를 다시 설계하겠다는 슬로건을 앞세워 2011년도 총학생회를 운영하게 됐다.
10. 전남대 총학생회, '전설' 세력의 1년 (2011)
2011년 1월, '전설' 총학생회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2004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수인계 과정에서부터 기존 세력과의 첨예한 대립이 이어졌다. 기존 총학 세력은 인수인계에 협조하지 않았다. 연락 자체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기존 총학 측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자료들을 숨기기 위해 총학생회실에 남아있던 대량의 문건을 외부로 반출했다. 이들은 총학생회실에 있던 일부 문건을 1학생회관 뒤편에서 몰래 소각하던 중 전대신문과 일반 학생들에게 적발되기도 했다.
'전설' 총학 측은 기존 세력의 문건 소각이 끝난 후에야 총학생회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전설 측은 뒤늦게 들어간 총학생회실에서 북한과 관련된 여러 문건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전년도 선거에서 압승한 전설의 역할은, 기성세력에 대한 비판이 아닌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운영이었다. 전설 측은 인수인계 과정에서 기존 학생회로부터 상당수의 물품과 결산서, 사업계획서 등을 인수인계받지 못했다.
2011년 1월, 전년도 총학생회가 작성해 대학본부에 제출한 '2010년 기성회계 구매물품 현황조사 결과'라는 문서에 따르면 2010년도 총학생회가 구매한 물품 161개 중 37개가 사라져 있었다. 특히 작년에 구매한 고가의 태블릿 컴퓨터 4대도 '도난'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만약 컴퓨터 4대 등 37개의 물품이 사라진 것이 사실이라면, 전년도 총학생회의 물품관리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컴퓨터 4대가 모두 사라진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이 대목에서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은 물론이다.
'전설' 총학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공약 사항 중 하나였던 총학생회실 리모델링이었다. 본부 측에 리모델링을 요구했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공사가 진행되었다. 기존의 전남대 총학생회실의 벽면은 모두 두터운 철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투적 학생운동의 전성기 시절, 경찰의 침탈에 대비한 결과였다. 그러나 2011년 초의 리모델링으로 총학생회실은 유리벽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론 이후 전남대 총학생회실은 경찰의 침탈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 시점까지 공약 사항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전설' 측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개강 이후 전설이 보여준 총학생회 운영 실력은 많은 학생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우선 선거 당시 전설 선본의 주요한 공약으로 제시된 학점 취소제부터 실패로 돌아갔다. 박은철 총학생회장은 개강 직후 전대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올해 전설 총학생회는 새로움을 포기하고 내년, 내후년 총학생회를 위한 기반 역할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든다. 이 말을 전해야 하는 총학생회의 슬픔을 학우 여러분들이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그의 발언은 전남대를 새롭게 설계하겠다는 세력의 정치적 리더의 발언으로서 부적절했다. 이후에도 5월까지 인수인계 문제를 둘러싼 공방이 지속되었고 또 하나의 주요 공약이었던 5월 대동제 공약마저 무산된다.
전설 총학생회는 5·18 전야제가 열리는 5월 17일에 전체 학생총회를 추진하였으나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었다. 이때부터 전설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해 전남대 등록금은 3년 연속 동결되었고 그즈음 학내 구성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법인화 문제'였다. 많은 학생들이 법인화 문제를 둘러싸고 학생회가 나서 줄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설 측은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음에도 법인화 문제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학생들은 특히 이 부분에 실망했다. 그해 전남대 철학과는 현대중공업 회장이자 국회의원인 정몽준에게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전남대 철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여식 당일에도 수여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진행했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이 과정에서 수여식 진행을 위해 시위대를 자신들이 설치한 경계 안에만 머물도록 한 후 이를 벗어날 경우 징계위원회에 회부할 계획을 하기도 했다.
한편 기존 학생회 세력은 선거 패배 이후 'The 전대'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전설 세력에 대항했다. '우리 학생회'라는 이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이들은 전설 측이 미온적으로 나서던 법인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특히 재학생 6,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전체 학생총회를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이 같은 The 전대 측의 행보는 향후 선거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The 전대가 추진한 9월 27일 전체 학생총회 역시 정족수 미달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The 전대'는 이 과정에서 모여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강연을 진행하는 등 기민하게 대응했다. 전설 총학생회는 'The 전대' 측과 똑같은 안건을 내세워 10월 19일에 전체 학생총회를 재추진했지만, 역시 무산되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전설 총학생회는 임기 중 추진된 3차례의 전체 학생총회가 모두 무산되었으며, 대부분의 공약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이 같은 상황에서 내년도 총학생회장을 선출하는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1년 11월 총학생회 선거는 전년도 같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11. 또다시 파국을 맞이한 전남대 총학선거 (2011) 上
2011년 11월, 다시 1년 만에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가 공고되었다. 1년 전 정권교체에 성공한 '전설' 세력의 정지웅·이현택 후보와 NL 세력이 내세운 '액션' 선본의 권민영·김민규 후보가 출사표를 던졌다. 선거는 초기부터 과열 양상을 보였다. 특히 1년 만에 선거에 도전하는 액션 측에서 적극적인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지난 1년 동안 있었던 전설 측의 여러 실책들이 거론되었다.
한편, 2011년 선거를 관리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지난 1년간 총학생회를 운영해온 전설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년 전 기존 학생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중선관위가 저지른 야만의 역효과로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던 전설은 불과 1년 만에 그들이 1년 전에 보여준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그 시작은 액션 선본에 대한 경고, 주의 조치였다.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시행세칙에는 3번의 경고를 받으면 선본의 자격이 박탈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중선관위는 우선 액션 측의 유인물을 문제 삼았다. 액션 측이 전설(전남대학교를 설계합니다)을 겨냥하여 진행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담긴 유인물이었다. 액션 측은 설문조사 참여자의 79%가 전남대가 새롭게 설계되지 않았다고 답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했다. 중선관위는 액션 측에 '경고' 조치를 취하고 "설문의 구체적 실시 방법과 표본 등이 없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해당 유인물은 인쇄를 앞두고 중선관위 검토를 마친 상황이라 본인들이 통과시킨 유인물을 다시 문제 삼아 징계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이후 전설 측이 배포한 유인물도 상대 후보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경고 조치를 받았다. 액션 측 후보 두 사람이 법인화 활동 당시 진행한 단식투쟁을 비방하는 내용의 유인물이었다.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후보로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재학생 500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해야 한다. 중선관위는 액션 측이 학생들에게 서명을 받는 과정에서 학교에 바라는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는 증언과 모 재학생이 지인에게 보낸 액션 측 후보 지지를 요청하는 문자메시지를 사전 선거운동으로 문제 삼아 경고 조치했다. 이 시점에서 액션이 받은 경고는 2건이었다. 이에 중선관위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과도한 세칙 해석으로 징계를 남발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논란이 된 메시지는 액션 측 선거운동원이 아닌 일반 재학생이 지인에게 보낸 문자였다. 1년 전, 기존 세력의 로그인 선본이 유일하게 승리했던 공과대학의 선관위원장은 중선관위 규탄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2011년 11월 23일, 2012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가 시작되었다. 투표는 저조한 관심 속에서 2차례 연장되었고 25일과 29일에 실시된 연장투표 끝에 겨우 투표율 50%를 넘겼다. 한편 연장투표가 진행되던 11월 25일, 전남대 학내 곳곳에 '여러분 투표합시다'라는 내용의 유인물이 붙었다. 해당 유인물에는 "한대련이라는 거대 정치 집단으로부터 전남대학교를 지켜내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는 명백히 NL 세력이 내세운 액션 선본을 겨냥한 내용이었다. 해당 유인물을 누가 준비하여 유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는 학내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2011년 11월 29일, 투표가 마무리되었다. 전체 학생 17,845명 중 8,710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개표 결과 액션 선본이 4,192표를 득표하여 4,066표를 득표한 전설 선본을 간발의 차로 제치고 당선되었다. 11월 30일, 전남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액션 선본의 당선을 공고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갑작스러운 논란이 생겼다. 인문대학 학생회 선거 총 투표자수와 선거인명부 사이에서 오차가 발견된 것이다. 11월 29일, 박지민 인문대학 선관위원장이 투표를 앞두고 선거인 명부상 숫자가 770명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중선관위가 투표 직후 인문대학 선거인 명부를 확인했을 때에는 731명만 파악되었다. 추후 선거인명부 문서 뒤쪽 2장이 망실된 것이 확인되었다. 투표함에는 763장의 투표용지가 있었다. 중선관위가 파악한 명부를 기준으로 하면 오차가 3%가 넘었다. 이 경우 세칙상 전체 투표함을 무효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에 인문대학 투표함을 무효로 처리할 것인지, 인정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인문대학 투표함 개표 결과 총 투표수 763표 중 무효표를 제외한 475표를 액션 선본이, 245표를 전설 선본이 가져간 상황이었다. 전체 선거에서 두 선본의 표 차이는 126표에 불과했다. 따라서 인문대 투표함 무효 여부는 전설 선본에게 중대한 쟁점이었다. 당시 전설 선본은 공대, 농대, 인문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단과대학에서 간발의 차이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패배한 3곳의 단과대학에서 200표~300표가 넘는 큰 차이로 밀려, 선거의 승패가 갈렸다. 인문대학의 표심에는 정몽준 논란 등을 포함한 전설 총학생회의 실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선관위는 회의를 열고 인문대학 투표함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많은 학생들은 인문대 선관위원장이 앞서 파악했던 770표를 인정하고 투표용지 숫자인 763표와 비교해 오차가 7표에 불과함이 인정될 거라 생각했다. 선거인명부 망실 역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책임져야 할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당선을 공고한 만큼, 깨끗하게 결과를 인정하고 승복하는 게 맞았다. 1년 전, 김소망 선관위원장의 오판을 반면교사로 삼았어야 했다. 그러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오차율 계산은 원칙적으로 선거인명부와 투표자 수를 대조하는 것이다. 인문대 학생회 투표용지의 수를 근거 삼아 총학생회 투표수를 결정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전설 선본의 이의제기를 받아들였고, 2012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2011년 11월 30일, 전설 측은 인문대학 선거 개표 과정에서 중선관위에 거세게 항의한 황선화 인문대학 학생회장 당선자가 세칙상 '선본장이 아닌 자의 이의제기 금지' 조항을 어겼다며 징계를 요청했다. 중선관위는 "선거운동원이 중선관위 업무에 지장을 초래했을 경우, 해당 후보자를 징계할 수 있다"며 "개표장에서의 소란행위와 투표함을 내리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특정 선본원의 방해행위에 '경고' 조치를 취하겠다"라고 밝혔다. 세 번째 경고였다. 이로서 선거는 무산되었고 해당 선거에서 승리했던 액션 선본은 경고 누적으로 후보자 자격을 상실했다. 전년도 총학생회 간부들로 구성된 중선관위의 이 같은 결정은 오직 같은 편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를 무효화시키고 상대 선본의 후보자 자격을 강제로 상실시켰다는 거센 비판에 마주했다.
그러나 중선관위는 재선거를 강행했다. 전설 선본에 대한 사실상의 찬반투표가 공고되었다. 액션 측은 단과대학 학생회장 당선자들을 중심으로 비상중앙운영위원회를 발족하고 재투표 거부와 선거 진상조사단 조직을 선언했다. 황선화 인문대학 학생회장이 의장을 맡았다. 기존 중앙운영위원회는 "중운위의 임기는 12월 31일까지"라며 반발했고 관련한 논란이 거세졌다.
12. 또다시 파국을 맞이한 전남대 총학선거 (2011) 下
2011년 12월 7일,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이틀에 걸친 투표 결과 투표율은 19.23%로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재선거는 세칙상 투표율 50%를 넘기지 못하더라도 개표를 진행하는 게 가능하다. 중선관위는 개표를 추진하고자 했고 액션 선본과 이들이 구성한 비상중운위는 이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첫 투표가 진행될 시점에는 비등비등했던 여론이었지만, 중선관위가 액션 후보자 자격 박탈과 재선거를 결정하자 여론의 반응은 싸늘하게 식었다. 특히 중선관위에 그 책임이 있는 선거인명부 망실을 근거로 투표 자체를 무효로 처리한 상황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분위기였다.
재선거가 시작되던 12월 7일, 전남대학교 민주수호위원회 명의의 유인물이 학내 곳곳에 배포되기 시작했다. 수호위원회는 2012년도 단과대학 회장 당선자들로 구성된 비상중운위에 맞서 전설 측의 송은광 부총학생회장과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이 결성한 단체다. 이들은 총학생회실에서 발견된 북한 문건 등을 근거로 구 운동권 세력으로부터 전남대학교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은광 부총학생회장은 "선거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중앙운영위원회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객관적인 자료 제공을 통해 학생들의 혼란을 없애고자 유인물을 배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해당 문건들이 실제로 총학생회실에서 발견되었다고 해도, 현직 단과대학 회장들의 이러한 집단행동은 명백한 선거개입이었다. 이는 1년 전 뉴라이트가 전국적으로 총학생회 선거를 지원하고 있다는 유인물을 배포했던 곽성용 전 부총학생회장의 행동과 다를 바 없었다. 문제가 불거졌지만 전설 측에 대한 중선관위의 징계는 '주의'에 그쳤다.
2011년 12월 9일, 재선거가 19.23%의 저조한 투표율로 마무리된 직후 개표가 시작되었다. 이때 선관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이동이 총동연 선관위원장이 수호위원회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액션 측이 거세게 반발하는 일이 있었다. 뒤이어 중선관위가 특수교육학부 학생들을 일괄 사고자 처리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자 개표장은 일대 혼란에 휩싸였다. 특수교육학부는 광주캠퍼스 소속이지만 여수캠퍼스에 위치해 있었다. 본 선거 당시에는 중선관위에서 버스를 대절해서 투표에 참여하도록 했지만, 재선거 때에는 중선관위에서 이러한 절차들을 생략한 채 이들을 일괄 사고자로 처리했다. 특수교육학부 학생들은 광주에 와서 투표권을 행사하거나 교차수강으로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학생들의 선거권이 배제된 것이라며 강력히 항의했다. 중선관위는 개표를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중선관위는 회의를 진행한 후 위원장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투표함을 둘러싼 갈등상태가 지속되었다. 중선관위는 12월 21일까지 개표를 3차례나 시도했으나 액션 측의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다. 비상중운위는 액션 측 당선을 인정하라는 압력의 수위를 높였다. 12월 26일, 중선관위는 개표를 강행했고 전체 투표자 3,112명 중 1,982명, 63.7%의 찬성으로 전설 측 후보의 당선을 확정 지었다. 박은철 총학생회장은 전설 측 당선자에게 인수인계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12월 29일, 이에 반발한 비상중운위가 총학생회실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박은철은 이들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박은철은 "아직 비상중운위 소속 당선자들의 임기가 시작되지 않았고, 현 총학생회의 임기는 12월 31일까지"라고 주장했다. 액션 측은 2012년 총학생회 당선자가 전설 측이라는 중선관위의 결정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기했다.
2012년 1월 1일, 액션 측 단과대학 회장 당선자들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액션 측은 단과대학 학생회 16곳 중 8곳에서 승리한 상황이었다. 단과대학 회장들로 구성되는 중앙운영위원회에서 우위를 점한 액션 측은 임시 중운위를 소집하여 액션 선본의 당선을 의결했다. 신주영 사회대 학생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도 발족했다. 그러나 전설 측 단과대학 회장 당선자 등 6명은 즉시 이에 반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결국 중운위는 사실상 반쪽이 되었으며 2004년처럼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중운위에서 우위를 점한 액션 측이 사실상의 직무 수행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2012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민사 10부에서 액션 측의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인용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중선관위가 액션 선본에게 내린 6건의 징계 중 3건이 무효라고 판단했으며 3회 이상 경고 조치를 내려 후보자 자격을 박탈시킨 것도 무효라고 판단했다. 법원은 중선관위가 경고 판정을 내린 '설문조사 유인물'의 건에 대해서는 선거 시행세칙을 잘못 적용한 결과라고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경고 판정이 내려진, 중선관위가 사전선거운동으로 판단한 문자메시지 발송과 공대, 농대, 법대 선관위원 명의의 중선관위 비방글 역시 헌법상 자기 책임의 원리에 반하는 결정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판단했다. 사실상 액션 측의 승리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대학본부는 3월 20일로 예정된 전체 학생대표자회의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2012년 3월 20일, 액션 측이 전체 학생대표자회의를 소집했다. 전학대회는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액션 측 권민영, 김민규 후보의 당선 확정을 의결했다. 이는 전남대 총학생회, 각 단과대학 학생회, 과 학생회 주요 간부들의 의사가 반영된 결정이다. 결국 3개월간 이어지던 선거를 둘러싼 갈등은 이로써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액션 측은 즉시 학생총회를 추진했다. 2012년 3월 27일 액션 측이 추진한 3.27 전체 학생총회가 1,816명의 참석으로 정족수를 채우고 성사되었다. 액션 측이 불과 1년 만에 완벽한 역전승을 거두고 그 기반을 다시금 공고히 하는 순간이었다. 한때 전남대학교 학생사회의 의결권 대부분을 장악했던 전설 세력은 불과 1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게 되었다.
13. 전남대 총학, 다시 4년간의 찬반 선거 (2012~2015)
2012년, NL 세력은 1년 만에 전남대 총학생회를 수복했다. 이전 1년간 총학생회를 운영한 대안 세력 '전설'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전설'은 첫해 선거에서 59.93%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27%를 득표한 우리 학생회에게 압승을 거뒀으나, 이듬해 선거에서는 46.6%를 득표하여 48.1%를 득표한 액션 선본에게 간발의 차로 패했다. 이 시점까지도 전설 선본은 여전히 많은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전설 측은 끝내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고 1년 전과 같은 선거 파행을 통해 학생들을 실망시켰다. 이후 전설 세력은 더 이상 전남대 학생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했다. 대안세력이 사라지자, 전남대 총학생회는 다시 4년간 단일 세력에 의해 운영되었다. 2012년부터 2015년 11월까지 있었던 4차례의 선거는 모두 단선, 찬반 투표로 치러졌다. 김민규, 양군재 (2013) 장민규, 김한성 (2014) 김한성, 정상엽 (2015) 정상엽, 유창민 (2016)이 차례로 총학생회를 이어받았다.
청년들이 얼차려를 받고 있는 사진이다. 얼핏 보면 빨간 모자를 눌러쓴 논산훈련소 조교가 떠오르지만, 군대 사진은 아니다. 이 사진은 무려 2013년도 신입생들이 얼차려를 받고 있는 사진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군대처럼 학생들에게 기합을 주고 서열정리를 확고히 하던 문화가 공고했다. 2013년 4월 전대신문이 취재를 통해 여전히 전남대학교 신입생들이 참여하는 MT에서 기합 등의 얼차려가 행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취재 결과 전남대학교 104개 학과 중 77개 학과에 얼차려가 잔존했다. 해당 기사를 접한 전남대 중앙운영위원회는 "해당 기사의 관점이 편향적"이라고 결론지었다. 그해 총학생회장 김민규는 전대신문 기자를 찾아와 "대체 누구에게 취재했냐. 학교 이미지에 안 좋다. 간단한 PT체조 정도는 문제 될 게 없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개개인에 따라 기합을 달리 느낄 수 있다"는 그의 말에는 "전대신문이 기합을 심각하게 느끼는 학생에게만 취재한 것 아니냐"는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도를 떠나, 타자에게 강제로 PT체조, 복명복창, 뒤로 취침 등을 강요하는 것,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전남대학교 단과대학 중에서는 공과대학의 폭력성이 특히 심각했다. 이들에게 선착순 달리기, 오리걸음은 얼차려 축에도 끼지 못했다. 이들은 MT 때 새벽에 계곡 입수를 시키고 흙탕물을 구르게 했다. 최소 10년간 이어진 인적 네트워크가 존재했기 때문에 12학번 모임에 02학번이 참석했다. 이들은 MT에서 말을 잘 듣는 신입생을 뽑아 '과대'를 맡겼다. 과대들은 선배들로부터 '족보'가 담긴 USB를 건네받았다. 거기에는 기본적인 수치만 바꿔서 엑셀에 입력하면 그대로 결과값이 나오는, 아주 유용한 자료들이 담겨있었다. 공부할 필요가 사라진 과대들은 여러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억압에 순종적인 사람들이 학생회 의결권을 부여받고 체제 유지의 첨병이 되었다. 이들은 선배들의 명령에 따라 M-16을 손에 쥔 계엄군으로 행세했다. 과대가 된 신입생들은 예비역 모임에 참석해야 했다. '장기자랑'을 준비하는 임무가 부여되었고 그 자리에서 선배가 신던 양말을 통과시킨 후 변기 물을 섞은 술을 마시는 등의 일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사실이 소문이 되어 퍼지면 일반 재학생들은 그들이 그러한 수모를 겪기 때문에 직책을 맡고 일부 특혜를 받는 것이 합당한 처우라고 느끼게 되었다. OT와 MT를 비롯한 학과 행사들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강력한 권력기반이었다.
공과대학 일부 학과에는 MT에 참석하지 않을 경우 장학금 선정 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쓰레기 같은 제도도 존재했다. MT 참석자에게 '포인트'를 부여하여 가산점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 제도는 한 재학생이 문제제기를 진행하자 2015년에야 폐지되었다. 이러한 현실에 당당히 맞섰던 사람도 있었다. 전남대 인문대학의 백선경씨는 그해 'MT=나치', 'MT=일본제국주의'라는 내용이 담긴 풍자 그림을 대자보로 제작해 학생회관에 게시했다. 그는 대학문화운동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해당 게시물을 발견한 인문대학 학생회는 해당 대자보를 강제로 철거했다. 항의가 이어지자 학생회 측은 "학우들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실상은 감히, 우리들의 MT를 나치와 일제에 비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학생사회의 억압은 공고했다. 그랬기에 더욱 이것들이 나치와 일제에 비유되는 것이 진심으로 불쾌했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사회의 압제는 전두환과 군부독재가 사회에 이식해두었던 세포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해방된 조선에 남겨진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에서 비롯되었다. DNA 검사의 결과는 명백할 것이다. 군부독재가 형성한 군대문화를 내면화하여, '나이'를 '계급' 삼아 억압을 행사하던 당대의 전남대학교는, '민족전대'일지언정, '민주전대'는 아니었다. 어느 MT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정신 안 차립니까?"를 외쳤을 어리석은 사람을 떠올리며 '백선경'이라는 사람의 용기를 쉽게 잊어버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위 사건은 당대의 전남대학교 학생사회가 전근대적 악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과대학, 농과대학 등은 특히 선후배 간의 부당한 위계관계가 강력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기존 학생회 세력은 이러한 위계질서 형성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2011년 11월 선거 당시 공대, 농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단과대학에서 '전설' 측이 승리했지만 기존 학생회 세력인 '액션' 측이 위계질서가 강하던 공대, 농대에서 200~300표의 큰 표차로 승리함에 따라 선거의 향방이 갈리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얼차려, 기합,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 등으로 유지되는 억압적인 학생사회의 상황은 기존 학생회 세력의 공고한 권력기반이었다.
2015년도 전남대 총학생회장 김한성은 정의당 윤소하 의원에 대한 테러 혐의로 논란이 된 류선민 (2007년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한국대학생진보연합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019년 6월, 김한성을 비롯한 대진연 간부들의 주도로 '김정은 위원장 연구모임'이 발족했다. 이들은 김정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벌어진다면 많은 사람들이 북한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북한 사회와 그 지도자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으로 정확한 이해에 기여하는 연구가 있다면 당연히 권장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이들이 결성한 '김정은 위원장 연구모임'은 '연구'를 빙자하여 김정은을 7가지 관점으로 분석했다. 후대 사랑, 헌신성, 민족애, 음악 정치, 대담함, 세심함, 겸손함이 그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관점이 아닌, 전체주의 국가의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들의 주장에는 '비판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한국대학생진보연합 간부들은 '감옥행'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전 주 영국 북한 대사관 태영호를 체포하자는 결사대를 운영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실정법을 어기지 않은 정치 망명자를 무슨 근거로 체포하자는 것인지, 무식함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표현,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체포, 구속, 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발부된 영장을 제시해야 한다는 영장주의의 원칙을 그 불가결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실로 타인의 기본권을 짓밟아버리자는 파시즘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이들 세력의 핵심이 바로 전남대학교에서 총학생회를 운영하던 세력이었다.
2012년 이래 4년간, 이들은 선거 철이 되면 '청춘바람', '대안' 등의 낭만적인 구호와 일상적인 학내 사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막상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학생회 수권에 성공하면 서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른 활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4년간 이러한 상황들이 반복되자 점차 학생들의 분노가 결집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노는 2016년 11월 총학생회 선거를 기점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14.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철옹성 공방전 (2016)
2016년 9월에 열린 전남대학교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는 순식간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현직 전남대 총학생회장 정상엽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 후보로 입후보했기 때문이다. 현직 총학생회장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을 경우 선거의 중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결국 안건은 부결되었고, 정상엽 총학생회장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며 사과했다. 그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사회대학 박재우 회장이 맡았다.
한편 2016년 9월 27일부터 전남대 대동제가 3일간 진행되었다. 축제에는 대학 지원금 (약 6,100만 원), 학생회비 (약 1,600만 원), 주막 주류공급 예산 등 8,000여 만원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축제는 학생들의 기대와 달리 매우 한산한 분위기 속에서 막을 내렸다. 총학생회 측의 무능한 운영과 기획으로 학생들의 참여가 전무할 정도로 축제가 처참하게 실패한 것이다. 특히 9월 28일, 가수 '백자'가 공연을 진행하자 학생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가수 백자는 '범민련 전사', '주한미군 철거가' 등을 부른 대표적인 민중가요 가수다. 그의 노래를 전남대 총학생회를 주도하고 있는 NL계열 정파가 주최한 집회에서 듣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를 전남대학교 학생 2만여 명이 참여하는 축제에 초청한 일에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분노했다.
당시 대부분의 의자는 공석이었다. 같은 계열에서 활동하는 가수를 무리하게 초청했다는 점을 들어 '제 식구 챙기기'였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들 세력이 역사적 배경 등을 이유로 '8월'을 중요하게 여겨, 매년 8월이면 2주 이상 전국을 누비며 활동하기 때문에, 9월 초에야 부랴부랴 축제 준비가 시작되어 실패가 반복된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결국 9월 축제를 계기로 지난 4년간 축적된 총학생회 주도 세력에 대한 불만이 결집되기 시작했고, 총학생회 선거를 직접 준비하는 세력들이 나타났다.
2016년 10월, 2017년도 총학생회 선거가 공고되었다. NL 세력은 나현조(윤리교육 13), 정강현(화학교육 12) 후보를 내세웠다. 선본명은 '언제나 니곁에'였다. 나현조 후보는 사범대학 학생회장 출신이다. 그러나 지난 4년간 지속된 찬반 투표의 침묵을 깨고, 이에 반발하는 두 선본이 선거에 추가로 출사표를 던졌다. '당신의' 선본의 이명노(지구환경과학 14), 최동혁(윤리교육 13) 후보와 '너에게' 선본의 김설(정치외교 12), 정태준(화학 12) 후보였다. 2016년 11월 5일,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후보자 등록이 완료되었다. 3팀이 선거에 출마한 건 '反운동권' 선본이 파장을 일으켰던 2004년 이래 13년 만이었다. 이로써 전남대 총학생회를 둘러싼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당신의' 선본의 이명노 후보는 자연대학 학생회장 출신으로 기존 학생회 세력의 여러 전횡에 분노하여 독자 출마를 결심하였다. 최동혁 부후보는 "1, 2학년 때는 뚜렷한 주관 없이 기존 학생회 말을 따랐지만 학년이 올라가고 새로운 정보들을 접하면서 한대련의 활동에도 한계를 느꼈다"며 기존 세력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당신의' 선본은 주요 공약으로 한대련 가입 여부를 학우들에게 묻겠다고 밝혔다. 학생들이 원하는 최고의 축제를 추진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장 후보로 출마하지 않겠다고도 선언했다.
이명노 총학생회장 후보는 "2009년 상반기 전학대회에서 한대련 가입이 의결되었지만, 이후 한대련 가입 연장에 대한 논의가 한차례도 진행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2010년 김유리 총학생회장의 한대련 의장 출마가 박수로 통과될 때에도 한대련 가입 연장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결국 자동연장에 관한 세칙이 없기 때문에 2010년도에 다시 논의되었어야 했던 한대련 가입 연장이 명확한 근거 없이 2016년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명노 후보는 대학 입학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학생회 활동을 했다. 과대도 맡고, 학생회 기획국장과 축제 총단장도 맡았다. 이 후보는 "당시 학생회 관계자들이 자연대 부회장 당선 시점까지 도움을 줬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표가 된 후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편향된 정치 성향을 가진 학생회 측이 자신들의 이념을 추구하기 위해 절차적 정당성마저 무시하고, 전남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었다.
이후 기존 학생회 측의 잘못된 주장들을 비판하게 된 이명노 후보는 그들과 크게 싸운 후 아예 노선을 달리하게 됐다. 이 후보는 특히 총학생회 선거를 관리하는 중앙선관위원장을 선출하는 투표에서 벌어진 사건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당시 정상엽 총학생회장이 투표 수를 속이는 사건이 있었다. 대의원들이 직접 표를 새지 못한다는 맹점을 이용해 투표 결과를 조작해 안건을 부결시켰다.
'너에게' 선본의 김설 후보는 전남대학교를 평범하게 다니던 재학생이었으나, 학생사회의 현실을 접하며 학생회의 역할을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내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기존 세력에 대한 비판과 함께 전남대 학생사회의 변화를 원했다. 당시 '너에게' 선본이 지향했던 방향성은 다음과 같다.
<너에게 보내는 나의 이야기>
- 왠지 모를 불안감에 마음 편치 않은 너에게 -
대학에 가기 위해 하고 싶었던 것들을 꾹 눌러왔던 네가, 대학에 와서 무엇인가 있을 줄 알았던 그 막연한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느끼고 있다면 나의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느껴지진 않을 거야.
난 학교가 시키는 대로,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게 나에게 좋다고 생각했었고, 매 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숨 가쁘게 해냈었어. 힘들지만 그래도 뭔가를 했다는 뿌듯함에 기뻐하기도 했었지. 아니 그런데 웬걸. 나는 대학을 다니는 지금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뭘 잘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모르고 있더라. 과연 지금까지 잘 살아온 걸까?
그런 의문들로 며칠 밤을 끙끙 앓았었어. 그런데 말야, 끙끙 앓는다고 뭐가 달라지지 않더라고. 갑자기 너무 분했어. 나는 나처럼 세상에 벽을 치며 출구 없는 고통에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면 좋겠어. 좀 더 용기 있게 나 잠깐 쉬고 싶다고,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나는 수많은 ‘나’에게 말하고 싶어. 우리 함께하자고 말이야.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고 그 친구들과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게, 혹은 진짜 내 문제가 뭔지 알고 대학에서만큼이라도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내가 잠시 대학에 머무는 4년이라는 시간이 헛되지 않게 함께 목소리 내자. 혼자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이루어가보자.
수많은 ‘나’들아, 너에게 말하고 싶어. 모두가 안 된다고 얘기하지만, 네가 손잡아 준다면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열린 만남, 총학의 재구성 너에게 선거본부'
이것이 '너에게' 선본의 김설이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이유였다. 그는 훗날 청년 세대별 노동조합인 광주청년유니온의 위원장을 맡는 등 시민사회 활동에 참여하게 되지만, 이 시점에는 전남대 학부 외에는 별 다른 소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5. 전남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야만 (2016)
2016년 11월 4일,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김설 후보가 학내 곳곳에서 '거지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후보 측이 중선관위에 지급해야 하는 선거 공탁금과 공보물 비용으로 405만 원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중선관위가 제시한 405만 원은 광주 북구의원 선거 기탁금 200만 원, 조선대학교 총학생회 선거 기탁금 150만 원 등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이었다. 전남대 재학생이 학생들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 선거에 출마할 때, 공탁금과 공보물 비용에만 400만 원이 넘는 돈을 마련해야 한다면, 선거비용을 감당할 재력(財力)이 없는 후보의 출마는 자연스럽게 억제된다. 김설 후보의 거지 퍼포먼스는 일반적인 대학생이 감당할 수 없는 공탁금이 제시되는 불합리한 선거제도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와 같은 선거제도는 그동안 전남대 총학생회를 장악해온 NL 세력에 의해 마련됐다.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선거 출마의 진입 장벽을 높여 경선이 진행될 가능성을 봉쇄해왔다.
김설 후보의 퍼포먼스는 전남대 학생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1월 8일 KBS 광주방송 9시 뉴스에 "총학선거 비용 최대 4백만 원, 부작용 우려"라는 제목으로 김설 후보의 퍼포먼스와 주장이 보도되었다. 선거 공탁금과 관련된 KBS의 보도를 접한 중선관위는 5차 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논의했다. 회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2016년 11월 9일, 전남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박재우는 너에게 선본의 김설, 정태준 후보에게 후보자 자격 박탈 징계를 통보했다. 중선관위는 공문을 통해 "KBS 9시 뉴스의 보도 내용은 사실 관계 여부를 떠나, 인터뷰를 한 목적과 의도를 떠나 중선관위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참석자 8명 전원의 찬성으로 후보자 자격 박탈 징계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너에게 선본 측은 규정에 따라 이의제기를 진행했다.
2016년 11월 12일, 중선관위가 '너에게' 선본의 자격 박탈 징계조치에 대한 재심의를 실시했다. 중선관위의 황당한 징계 소식을 접한 학생들의 여론이 싸늘해지자, 선관위원 5명이 징계 철회 의사를 밝힌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재우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재심의 회의 결과 회의 참석자 8명 중 5명이 징계 철회에 찬성했지만 3명이 반대하여 선거 세칙 33조 1항에 의거 과반수 출석에 2/3 이상이 징계조치 철회에 찬성하지 않아 후보자 자격 박탈이 확정되었다. 불합리한 선거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진행하자, 선관위가 아예 후보 자격을 박탈해버린 초유의 사태였다.
이들은 전남대 선거 시행세칙에 명시되어 있는 '금지사항 -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명예훼손'을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에서 실시되는 그 어떤 선거에 출마해도 선관위 명예훼손을 이유로 후보 자격이 박탈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전남대 선거세칙에 이러한 독소조항이 존재하는 것은, 전년도 총학생회 멤버들로 구성되는 선관위를 보호하고 기존 세력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가 아닐 수 없다.
'중선관위에 대한 명예훼손' 조항을 적용하려고 해도 상식적인 수준의 근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김설 후보는 '중선관위'를 언급하지 않았으며, 불합리한 선거제도를 비판했다. "사실 관계 여부를 떠나", "인터뷰를 한 목적과 의도를 떠나" 명예훼손으로 판단했다는 이들의 주장은, 자신들의 결정이 자의적이었음을 실토함과 다르지 않았다.
2012년, 광주지방법원은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무효를 선언한 2011년도 중선관위의 결정이 무효임을 밝히며 "자치적인 조직의 결정이라 하더라도 헌법이 정하는 기본적 사회질서 또는 사회상규나, 스스로 정한 자치규범에 위반하는 행위는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2016년도 중선관위의 결정에는 형법상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인 '특정성', '공연성' 등에 대한 판단이 전무했다. 이들은 회의 참석자의 다수를 장악하면, 얼마든지 자신들과 뜻이 다른 상대 후보자의 출마를 막아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비판을 못하게 하는 건 독재다. 2016년도 전남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주의를 짓밟아버렸다. 이는 1980년 5월,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며 싸웠던 오월 영령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너에게' 선본의 자격 박탈 소식은 삽시간에 학교 전역에 알려졌다. 전남대 구성원들은 깊이 분노했다.
16.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를 보이콧하라! (2016)
2016년 11월 12일, 전남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너에게' 선본의 후보자 자격 박탈을 확정하자 학생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에게' 선본 측은 즉시 입장문을 발표하고 중선관위가 중립을 지키지 않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음을 선언했다. 이어 다른 두 선본 측에 입장 발표를 요구했다. 이명노, 최동혁 후보의 '당신의' 선본 측은 "그 어떤 선관위도 후보자의 자격을 박탈할 권한은 없다"며 "중선관위의 막강한 영향력과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선거세칙이 낳은 치명적인 결과였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기성세력이 내세운 나현조, 정강현 후보의 '언제나 니곁에' 선본 측은 자격 박탈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들은 "지금까지 총학생회 선거에서 나타난 모습들에 유감을 표명한다"라고 밝히고 "학우들이 원하는 것은 학우들을 위한 학생회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입장문은 극히 모호한 문장들의 나열이었으며 "학우들을 위한 학생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며 선거를 이대로 속행해야 한다는 점만, 분명히 했다.
2016년 11월 14일, '너에게' 측의 김설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전남대 학생들의 요구'를 마련하고 재학생들의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후보자 자격 박탈이 알려지자 '너에게' 선본 측의 지지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당신의' 선본을 지지하던 황법량 알바노조 전남대 분회장 등의 학내 활동가들도 '너에게' 측을 중심으로 빠르게 결집했다. 이들은 불과 3일 만에 재학생 912명의 서명을 받았다. 11월 17일, '너에게' 선본 측은 전남대학교의 민주주의가 무너졌음을 분명히 하고 2017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보이콧 운동이 시작되었다.
보이콧 운동은 순식간에 전남대학교를 뒤흔들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에 동참하여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를 보이콧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인 사진으로 변경했다. '너에게' 측의 지지자들과 학내 활동가들은 1인 시위 등을 각지에서 진행했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한 손글씨 릴레이 캠페인도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시점의 보이콧 운동은 하나의 거대한 파도였다. 분노한 수천 명의 재학생들이 '너에게' 측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지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2016년 11월 18일, 전남대학교 1학생회관 앞에서 2017년도 총학생회 선거 '정책 공청회'가 열렸다. 총학생회 선거 정책공약집이 이날 아침에야 배부되는 등 이미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너에게' 측의 김설은 '전남대 민주주의' 영정을 드는 퍼포먼스를 통해 정책 공청회에 항의했다. 중선관위는 시간 상의 이유를 들어 학생 질의응답을 생략한 채 정책 공청회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학생 질의응답을 진행하라는 학생들의 반발로 각 선본의 동의를 받은 후 질의응답을 허용했다. '너에게' 측에 합류한 황법량은 마이크를 잡고 "당신들은 5·18 정신을 짓밟았다. 오월 영령 앞에 부끄러운 줄 알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박재우 중선관위원장은 "KBS 뉴스의 보도 내용은 선거세칙에 대한 비판이 아닌 중선관위에 대한 비난으로 느껴졌다"며 "이는 중선관위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판단된다"라고 원론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언론사의 보도가 자신들에 대한 비난으로 느껴졌다는 황당한 주장이었다. 정책 공청회 파행 이후 보이콧을 주장하는 '너에게' 측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제 학생들의 의사를 투표로써 확인할 일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17. 전남대 총학생회, 차떼기 사건의 파장과 선거 무산 (2016)
2016년 11월 20일, 2017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를 하루 앞두고 페이스북 페이지 '전남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하나의 제보가 전남대학교를 뒤흔들었다. 자신을 전남대 민주동우회 활동가의 자녀라고 밝힌 전남대 재학생이 전남대 졸업생들이 돈을 모아 나현조, 정강현 선본 측에 전달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는 특히 나현조, 정강현 선본이 재학생들에게는 공유된 바 없는 '비공식 후원 포스터'를 졸업생들에게 비밀리에 배포한 후 선거 추대대회를 진행하여 돈을 모았으며, 이들 세력이 매년 이러한 비밀 행사를 통해 선거자금을 모아 왔다고 폭로했다.
그가 제공한 '비공식 포스터'에는 '후원문의 - 김소망'이라는 문구와 연락처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김소망은 2011년도 총학생회 선거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아 학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쳤으며, 2017년도 선거 당시 나현조, 정강현 후보의 '언제나 니곁에' 선본의 선본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다. 해당 폭로는 적폐(積弊) 세력의 진상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폭로자는 '전남대 민주동우회'를 언급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전남대 졸업생'들은 사실상 그동안 전남대 총학생회를 장악해 온 'NL'세력을 의미했다. 이들이 오랫동안 전남대 총학생회를 장악해 온 비결은 '돈'과 '세력'이었다. 선거에는 언제나 돈과 사람이 필요하다. NL 세력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전남대 내부 세력을 통해 선거운동원을 손쉽게 확보했다. 이어 과거에 활동했던 졸업생 선배들로부터 상당히 큰 자금을 지원받았는데, 이것을 내부적으로 '보급투쟁'이라 부른다. 돈과 세력을 통해 총학생회를 장악한 이후에는, 다른 후보가 선거에 출마할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는 장치들을 마련했다. 전남대에 입학해서 이들 세력에 합류하지 않고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해온 재학생이 이들의 벽을 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피선거권을 가진 전남대 재학생이지만, 일반 학생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될 수 없었다. 이번 폭로는 기존 세력이 관행적으로 진행하던 보급투쟁의 진상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는 한나라당의 '차떼기'와 다를 바 없는 비열한 행위였다.
나현조, 정강현 후보 측은 "후원 문의라는 문구는 있었지만 실제로 후원을 받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마치 술을 마시고 운전을 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라는 식의 황당한 변명이었다. 이 소식은 전남대학교 대나무숲을 통해 삽시간에 학교 전역으로 알려졌다. 좋아요가 2만여 개에 이르던 전남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해당 제보는 좋아요 518개를 받았으며 대부분의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에게 전달되었다. 학생들은 깊이 분노했다. 학생들의 분노는 특히 2가지 관점으로 모아졌다.
첫째. 기존 학생회 세력은 400만 원이 넘는 공탁금에 대한 '너에게' 선본의 문제제기를 "중선관위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규정짓고 이들의 후보자 자격을 박탈했다. 그러나 본인들은 비밀리에 선거자금을 제공받고 있었다.
둘째. 기존 학생회 세력은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반미구국의 철옹성'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비밀리에 추대대회를 진행했다. 이들은 선거 때에만 '반미', '자주' 등과 같은 자신들의 이념을 숨기고 학내 공약을 내걸었다.
이들에게는 '양심'이 없었다.
2016년 11월 21일, 2017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가 시작되었다. 분노한 학생들은 '총학생회 선거 보이콧'에 집단적으로 참여했다. 첫날 투표율은 불과 28.43%에 그쳤다. 이는 역대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역사상 최저치였다. 2006년도부터 2016년도까지의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첫날 평균 투표율은 47.36% 였다. 2017년도 선거 때, 투표율이 무려 18.93%나 감소한 셈이다. 당시 유권자는 16,000여 명이었다. 최소 3,000여 명의 재학생들이 '보이콧'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적 의사를 표현했다.
투표는 2016년 11월 23일까지 이틀에 걸쳐 연장되었다. 그러나 투표가 3일 차에 이르렀음에도 개표 요건인 50%를 넘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니곁에' 선본의 나현조 정후보는 투표 독려를 위해 3천 배를 시작했다. 정강현 부후보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본인들에 대한 의혹을 정면으로 해명하지 않고,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전남대 학생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2016년 11월 23일, 2017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는 41.34%라는 역대 최저치의 투표율을 기록하고 사상 처음으로 무산되었다. 투표에 참여한 41.34% 재학생들의 다수는 기성세력에 맞서기 위해 이명노, 최동혁 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선택한 이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016년 11월의 보이콧으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공석으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역사는 학생회의 진정한 역할을 물었다.
2017년 2월 20일, 광주지방법원이 '너에게' 선본 측이 법원에 제출한 '후보자 자격 박탈 효력 금지 가처분 신청'에 대한 인용 판결을 내렸다. 광주지법은 "이들의 인터뷰는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후보자 자격을 박탈할 정도의 위반 사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전년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떼쓰기'가 전남대학교를 비웃음 거리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결국 중선관위를 명예훼손했다며, 후보자의 자격을 박탈한 민주주의 파괴행위는 무효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2016년 11월 총학생회 선거 무산 이후 전남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새롭게 구성되었다. 이들은 전년도 선거 무산에 따른 재선거 실시를 준비했다.
18. 전남대 총학 재선거, 신천지 세력의 난입 (2017)
2017년 3월, 전남대학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중선관위)가 4월 4일 자 총학생회 재선거 실시를 공고했다. 중선관위는 지난해 11월 선거 당시 '자격 박탈' 되었던 '너에게' 선본이 재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칙 상 전년도 선거에 출마한 다른 선본들은 재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지만, 해당 선거를 완주하지 못한 '너에게' 선본은 재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지난해 선거 당시 '선거 보이콧'을 성공시킨 '너에게' 선본 측은 빠르게 선거 준비에 돌입했다. 당시 '너에게' 측이 지향했던 방향성은 아래와 같았다.
"나는 수많은 ‘나’에게 말하고 싶어. 우리 함께하자고 말이야.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 무언가를 해볼 수 있게, 혹은 진짜 내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대학에 머무는 4년이라는 시간이 헛되지 않게 함께 목소리 내자. 혼자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함께 이루어가보자. 모두가 안 된다고 얘기하지만, 네가 손잡아 준다면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 열린 만남, 총학의 재구성 너에게 선거본부 -"
'너에게' 선본은 열린 만남을 추구했다. 전년도 선거 당시에도 각각 사범대학, 자연대학 학생회장 출신의 다른 후보들과 달리 조직적 기반을 완비하지 못한 채 선거에 나섰기 때문에, 새롭게 선거에 함께해 줄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다행히 보이콧 운동의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너에게' 선본과 함께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러나 '너에게' 측이 지향한 열린 만남은 결과적으로 천려의 일실이 되어버렸다.
2017년 3월, '너에게' 선본이 선본명을 '인디'로 변경했다. 이들은 총학생회 재선거에 김설(정치외교 12), 문다영(생물공학 14) 후보를 내보냈다. 당시 선거에는 정재인, 김경한 후보의 '이거레알' 선본과 최도형, 백효인 후보의 '아는총학' 선본이 추가로 출마했다. 전년도에 출마한 두 선본이 재선거에 출마하지 못했음에도 3팀이 선거에 나선 것이다.
'인디' 측은 전년도와 달리 총여학생회 선거에도 후보를 낼 수 있었다. 나희진(식물생명공학 13), 추민정(식물생명공학 13) 후보가 '악녀(樂女)'라는 선본명을 내걸고 총여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다. 총여학생회는 지난 2년간 출마자가 없어 공석이었다. 인디 선본은 경영대학 학생회장 선거에도 김지수(경영 14), 황법량(경제 14) 후보를 출마시켰다. 곧 선거운동이 시작되었고 인디 측은 전년도 보이콧 운동의 영향으로 사실상 당선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였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2017년 3월 28일, 전남대학교 대나무숲에 또 한 건의 충격적인 제보가 올라왔다. '인디' 선본 내부에 신천지 신도들이 있다는 증언이었다. 해당 주장은 큰 논란이 되었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던 학생들은 이것이 '인디' 선본에 대한 공격인지, 실제로 신천지 신도가 선본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를 놓고 거센 논쟁을 벌였다. '인디' 선본 구성원들도 신천지로 지목된 후보자들에게 "신천지 신도라면 진실을 밝혀달라"고 추궁했다. 그러나 신천지로 지목된 총여학생회 나희진, 추민정 후보는 눈물을 보이며 "나는 절대 신천지가 아니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들은 심지어 '이만희 개새끼'를 외치기도 했다.
결국 선본 구성원들은 잠시나마 의심의 마음을 거두었고, 총여학생회 후보들과 선본원들이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의심해서 정말 미안해 잘못했어", "아니야 괜찮아"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나 2017년 3월 30일, 중선관위는 신천지 관련 증인들을 회의에 참석시켰으며, 회의록을 통해 총여학생회 선거에 나선 나희진, 추민정 후보가 신천지 소속이라는 구체적인 증언을 공개했다. 곧이어, '인디' 선본 부후보 문다영과 경영대학 학생회장 후보 김지수 역시 신천지 신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디' 선본 측 문다영, 나희진, 추민정, 김지수 네 사람이 모두 신천지 소속으로 드러난 초유의 사태였다. 이들 4명은 '너에게' 측이 선본을 새롭게 구성할 당시, 장수아(작곡 12)의 소개를 받고 선본에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지난 2016년 11월, '너에게' 선본이 보이콧 운동을 진행하자 알바노조 전남대 분회장 황법량 등 학내 활동가 그룹이 우선적으로 선본에 합류했고, 장수아는 후발주자로 선본에 합류했다. 보이콧 이후 '너에게' 선본으로 많은 전남대 학생들이 모였지만, 역시 선거에 직접 출마하겠다는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지만, 이 상황에서 몇몇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다. 이들은 모두 신천지였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은 '너에게' 측이 '열린 만남'을 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수아는 신천지 구성원들에게 '부장님'으로 불렸다. 그는 신천지 베드로지파에서 부장급에 해당하는 인사였다. 신천지 소속으로 드러난 선본 구성원들이 장수아를 '부장님'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목격되어, 이 같은 사실이 분명해졌다. 장수아는 신천지 의혹이 확산되어 한 선본원의 추궁을 받자, "나도 우리 선본 누구가 신천지라는 소리 들은 적 있지만,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며 도리어 역정을 냈다. 신천지 소문이 일파만파로 확산되어, 선본원 A가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에 "혹시 선본원 중에 정말로 신천지가 있는 건 아니겠죠?"라는 카톡을 올린 적이 있다. 장수아는 단체 채팅방에서 "너잖아 ㅋㅋㅋㅋㅋ"라고 대답했다. 이는 '농담'인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였지만, 관련 의혹에 대한 논의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던 '물타기'였다. 신천지 신도들은 다른 사람의 신뢰를 짓밟는 것에 대해 그 어떤 죄의식도 느끼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당시 총여학생회 선본 카톡 내용 일부를 살펴보자.
<총여학생회 선본 카톡 내용>
2017년 3월 29일 수요일 오후 12시 40분 (선관위 공청회 직후)
[선본원 A] 신천지 질문 나왔어요?
[신천지 추민정] 네
[신천지 추민정] (인디 선본이) 신천지라는 말이 있다고 질문 나왔어요.
[신천지 추민정] 저희는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신천지 나희진] 선관위원장이 각 선본들에게 학우분들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하더라고요.
[선본원 A] 저희는 뭐라고 말했어요?
[신천지 나희진] 요새 선본원 B가 리플릿 나눠주다 보면 신천지 총여 아니냐는 이야기 듣는데, 저희는 신천지 아니라고 했어요.
[신천지 나희진] 이어서 이건 유언비어, 흑색선전이다 각 선본에 증거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사퇴까지 생각하고 강력히 법적 대응하겠다.
[신천지 나희진] 라고 했어요.
[선본원 B] 굿
[신천지 나희진] 쟤네 진짜 짜여진 각본..
[신천지 장수아] 옛날에 민정이가 아는 그 신천지 상담가? 그 사람 연락해볼 수 없을까? 번호있어?
[신천지 장수아] 있으면 번호 줘바
[신천지 추민정] 2년도 더 되서 폰바꾸면서 사라졌어요ㅜㅜㅜ
[신천지 추민정] (스크린 샷) 캡쳐해두었는데, 그것도 사라졌고요.
[신천지 장수아] 나도 타로나 보러 가야겠어요.
<2017년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에 개입한 신천지 신도>
문다영 (전남대학교 생물공학과 14학번) - 2017년도 전남대 부총학생회장 후보
나희진 (전남대학교 식물생명공학과 13학번) - 2017년도 전남대 총여학생회 정후보
추민정 (전남대학교 식물생명공학과 13학번) - 2017년도 전남대 총여학생회 부후보
김지수 (전남대학교 경영학과 14학번) - 2017년도 전남대 경영대학 학생회장 후보
장수아 (전남대학교 작곡과 12학번) - 신천지 베드로지파 부장급 인사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한 신천지 신도 4인의 이름은 이미 여러 언론사에서 공개된 바 있어, 이들 네 사람을 선본에 합류시킨 신천지 간부 1인의 이름과 함께 공개합니다. ‘선거 출마’에는 엄중한 책임감이 뒤따릅니다. 그 무게감을 실감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 어떤 거대 집단도, 역사 서술을 억압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죄의식과 염치가 없다. 신천지 베드로지파 장수아 부장을 통해 신천지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선본에 합류한 점으로 미루어, 이 사건은 신천지 세력이 전남대 총학생회를 장악하려 했음이 명백한 사건이다. 당시 '인디' 선본 실무자들과 선본원들은 이들이 신천지 소속이라는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2017년 3월 30일, '신천지 개입 사태'로 더 이상의 선거 진행이 불가능해진 '인디', '악녀' 선본 및 경영대학 황법량 부후보는 사퇴문을 발표하고 전남대학교 구성원들에게 사과했다. 내부 조사를 통해 신천지 신도들을 모두 파악했지만, 그들은 이미 모두 선본을 빠져나가, 연락이 닿지 않던 상황이었다.
신천지 베드로지파는 전남대학교 뒤편에 '베드로 지성전'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건축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전남대학교 학생이라면, 이들에게 한 번쯤은 전도를 당하게 된다. 신천지는 자신들만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편향된 도덕관을 가지고 있다. 그중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속이듯이 전도하라'는 주장이다. 이들은 전도 대상자와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지고 친분을 형성한 후에야 '성경공부'를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이후 점차 성경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끔 만든다. 이들은 6개월이 넘는 교리 공부가 끝날 때쯤에야, 본인들이 신천지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들 세력의 기만적인 도덕관은 전남대학교 학생사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학생들은 최근에 새롭게 친해진 사람이 신천지 신도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들의 거짓말로 인해, 삶과 시간 그리고 감정의 영역에서 많은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새롭게 알게 된 사람에게 순수한 호의를 보내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김설을 비롯한 신천지와 전혀 무관했던 '인디' 선본 구성원들 역시 이들로 인해 2016년 11월부터 지속되어온 변화의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가장 유력했던 '인디' 선본의 사퇴 이후 다른 두 선본은 선거를 완주했다. 2017년 4월 4일, 2017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재선거는 연장투표를 포함하여 3일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투표율 미달로 무산되었다.
전남대학교 학생사회에 큰 타격을 준 나희진 (식물생명공학 13), 추민정 (식물생명공학 13), 김지수 (경영 14), 문다영 (생물공학 14), 장수아 (작곡 12) 다섯 사람의 이름은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저는 신천지에서 20대 5년을 보낸 친구를 통해 이 모든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저희가 출판한 책 <나는 신천지에서 20대, 5년을 보냈다>를 구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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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전남대 총학생회, 황법량 VS 최도형 (2017)
2017년 4월, 전남대학교 학생사회에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던 '너에게' 선본은 장렬하게 실패했다. 김설 후보는 전남대 학생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단 한 번도 선거를 완주하지 못한 후보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지난 일련의 과정은 전남대학교 적폐 세력의 진상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그 결과 지난 20년간 학생회를 독점해 온 NL 세력은 1년간 패권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나 학내 최대 종교 세력의 선거개입으로 대안세력 역시 학생사회를 떠나야 했다. 이를 가장 기뻐했던 것은 학생회를 오랫동안 장악해온 NL 세력이었다. 이들은 남아있던 운동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남대 총학생회 수복을 준비했다.
2017년, 공석이 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권한은 세칙에 근거하여 중앙운영위원회가 행사했다. 1년 동안 학생총회, 전학대회, 확대운영위원회 회의가 정족수 미달로 연이어 무산되었다. 그러나 기존 세력은 11월 선거에 모든 걸 집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공을 들인 건, '온라인 선거 도입'이었다. 2016년 11월 선거와 2017년 4월 재선거에서 3일에 걸친 연장투표에도 불구하고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산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2017년 10월 10일, 무산된 전학대회의 권한을 위임받은 전남대학교 확대운영위원회가 선거 시행세칙 개정안을 의결하고 주철진 공대회장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역시 기성 세력의 일원이었다. 그는 보이콧 사태 당시 선거가 공정했다고 주장하는 등, 민주주의자로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수준 낮은 인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2013년도 전남대 총학생회를 이야기하며 언급한 대로, 공과대학은 전통적으로 기성세력의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었다. 공과대학에서 특히 강력하게 작동하던 위계질서는 군부독재가 사회 전역에 이식한 것이었다. 주철진 선관위원장은 온라인 투표를 추진했다.
2017년 11월, 2018년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가 공고되었다. 기성세력은 최도형(정치외교 08), 유영재(화학 14) 후보의 '하다' 선본을 내세웠다. 이들은 선거과정에서 기존 세력과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명백히 기존 세력 소속이었다. 유영재는 기성세력이 전통적으로 활동해왔던 풍물패 출신이다. 이들은 단과대학 학생회에도 상당히 많은 후보를 내세웠다. NL 세력에게는 여전히 '돈'과 '세력'을 비롯한 선거 준비가 완비되어 있었다. 신천지 사태로 인하여 대안세력이 사실상 발자취를 감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거구도는 압도적으로 이들에게 유리했다.
이들이 단과대학 선거에 많은 후보를 입후보시킨 데에는 온라인 선거와 관련된 포석이 깔려있었다. 2018년도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 온라인 투표는 기권표 혹은 무효표 선택이 불가능했다. 즉 선거 참여 시 의무적으로 총학, 단과대학 투표에 모두 참여해야 한다. 이에 단과대학 학생회 투표 참여만을 원하는 학생들도 의사와 상관없이 총학 투표에 참여했다. 일각에서는 온라인 투표를 무기로 투표율 채우기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물론 '의무투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정책적으로 의무투표제를 실시하는 국가도 존재한다. 문제는, 1년 뒤인 2018년 11월 선거 때에는 이들이 의도적으로 온라인 선거 실시를 방해했고, 온라인 선거 도입 시 무효표와 기권표 선택이 가능한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한편, 1년 전 '보이콧 사태' 당시 '너에게' 선본에 합류했었던 알바노조 전남대 분회장 황법량은 선거 출마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신천지 사태'로 대안세력이 힘을 상실한 상황이지만 이대로 기성세력이 전남대 총학생회를 다시 장악하는 것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독자출마를 결단했다. 부후보로는 전남대 철학과의 김남수를 설득했다. 불과 1년 전 보이콧 사태 이후에는 많은 지지자들이 결집하기도 했지만 이 시점에는 선거를 함께 뛰어줄 사람을 찾기도 어려웠다. 특히 재선거에 합류한 후 신천지 사태를 경험한 인원들은 큰 마음의 상처를 입고 학생사회를 떠나기까지 했었다.
결국 황법량 (경제 14), 김남수 (철학 16) 후보가 구성한 '대학답게' 선본은 호기롭게 '하다' 선본에 맞섰지만, 선거의 핵심인 '선거운동원'과 '선거자금'에 있어서는 크게 밀리는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특히 단독 출마한 '대학답게' 측과 달리 단과대학에서도 같은 로고와 색깔을 내건 '하다' 측이 더 유리한 구도에서 선거를 리드했다. 설상가상으로 황법량 후보가 신천지 측과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니냐는 루머까지 정치외교학과 등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2017년 11월 20일, 총학선거 진행 자체에 불만을 가졌던 일부 재학생들이 'NL이란 무엇인가?'라는 유인물에 전남대학교 NL 세력의 역사를 담아 배포했다. 이들은 '너에게' 선본 측에 호응하여 보이콧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보이콧이 성공한 이후 '인디' 및 '대학답게' 선본에는 합류하지 않았다. 이들은 엘로우 패러디 저널리즘을 주장하며 "대체 언제까지 해쳐먹을 것인가"라는 식의 문장으로 기존 학생회 측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유인물 배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배포와 동시에 중선관위 측의 저지를 받았다.
결국 전남대학교 후문에서 유인물 배포자들과 기존 세력이 충돌했고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해당 사건은 '한 대학가에 등장한 주체사상파 유인물' 등의 제목으로 주요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들의 행동은 그 의도와 달리 NL에 대해 잘 모르는 학생들의 의사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2010년 곽성용을 시작으로 상대편을 겨냥한 유인물들이 모두 그러했다. 이전 사건들과의 차이점은 이들의 목적이 상대 후보 낙선이 아닌 선거 보이콧이었다는 점이다. 유인물 배포가 중단된 후 2013~2016년도 총학생회장 4명이 유인물 제작자를 고소했지만 물론 법리적으로 형사처벌이 불가능한 사안이기 때문에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2017년 11월 21일, 2018년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가 시작되었다. 3일에 걸쳐 진행된 선거 결과 51.8%의 투표율로 겨우 개표 요건을 채울 수 있었다. 투표율 50%를 넘긴 건, 단과대학 학생회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총학 투표에 참여해야 하는 시스템의 영향이 컸다. 이는 1년 뒤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선거 결과 '하다' 선본의 최도형, 유영재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신천지 사태의 여파 등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선거를 치른 황법량, 김남수 후보가 40%를 득표한 건 나름의 가치를 수호한 일이었다. 이번 선거는 별다른 충돌 없이 종결되었고 NL 세력은 다시금 총학생회를 1년간 운영하게 되었다.
20. 전남대 총학생회, NL 세력의 무능과 부패 (2018)
2018년 1월 1일, 최도형 총학생회장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08 학번으로 이날 서른이 되었다. 나이와 가치를 연결 짓는 언어에는 반대하지만, 지난 10년의 시간을 기존 세력에서 보내온 그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었다. 겨우 50%를 넘긴 투표율 역시 시스템이 만들어낸 것으로, 재학생들의 주도적인 선택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1년간 몇몇 고정사업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활동하지 않았다. 한때 이들과 함께 총학생회 집행부로 활동했던 H씨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다.
"총학생회 집행부를 하고 싶어서 발을 내디뎠지만 점차 실망이 커졌습니다. 총학생회실에는 주로 4명이 상주했습니다. 최도형 총학생회장과 김탁영 공대회장, 김소망씨 그리고 사범대 부회장입니다. 최도형 회장은 "학우들을 깨어나게 해야 돼" "학우들이 일어나게 해야 돼" "학우들을 분노하게 해야 돼"라는 말을 자주 반복했습니다. 그리곤 "너는 왜 네 생각만 하냐"며 여성인 사범대학 부회장을 자주 혼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분위기에 회의감을 느꼈을 겁니다."
김소망은 2010년 선거 당시 NL 세력이 선관위원장으로 내세웠던 인물이다. 과거의 위상과 비교할 때, 이 시점의 전남대 총학생회는 안쓰러울 정도로 초라했다. 새로운 활동가의 유입은 없고 30대를 넘긴 옛 활동가들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전혀 성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한편, 최도형 총학생회장이 그토록 원했던 대로,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은 곧 깊이 분노하게 된다.
2018년 9월 6일, 해리 해리스 신임 주한미대사가 전남대학교를 방문했다. 그는 전남대 총장을 만난 후 5·18 묘역을 참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주한미대사가 전남대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현직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모여있는 광주전남대학생연합이 총장실 점거를 시도했다. 당연히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이 자리에는 최도형 총학생회장도 함께 있었다. 전대총학 페이스북에는 총학에서 주도하는 시위인 것처럼 게시글도 올라왔다. 이후 미대사의 일정으로 학생들과의 간담회가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간담회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정확히 논리를 전달하는 현명한 방식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들은 정세를 고려할 때, 전략적으로 가장 어리석은 방식을 선택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남대 재학생들은 깊이 분노했다. 많은 재학생들이 간담회 진행을 위해 이동하는 주한미대사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소리를 질렀던 행위에 대해 총학생회 측의 해명을 요구했다. 영상에는 최도형 총학생회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소리를 지르는 장면도 있었다. 최도형 총학생회장은 학생들에 의해 선출된 사람으로서 당연히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해명해야 했다.
2018년 9월 9일 최도형 총학생회장이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사람들이 피켓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갔다"고 했다. 이어 "구호가 '개인'으로써 이해 가는 점이 있어서 학우분과 피켓과 구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경호원들의 과한 대응을 보고 사과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며 "생각이 짧았던 점에 대해서 사과한다"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주한미군 철수'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광주전남대학생진보연합 관계자들과 함께 통일선봉대에 참석했던 그가 해당 시위를 주도한 전직 총학생회 간부들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의 '거짓말'에는 '어차피 학생들은 모를 것'이라는 기만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본인의 생각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했다. 그는 오히려 그동안 함께 활동해왔던 이들의 존재를 부정했다. 이런 사람이 한때 나마 전남대 구성원들을 대표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수치스럽다.
최도형이 NL단체에서 해당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전남대 재학생들은 뻔한 거짓말에 분노했다.
결국 최도형 총학생회장은 9월 10일 재차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그의 사과에 대한 재학생들의 비난은 여전했다. 처음부터 시위를 함께 했음이 명백함에도 마치 모르는 사람들의 일을 보러 갔다가 감정적으로 대응했다는 식의 답변 회피였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타국 외교관의 안전이 위협받을 경우 국제문제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에 경찰의 대응도 어느 정도 예상되는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전남대학교의 여론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한편, 전년도 선거에 출마했던 황법량은 총동아리연합회 선거에 출마, 부회장으로 당선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전년도 정책공약집 비용이 과도하게 책정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전년도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주철진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해당 소송은 3만 원을 돌려받는 것으로 종결되었고, 사실상 정책공약집 비용 책정이 잘못되었음이 인정된 내용상의 승소였다. 황법량은 재판 결과 공개와 함께 2016년 선거 당시 기존 세력이 운영하는 여행업체 '아시아 컬처 커뮤니티'가 정책공약집 인쇄를 진행했음을 폭로했다. '아시아 컬처 커뮤니티'는 NL소속 전남대 총학 출신들이 소속된 사업체로 여행업체로 등록되어 있다. 황법량의 폭로는 그동안 NL 세력이 설립한 사업체가 전남대학교의 여러 위탁 사업을 따왔음에 대한 폭로이자 올해 선거를 공정하게 치르라는 경고였다. 해당 업체는 실제로 전남대의 예산으로 여러 기행 사업을 진행해왔다.
한 NL 활동가는 지금도 전남대 근방에 위치한 '아시아 컬처 커뮤니티' 사무실에서 자주 모임을 갖는다고 증언한다. 회사의 대표는 2010년 선거 당시 유인물을 배포하여 논란이 되었던 곽성용 전 부총학생회장이었다. 즉 이미 졸업한 전직 학생회 간부들이 외부업체에서 활동하며 전남대 측의 예산을 따내고, 이들 단체가 심지어는 여행업체로 등록되어 있음에도 전남대 총학선거 시 정책공약집을 인쇄한 것이다. 이 자체가 기존 세력이 '돈'과 '세력'을 형성하여 학생회를 장악해 온 적폐 세력이라는 명백한 증거다. 이 같은 상황에서 2018년 11월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21. 전남대 총학생회, 최도형의 옥새런 (2018)
2018년 9월 19일, 전남대학교 확대운영위원회가 개최되었다. 최도형 총학생회장이 미대사 관련 사건으로 2차례의 사과문을 발표한 지 1주일 뒤의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2019년도 총학생회 선거 실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핵심 쟁점은 '온라인 선거 실시'였다. 불과 1년 전 양 선본의 동의로 첫 온라인 선거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이번 선거에도 온라인 선거가 실시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분위기였다. 최도형 총학생회장 역시 1년 전, 온라인 선거 도입에 찬성했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최도형 측 확운위원들은 '예산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며 온라인 선거를 실시하지 말자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들이 올해 내보낼만한 후보가 없으며, 투표율 미달로 선거를 무산시킨 후 중앙운영위원회를 통해 내년도 총학을 운영할 계획일 것이라, 예상했다. 최도형 총학생회장 역시 온라인 선거 불가를 천명했다. 민주주의의 원칙은 대의제이며, 대표의 정당성은 선거권자들의 표에서 나옴을 생각할 때,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은 오프라인 선거 진행을 결정했다.
그러나 전학대회의 권한을 위임받은 확대운영위원회에서 선거방식을 결정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2018년 10월 29일, 박경담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선관위 회의를 소집했다. 중선관위는 선관위원들과 논의하여 학생처와 협력하여 온라인 선거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학생처는 예산지원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단, 예산집행을 위해 중선관위와 총학생회 측의 협조 요청 공문을 요청했다. 중선관위는 온라인 선거 실시를 준비했고 공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의 직인을 날인했다. 총학생회장이 도장을 찍는 절차만 수행하면 즉시 온라인 선거가 실시되는 시점이었다.
애초에 확운위원들의 반대논리가 '예산'이었으며, '전학대회'에서 선거방식을 결정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최도형 총학생회장은 중앙선관위의 결정을 수용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온라인 투표는 안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1년 전 본인의 입장에도 반대되며, 아무런 명분도 없는 일이었다. 논리적으로 승리할 가망이 없자 최도형 총학생회장은 선관위원들의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다. 전화도 카톡도 받지 않았다. 그는 사실상 잠수를 탔다.
최도형 총학생회장의 무책임함은 전직 총학생회 간부가 "최도형씨가 여러 차례 잠수를 타고 실무적으로 일을 너무 못해서 내부적으로 신뢰를 잃었다"고 증언할 정도다. 심지어 전국국공립대학생연합회 의장직을 맡기도 했던 최도형은 그의 무책임함에 분노한 타 국립대학 총학생회장들에 의해 탄핵당하기도 했다. 2019년 현재 그는 NL조직에서 조차 배제된 상태다. 이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물이 1년간 총학생회장이었다는 자체가 실로 역사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옥새런' 사태가 알려지자, 최도형 총학생회장에 대한 비토가 쏟아졌다. 그는 잠적한 것은 아니고 "학교에 못 갈 상황이 있는 거고 안 좋은 일들이 계속 있다"라고 페이스북에 글을 썼다. 그러나 도장 하나 찍는 일 혹은 입장 발표가 불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윽고 온라인 투표를 결단하지 않으면 시스템 입력 때문에 선거 진행이 어려운 시점에 이르렀다. 결국 전남대학교 학생처가 중앙선관위와 논의하여 온라인 선거 진행을 결정했다. 작년과의 차이는 재학생들이 특히 강력하게 요구했던 '기권표'가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2018년 11월 선거에는 기존 세력이 후보를 내지 못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2년 전에 출마했었던 이명노 후보가 사학과 김광명과 함께 '대의' 선본을 꾸려 단독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대의' 선본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선거를 치러야 했다. 단독 후보였기 때문에 이슈가 턱없이 부족했으며 투표율 50%를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단과대학에 후보가 많지 않아 선거참여 유도 자체가 어려웠다.
온라인 선거에 '기권표'가 생긴 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작년의 경우, 단과대학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총학 후보자 2팀 중 1팀에게 반드시 기표해야 했다. 그래서 단과대학 학생회가 필요했던 재학생들이 사실상 인상 혹은 노출도만으로 투표에 참여했다. 그러나 올해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권표는 투표율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찬성 혹은 반대에 기표한 사람의 숫자를 전체 유권자 수로 나눈 값이 투표율이었다. 많은 재학생들이 기권표를 행사했다. 투표 독려조차 '대의' 선본에 대한 지지로 여겨져 견제받았다.
2018년 11월 22일, 2019년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선거는 32.75%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결국 이번 선거는 개표 요건 50%를 채우지 못해 무산되었다. 이로써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했던 구시대의 잔당들은 뒤안길로 밀려났으나 전남대 총학생회는 재학생들의 분노와 무관심의 망망대해를 표류하게 되었다.
22. 전남대 총학생회, 갈길을 잃다 (2019~2020)
2019년 1월 18일, 황법량 총동아리연합회장이 중앙운영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다. 지난 1998년, 1999년, 2004년, 2011년에 이어 다섯 번째로 비 NL 출신이 총학생회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의 위상을 상실한 총학생회는 이미 방향성을 상실한 상황이었다. 3월 6일, 전남대학교 전체학생대표자회의가 중도 폐회되었다. 전학대회의 권한을 위임받은 확대운영위원회 역시 성사되지 못했다. 결국 황법량 의장은 4월 1일을 기해 사퇴문을 발표했다. 최강록 자연대학 학생회장이 남은 기간을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는 사퇴문에서 이전 학생회 세력을 철저히 비판했다. "학생과에서 제공했다는 노트북 4대가 사라졌습니다. 이전 총학 간부들에게 되돌려 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총학 내부 휴게공간 TV의 경우 모니터와 연결장치가 서로 달랐습니다. 수리기사의 말로는 벽에 설치되어 있는 연결장치와 바닥에 놓여있는 TV는 서로 다른 모델이라고 합니다. 원래 TV를 처분하고 그보다 값싼 모델로 바꿔치기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입니다. 대학 축제의 경우 전체 예산이 8천만 원으로, 축제 기획사에 문의한 결과 결코 전년도와 같은 수준이 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만들어졌다. 1980년 4월, 총학생회의 깃발을 치켜세운 박관현 총학생회장은 학원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5월에는 민족민주화성회와 금남로 횃불집회를 주도하여 5·18 민중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그는 2년간의 도피생활 후 내란주요임무종사죄로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1985년, 재건된 전남대 총학생회는 소외받는 모든 이들의 벗이 된 임들의 이름으로 투쟁했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해왔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특정 정파가 양적우위를 기반으로 전횡을 일삼기 시작했다. 1997년, 어느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까지 발생하자 재학생들의 여론도 악화되었다. 이후의 전남대 총학은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들로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세대교체가 실종되고 더 이상의 인적 유입마저 사라졌다. 재학생들의 분노와 실망감도 극에 달해, 사회운동에 나서는 다른 정파들의 행보마저 제약받고 있다.
2019년 9월, 전남대학교 축제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임창정 등의 가수의 공연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진행과 구성, 기획 자체가 트렌드에 맞게 잘 진행되었다. 학생들이 소통하는 공간인 전남대 에브리타임에는 축제에 대한 칭찬의 글들이 올라왔다. 이어 몇 년 전의 축제를 경험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전 총학에 대한 비토도 쏟아졌다. 총학이 없어도 축제가 잘되니까, 앞으로도 '그 총학' 없이 좋은 축제를 즐기며 행복한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 이것이 학생들을 부끄럽게 만들던 전 총학이 조성한 2019년 현재 전남대학교 재학생들의 압도적인 여론이다.
재학생들은 총학생회를 해체하고 축제준비위원회 등의 자치기구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는 글도 올렸다. 이제는 '사회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총학생회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여기에서 '총동아리연합회'를 구성할 시점의 고민을 되돌아본다. 19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은 지하서클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서슬 퍼런 전두환 군부의 압제가 공기처럼 만연해있던 시절이었다. 그때부터 성장을 시작한 서클 운동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를 기반으로 각 대학별 총학생회가 건설되었다. 공개조직인 대학 총학생회가 구성되자 단과대학 학생회와 과학생회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는 학생운동 전국 조직인 전대협 구성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서클의 활동가들은 곧 학생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에 여러 서클들이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고 남은 서클들은 총동아리연합회를 구성했다.
사회운동을 동아리 중심에서 총학생회 중심으로 옮긴 일은, 결론적으로는 학생운동의 약화를 불러왔다. 1997년 비권 학생회가 전국 대학을 석권한 후 학생운동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학생회가 2만 대학생의 대표성을 갖는다는 특성에 비춰, 이것은 지속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과거의 서클 해체가 남긴 아쉬움을 돌아보게 된다. 이제 학생사회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한다. 현재의 학생회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2019년 11월, 2020년도 총학생회 선거가 공고되었다. 2019년 11월 18일, 그러니까 오늘로부터 3일 전, 전대신문은 올해 총학생회 선거가 역사상 처음으로 후보등록 부재로 무산되었음을 보도했다. 2020년 전남대 총학생회는 1년간 공석이 되었다. 이 씁쓸한 소식으로 학생운동이 전환점을 맞이한 1997년 이래의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사 연재를 마친다.
필자는 광주청년유니온에서 김설씨와 함께 활동해왔고, 황법량씨와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왔다. 2016년 이후의 전남대 총학생회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기도 했다. 기록은 의무이기에, 현재 시점에서 조망할 수 있었던, 기록되어 마땅한 역사를 이렇게 남겨두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