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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Mar 23. 2021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사 (2000~2008)

1. 10년 만에 결실을 이룬 진보정당 창당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그러나 이미 광주광역시에는 다년간 활동해온 진보정당이 조직적 실체를 갖춘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 건설을 주도한 건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세력이었다. 여기서 앞선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정추'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서 연원한 조직이다. 인민노련은 인천, 부천 등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이 1987년 6월 26일 결성한 노동운동 단체다. 당시 인민노련을 주도한 건 노회찬과 황광우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순박했습니다. 약자를 돕고, 강자와 맞서는 것이 정의로운 삶이라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자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광주일고에서, 당신은 경기고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신의 출세와 부귀를 우습게 보았습니다. 인생을 부와 권력에 맡기기엔, 우리의 청춘이 너무 고귀하였고, 젊음을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살기엔 우리의 자존감이 너무 높았습니다. 헌신짝처럼 대학을 버리고 공장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위한 길고 긴 장정에 나섰으나, 당면한 시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박종철군이 공권력에 의해 숨지자 우리는 신속하게 행동에 나섰습니다. ‘살인 고문 강간 정권을 타도하자’는 격문을 뿌렸고, 부천역 앞에서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다시 서울의 명동으로 달려가 군중 시위를 주도하였습니다. 1987년 6월 인천에서 전개된 군중 시위의 대부분은 우리의 손에서 결정되었고, 집행되었습니다. 우리는 대중과 함께하는 실천을 바탕으로, 마침내 ‘인천지역 민주노동자연맹’의 창립을 선포했습니다.

- 나는 노회찬을 보낼 수 없다/황광우 -


 인민노련에서 활동했던 황광우는 광주 출신이었다. 당시 광주 무진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였던 광주기독노동자회가 인민노련 산하조직으로 활동했다. 당시 인민노련은 전국 각지에 600여 명의 조직원을 둔 '전국 조직'이었다.


 인민노련의 판단은 날카로웠다. 노회찬, 황광우 등은 “소수 혁명가가 운영하는 비합법 정당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확인하면서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진보적 대중정당이라는 더 힘든 길을 선택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인민노련 세력은 '진보정당 건설'에 뛰어들었다. 한사노당, 민중당 등의 창당과 실패가 있었다. 1992년 총선 직후 실망한 이재오와 김문수가 민중당을 떠났으나, 기층 활동가들은 진보정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건설했다. 진정추는 같은 해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백태웅, 은수미, 박노해) 일부 인사들이 결성한 사회당추진위원회, 민중회의 등과 연대하여 1992년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민중후보 백기완 선본의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민중회의는 진정추와 마찬가지로 민중당 일부 인사들이 만든 그룹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운동의 ‘다수파’였던 NL계는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해 광주의 '진정추' 활동가들 역시 백기완에 대한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이때 전남대학교에서 백기완 선거운동을 진행한 진정추 활동가들은 광주전남연합(NL) 활동가들에게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5년 뒤,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권영길이 국민승리21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당시 민주노총은 1996년 12월에 있었던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 이후 정치세력화를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고수하고 있던 전국연합은 국민승리21 결성에는 참여했으나 대선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2000년 1월 30일 국민승리21이 진보정치연합, 민주노총 등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초창기의 민주노동당은 사실상 PD계에 의해 대부분의 창당 작업이 이루어졌다.


 민주노동당 강령 제정에는 NL계와 PD계가 함께했다. 그러나 창당을 주도했던 것은 PD계였기 때문에 민주노동당 강령에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민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인류의 오랜 지혜와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다.

- 민주노동당 강령 중에서 -


 국민승리 21 결성에 참여했던 전국연합은 민주노동당 창당에 불참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연합 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에 개별적으로 합류했다. 소위 '광주전남연합'의 핵심인 장원섭과 김선동, 소위 '경기동부연합'으로 불리는 이상규, 이용대, 김미희, 정형주, 소위 '울산연합'으로 불리는 김창현 등이 그들이었다.


 민주노동당 초대 광주시지부장으로는 인민노련 출신의 황광우가 선출되었다. 임기는 2년이었다. '광주시지부'란 지금의 '광주시당'으로 민주노동당 지역당의 초기 명칭이었으며, 동구지구당, 서구지구당 등의 명칭 역시 훗날 동구위원회, 서구위원회 등으로 변경된다.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 2000 지도부>
임기 : 2000년 2월 ~ 2002년 2월
집행부 : 황광우(지부장), 윤정근(사무처장), 조진태, 김순임, 박한서, 이영선, 하정호(부위원장), 안영돈(북구위원장), 정형석(동구위원장), 우한기(북구 부위원장)     


 물론, 이때의 집행부는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의 초기 집행부였을 뿐, 이전에도 진정추 측 진행부는 존재했다. 진정추를 비롯한 민주노동 창당 세력은 창당과 함께 새롭게 집행부를 구성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2000년 4월 총선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전국에서 21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그러나 광주시지부는 총선에 후보를 출마시키지 못했다. 광주시지부는 16대 총선 지원단을 꾸려 울산과 창원 선거를 지원했다.


 당시 울산 선거에서 최초의 '종파 사건'이 있었다. PD계가 울산 동구에 출마시키고자 한 이상범 후보를 NL-울산연합 측이 기습 경선을 통해 제압하고, 최용규 후보를 출마시켰다. 이때의 선거에서 경기동부연합과 울산연합은 정형주(경기 출마 21% 득표), 최용규(울산 출마 41% 득표)를 통해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2000년 5월 12일 민주노동당이 제5차 중앙위원회를 열어 황광우를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에 임명했다. 2001년 9월 전국연합 소속 NL활동가들이 충북 괴산군 보람 수련원에 집결했다. 인천연합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민주노동당의 요청에 따라 일명 '군자산의 약속'을 채택한 후 집단적으로 진보정당에 합류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 역시 급속도로 세력이 확대되었다. 물론 NL계에 소속된 당원이 증가하면서 창당 당시 부각되지 않았던 정파 간 노선의 차이 및 이념적 지향을 둘러싼 논쟁이 거세졌다.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세력은 남한 사회를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로 파악했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외세를 극복하고 민족을 중심으로 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중 다수는 새로운 세상의 설계도로 북한의 주체사상을 수용했으며 혁명의 방식으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 (NLPDR)을 주장했다. 혁명의 주체로는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도시빈민, 민족자본가 등이 제시되었다.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 세력은 남한 사회의 핵심적 문제를 '계급 문제'로 파악했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소련 해체 이후 다양한 세력으로 분화되었으며 일부 세력은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에 뛰어들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2002 지도부>
시기 : 2002년 2월 ~ 2004년 2월
집행부 : 안영돈(위원장), 김승원, 윤난실(부위원장), 김상호(사무처장, 동구위원장), 오병윤(서구위원장, 광주전남연합 의장), 신성진(남구위원장), 박상립(북구위원장), 박종현(광산구위원장)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2002년 지방선거를 기점으로 정치 일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당직선거도 새롭게 치렀다. 안영돈 시당위원장은 PD계 출신으로 현재는 노동당에 속해있는 인물이다. 2002년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보여준 선거로 평가될만하다. 광주시당은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장을 역임했던 민주노동당 광산구위원장 박종현 후보를 광주시장 후보로 내세웠다. 박종현은 '진정추' 출신으로 3만 표에 가까운 득표로 득표율 7.4%를 기록했다. 이때의 시장선거에서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이어 5·18 당시 사형선고를 받았던 정동년 전 남구청장이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음에도 불과하고 확실한 입지를 다진 것이다.


 2002년 제3회 지방선거 당시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시의원 선거에 대거 출마했다. 이는 현재와 조금 다른 정치 상황에서 기인한다. 제3회 지방선거 당시에는 구의원 후보의 정당 공천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즉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선거에 나가는 방법은 시장, 구청장, 시의원, 시의원 비례대표 선거에 출마하는 것뿐이었다.


 이에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시의원 후보들을 대거 출마시켰다. 최영숙(동구), 조남일(서구), 박상립, 김현성(북구), 김승원(광산구) 후보가 시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민주노동당 2002년 지방선거 결과>

광주시장 선거 박종현 후보 - 2만9천표/7.4%

광주시비례 1번 윤난실 후보 - 5만8천표/14.78%/당선
광주시비례 2번 이병훈 후보 - 5만8천표/14.78%

광주시의원 최영숙 후보(동구) 3,573표/16.11%
광주시의원 조남일 후보(서구) 5,319표/15.56%
광주시의원 박상립 후보(북구) 3,208표/12.2%
광주시의원 김현성 후보(북구) 3,249표/15.13%
광주시의원 김승원 후보(광산구) 5,283표/17.26%

광주 광산구의원 홍순희 후보(우산동) 4,016표/55.13%/당선


2. 시의회 진출에 성공한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의 첫 승리는 시의원 비례선거에서 나왔다. 비례 1번으로 출마한 윤난실 후보가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의 14% 득표에 힘입어 광주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비례 득표 15%를 목표로 했고, 실제 선거에서 이와 거의 근접한 수치의 득표를 이루어냈다. 이는 시장 후보의 약진과 시의원 후보들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낸 결과였다. 이로써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첫 시의회 진출에 성공했다. 당시 광주시의회 의석 19석 중 18석을 새천년민주당이 차지했고 1석을 민주노동당이 차지했다. 비록 정당 공천을 받지는 못했지만, 홍순희 광산구의원 역시 당선 직후부터 민주노동당과 함께 활동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분회'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2003년 3월 당대회에서 진보정당의 영원한 조직국장이라 불리는 오재영 국장의 주도로 '분회의 획기적 강화'가 당 쇄신 과제로 떠올랐다. '중앙당-광역지부-지구당-분회'로 이어지는 확고한 당적 기반을 갖추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광주 동구지구당에서는 윤정근, 김상호, 이영선, 류상근, 황성효, 최영숙 등의 당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동구지구당에는 산수분회, 지산분회, 학생분회가 있었다. 주기적인 분회 모임이 이루어졌다. 당시 학생분회에는 나세홍, 김남희 등의 청년당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위에 언급된 황성효, 최영숙 등은 NL계 활동가들이었으며 최영숙은 현재까지 NL-경기동부 측이 장악하고 있는 보건의료노동조합 광주지부에서 초기부터 활동해왔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2004 지도부>
시기 : 2004년 2월 ~ 2006년 2월
집행부 : 장원섭(위원장), 박종현, 황차은, 박상립(부위원장), 윤승현(사무처장)     


 2004년 2월의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당직선거는 철저한 정파선거로 진행되었다. 선거를 3개월 앞둔 2003년 11월 광주전남연합 측 ‘종파사건’이 불거졌다. 민주노동당 광주시지부 소속 모 학생당원이 “당비를 납부하지 않았음에도 당권이 구제되었다”고 고백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 시지부 진상조사단이 조사를 실시한 결과 당권이 구제된 36명 중 14명이 당비 대납을 통해 당권을 구제받았음이 확인되었다. 당시 사건은 당사자의 공개사과 및 자격정지 1년으로 징계가 마무리되었다.


 2004년 2월 치러진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위원장 선거에서 광주전남연합의 장원섭이 301표를 득표하여 263표를 득표한 윤난실을 간발의 차로 제치고 시당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장원섭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대학가에 보급한 김영환이 하영옥 등과 함께 조직한 ‘민족민주혁명당’ 조직원 출신으로 사실상 ‘NL-경기동부-광주전남연합’으로 이어지는 세력의 핵심이었다. '광주전남연합'은 초기에는 인천연합의 지도를 받았고, 이후에는 경기동부연합의 지도를 받았다. 사실상 독자 주체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2000년 당시 광주에서 활동하던 김선동이 순천으로 내려가 전남을 맡음에 따라 장원섭(광주), 김선동(전남)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졌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2004년 4월 총선 당시 광주지역 7개 지역구 중 6개 지역구에 후보를 출마시키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안상연(동구), 오병윤(서구을), 황광우(남구), 김용진(북갑), 안영돈(북을), 국강현(광산)이 총선에 출마했다.


 이때 총선에 출마한 안상연, 황광우, 안영돈은 범PD계 출신이었고, 김용진, 국강현, 오병윤은 경기동부연합의 지도를 받고 있던 광주전남연합 출신이었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마침내 의회 진출에 성공,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켰다. 광주 지역에 출마한 후보 중 광산구 국강현 후보는 8% 득표를 통해 성장하는 당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NL세력의 당 장악이 가속화되었다. 광주에서도 여러 종파사건이 이어졌다. 특히 2006년도 당직선거 당시에는 지역위원회 부위원장 선거와 여성위원장 선거에 출마한 PD계 후보들을 NL계가 '반대표' 몰표를 찍어 낙선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특정 세력이 당파적 이익을 위해 구성원 숫자를 앞세워 패권적인 행동을 감행한 것으로 명백한 종파사건이었다.


 2006년이 되자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NL세력(일부 인천연합 및 다수 경기동부연합)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2006 지도부>
시기 : 2006년 2월 ~ 2008년 2월
집행부 : 오병윤(위원장), 강은미, 조양진, 김창숙(부위원장)


 2006년 제4회 지방선거에 나선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8명의 구의원을 당선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이전 선거에서 비례대표 시의원이 되었던 윤난실은 서구 지역에서 32.76%를 득표했으나 시의회 입성에 실패했다. 다른 시의원 후보로는 북구의 이봉훈 후보(NL), 광산구의 윤영대, 박종현(PD-진정추) 후보가 출마했다. 이는 2002년 지방선거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시의원 후보 5명보다 줄어든 수치로, ‘구의원 정당 공천’의 영향이 컸다. 시의회 비례 1번으로 선거에 나선 황차은 전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부위원장은 민주노동당이 비례선거에서 10% 넘는 득표를 했음에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분열로 인해 제4회 광주시의회 진출에 실패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는 4명의 구청장 후보도 존재했다. 강기수(서구), 오창규(북구), 이승남(광산구), 김창훈(남구) 후보가 구청장 선거에 나섰으며 강기수, 오창규, 이승남 후보는 모두 10% 이상 득표하는 데 성공했다. 강기수는 전국공무원노조 광주지역본부장 출신으로 경기동부연합 계열이었고(전공노 광주본부, 보건의료노조 광주지부는 2021년 현재까지 경기동부연합 산하에 있다), 오창규는 인천연합의 ‘대부’ 오종렬 의장의 아들로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후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광주전남연합은 인천연합과 경기동부연합으로 분화되어 있었으나 같은 당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갈등관계에 놓여있지는 않았다. 김창훈은 시민의 소리 상임이사 및 참여자치21 지도위원으로 시민사회 운동 출신이었다.


 제4회 지방선거에서 광주시장 선거에 나선 오병윤 후보는 10% 득표에 성공했다. 그러나 2006년 광주시장 선거는 오병윤에게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선거 직후 대규모 회계 부정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당기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했고, 오병윤 선본이 선거자금으로 오병윤 아내에게 옷을 사주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당시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당기위원 7명 중 5명이 오병윤과 같은 광주전남연합 소속으로 필사적으로 조사를 방해했음을 생각할 때, 당시의 회계 부정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선거 출마자들에게 선거비용 지원금을 선지급하고 후에 돌려받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오병윤은 투표율 10%를 넘겨 선거비용의 절반을 돌려받았음에도 당으로부터 미리 지원받은 비용을 환급하지 않았다. 결국 민주노동당 중앙당기위원회는 오병윤에게 당원권 1년 정지라는 상당히 무거운 징계를 내렸다. 진보정당에서 여러 차례 출마한 전력이 있는 후보자에게 당원권 1년 정지 징계를 내린 일은 당시로서는 다른 사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당시 광주전남연합 활동가들은 "별 것도 아닌 일이 상대 정파의 공격에 의해 문제가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오병윤은 이 일로 한동안 당을 떠났고, 2007년 고려사이버대학교를 졸업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노동당은 광주에서 8명의 구의원 당선자를 배출했다. 특히 광산구에서는 가, 나, 다, 라 지역구에 출마한 국강현, 김도훈, 최경미, 홍순희가 모두 당선되었고, 북구에서는 이승희, 김상훈이, 서구에서는 조남일, 강은미가 당선되었다.


 구의원 비례 후보로는 이영선(동구), 문미라(서구), 조경숙(남구), 최영순(북구, 전남대 총여학생회장-NL), 박윤미(광산구-PD)가 출마했다. 당시 당선된 구의원의 정파 분포는 다음과 같다.


2006년 지방선거 당선자(구의원 8명)

범NL : 조남일, 강은미, 국강현, 최경미, 김도훈, 홍순희
범PD : 이승희, 김상훈


 노동운동 출신인 이승희 의원과 평등사회실천연대 출신인 김상훈 의원을 제외하고는 당선된 구의원 전원이 사실상 범NL계 출신이었다. 그러나 2008년에 진행된 분당 과정에서 북구의 이승희, 김상훈 의원이 탈당했다. 이승희 의원은 2010년 지방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로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여 7,577표/37.71%를 득표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김상훈 의원은 민주당에 합류하여 3선 구의원이 되었다. 이후 서구의 류정수 의원이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나 조남일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여 2010년 6명의 기초의원이 민주노동당의 이름으로 임기를 마쳤다. 조남일 의원은 기아자동차 노동조합 출신이며, 홍순희 의원은 금호타이어 노동조합 출신이다.


3. 극단으로 치닫는 '정파 갈등'


 그러나 2007년 당내 정파 갈등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달았다. 창당 초기 정파의 차이를 떠나 대승적으로 함께하던 활동가들은 이미 갈라선 지 오래였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의 모든 의사결정은 이미 경기동부계열 일부 활동가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2008 지도부>
시기 : 2008년 2월 ~ 2010년 2월
집행부 : 강기수(위원장), 윤민호(사무처장), 안병강(동구위원장), 이이현(남구위원장), 김현성(북구위원장), 조삼수(광산구위원장)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2007년 대통령 선거 직후 본격화되었다. 권영길 후보가 NL계의 도움에 힘입어 심상정 후보에게 신승을 거두고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그러나 선거 과정과 결과는 처참했다. 선거 직후인 12월 29일 당 지도부가 총사퇴했다. 이후 꾸려진 심상정 비대위는 당원 명부와 당 중요 정보를 북한에 넘긴 일심회 사건 관련 당원들에 대한 제명안을 포함한 혁신안을 상정했다.


 2008년 당시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을 사실상 지도하고 있던 장원섭은 민족민주혁명당 조직원이었다.


 1989년 7월 북한의 주체사상을 대학가에 배포한 후 '반제 청년동맹'을 이끌고 있던 김영환에게 북한 간첩 윤택림이 접근했다. 김영환은 윤택림의 권유로 '관악산 1호'로 조선노동당 당원이 된 후 1991년 5월 19일 1년 후배 조유식과 함께 입북하여 김일성을 만났다. 이후 남으로 돌아온 김영환은 1992년 3월 16일 하영옥 등과 함께 민족민주혁명당을 결성했다. '민혁당'은 북한의 승인을 받아 결정한 당명이었다.


 민혁당은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 영남위원회 등을 두었고, 이들을 통해 전국연합의 의사결정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1991년 대한민국에서 각 부문별 사회운동을 전개하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조직이나, 1990년대 말에는 이미 'NL 세력의 단일대오'로 축소되어 있었다.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는 전국연합 경기동부위원회로써 활동했으며, 장원섭을 통해 광주전남연합을 지도했다.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은 창당 초기에는 평등파 및 일부 NL계에 의해 움직였지만, 이후에는 다수 경기동부연합 및 소수 인천연합에 의해 움직였다고 정리될 수 있다. 초기 평등파가 다수 포진해있던 시절보다 후기 경기동부연합이 다수 포진해있던 시기의 '정파 갈등'이 심각했는데, 이는 경기동부연합의 활동 방식에서 기인했다. 경기동부연합은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음을 넘어, 제압했다. 모든 당직을 장악하고자 했으며 심지어는 결격사유 없는 다른 정파 활동가들을 의도적으로 당직선거에서 낙선시켰다. 당의 의사결정 역시 회의를 통해서 진행하지 않고, 미리 결정해온 후 회의를 통해 관철시켰다.


 이는 명백한 '패권적 당운영'이다. 예시를 들어 생각해보자. A라는 사람이 B라는 단체에 들어갔다. B의 의사결정은 20명의 운영위원들이 다수결로 정한다. 그런데 이중 11명은 본인들 만의 단체 C를 가지고 있다. 운영위원이 된 A가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이 11명이 A가 이야기 한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든다. 이들 11명은 미리 정해온 대로 회의를 진행하고, 미리 결정해온 사항을 투표로 결정한다. 심지어는 운영위원 선거에 출마한 A를 찬반투표에서 반대표 11표를 주어 낙선시킨다. B에는 회원 500명이 있고 이중 249명은 A 쪽 사람들을 지지하지만 워낙 끈끈하게 조직되어 있는 C에 의해 이들은 49%의 의결권을 가졌음에도 0으로 취급된다.


 여기서 A는 평등파, B는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C는 경기동부연합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A를 비롯한 9명이 단체를 나가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다. 1990년대부터 활동해온 평등파 일부 활동가들은 1992년 광주에서 백기완의 선거운동을 진행하며 진보정당 운동을 전개할 당시 NL 측 활동가들에게 린치를 당했던 경험이 있었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을 고수하고 있었던 NL 활동가들이 "감히 김대중 선생님 말고 다른 사람을 지지해!"라며 몽둥이를 들었다. 그러나 평등파는 이와 같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손을 내밀었다. 당직도 보장해주었고 자신들이 운영하던 학원에 강사로 채용해주기도 했다. 쇠파이프로 자신을 때렸던 사람과 같은 당에서 재회했지만 문제 삼지 않고 잘 지내기 위해 노력했다.


4.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결국 2008년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이 부결된 직후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소속 평등파 당원들의 탈당이 이어졌다. 2008년 1월 22일 민주노동당 광주시당 당원 30명이 성명서를 내고 집단 탈당했다. 이때 탈당한 당원들은 안영돈 전 시당위원장과 박한서 전 시당 부위원장 등으로 훗날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지 않고 노동당에 남는 이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자주파(NL)의 무비판적인 북한 정권 추종 행위는 국민이 민노당의 정체성을 의심케 했다”며 “선거 때마다 불거진 당비 대납과 부정투표 의혹, 조직적 흑색선전과 회계부정사건은 당내 민주주의도 실현하지 못하는 타락한 정치집단의 이미지를 심어줬다”며 NL 세력을 강력히 비판했다. 2월 18일에는 당원 70명이 집단 탈당했으며 2월 26일에는 당원 200명이 집단 탈당했다.


 3차 탈당에 나선 이들은 "심상정 비대위를 통한 변화와 혁신마저 고질적인 당내 패권주의로 좌절되었다"며 "더 겸허한 자세로 신발끈을 거쳐 매겠다"며 신당 창당에 합류할 것임을 선언했다. 이때의 기자회견에는 황광우, 안영돈, 박종현(전 시당위원장), 윤난실, 조진태, 김순임, 박한서, 이영선, 하정호(전 시당 부위원장), 조양진, 김창숙(현 시당 부위원장), 윤정근(전 사무처장), 김상호(전 동구지역위원장), 신성진(전 남구지역위원장), 백형기(현 중앙위원) 등이 이름을 올렸다.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이들 중 다수는 빠르게 진보신당 창당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광주의 진보신당 창당 준비위원으로는 김상호(들불열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안영돈(전 현대자동차 서비스노조위원장, 전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위원장), 최송춘(전 사회보험노조 정치위원장), 윤난실(전 시의원), 박종현(전 민주노총 광주전남본부장), 신성진(광주전남 민언련 공동대표), 백형기(들불열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윤승현(엔학로레교회 목사), 곽원식(전 캐리어노조위원장), 나세홍(대학생), 김미경(일과복지연대 정책국장), 임성주(전 전국농협노조위원장), 강병택(자영업)이 이름을 올렸다.


 2008년 3월 17일 진보신당이 창당됨에 따라 민주노동당이 둘로 나뉘었다.


<광주 진보정당사>


1. 민주노동당 광주시당사

2. 진보정당의 분열과 통합

3. 통합진보당 광주시당사

4. 진보정의당 광주시당사

5. 광주 진보정당의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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