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동갑 남매가 사는 법
누나를 끔찍이 생각하던 동생이었다. 내가 없는 외식 자리에서 누나에게 줘야 한다며 음식을 챙기기도 하고 천 원, 이천 원 모아 내 생일에 용돈을 주기도 했다.(무려 3만 원) 그런 동생이 퍽 귀여울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좀처럼 친해지기 어려웠다. 동생은 나를 따르면서도 어려워했고 나는 동생이랑 노는 게 재미가 없었으니까. 그때의 난 고약한 사춘기를 보내며 자주 우울했고 좀처럼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디 가서나 명랑한 아이였는데 유독 집에서만 그랬다.
유치원생들도 선행학습을 하는 대한민국. 평일의 동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모습을 감췄다. 수업이 끝나면 다들 학원으로 향했기 때문에 동생은 늘 심심해했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학원에 가야 할 판이었다. 서너 살 터울이었다면 싸우긴 엄청 싸웠겠지만 심심한 시간들을 같이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온 가족이 나서도 넘치는 에너지의 동생을 케어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무심했고, 부모님은 전만큼 체력이 따라주지 못했다. 엄마는 칼싸움이며 권투며 사내아이들이 으레 하는 각종 놀이를 마스터했지만 동생은 지칠 줄 몰랐다. 아직도 기억나는 엄마의 애원.
"이번 판만 하고 제발 좀 쉬자."
"아냐 엄마. 한 번만 더!"
12살이나 어린 남동생이 보수적이라고 하면 다들 웃는다. 동생은 한여름에도 반바지를 입지 않고 슬리퍼에도 양말을 신고 다녔다. 아무거나 주워 입고 맨발로 동네를 활보하던 나와는 참으로 대조되는 모습이다. 내가 짧은 치마나 반바지를 입고 외출을 할 때면 동생은 엄마에게 누나 치마가 너무 짧은 것 아니냐며 걱정을 하기도 했다는데 술 마시고 새벽에 귀가하는 내 모습은 오죽했을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동생에게 그런 심려를 끼치는 누나였다니 갑자기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게다가 동생은 무척이나 깔끔 떠는 편이라 내가 학교 간 사이 내 방을 청소해 놓기도 했다. 난 내 동생이 그런(?) 아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고. 가끔 남매여도 너무나 달라 신기하다.
물론 역시 내 동생이군 싶은 점도 많다. 남대문 만한 토끼 앞니와 좁은 구강구조로 나란히 교정기 신세를 졌고, 누가 봐도 내 동생이라고 할 정도로 닮았다(고 한다.) 겁이 많아 귀신과 도둑을 무서워했고 외향적이어서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며 자기주장이 강하다. 동생이 어떤 생각들을 하면서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내면의 결도 닮지 않았을까 싶다. (내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바탕이 되는 심성이 착하고 측은지심이 강하다. 또 언젠가 신방과나 역사학과에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나 대학생이 되자마자 영국에 갈 거라고 말하는 모습들을 볼 때는 속으로 혼자 웃기도 했다. 지 누나랑 똑같네.
신기하리만치 내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동생을 보면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해줘야 할까 고민스러운 마음이 든다. 엄마 아빠는 모르지만 나는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 저와 같은 상황을 지나왔고 비슷한 고민을 했었으니까. 그래서 가끔은 더 화가 나거나 걱정이 될 때도 있지만 더 잘 이해해줄 수도 있다.
동생과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한 건 3-4년 정도 된 것 같다.(동생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스스로 마음을 열게 된 지점이 그즈음이라.) 내가 동생에게 내민 화해의 손길에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동생이 무엇을 하든 간에 응원해주고 지지해주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에게 '그냥 하게 냅둬'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중학교 축구부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도, 밤새 게임을 할 때도, 친구들과 놀다 늦게 들어올 때도, 심지어 편식이 심하다며 엄마가 나에게 하소연을 했을 때도. 동생에게는 그냥 그 순간을 눈감아 주는 누군가가 필요할 테고 그게 내가 되고 싶었다.
어차피 부모 맘대로 할 수 없는 게 자식 아니던가. 적어도 나와 동생은 바닷가에 데려다가 영법을 가르치거나 구명조끼를 입혀 내보내는 것보단 어딘가에서 지켜봐 준다는 믿음이 중요한 아이들이다. 개헤엄을 치더라도 내 편한 대로 헤엄치고 싶고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 성정을 타고났다. 비록 나는 부모님과 투쟁했고 굽히고 포기한 것도 많았지만 먼저 그 길을 갔던 인생의 선배로서 동생에게 좋은 디딤목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아마 동생도 이런 내 마음을 이해했으리라. 그렇기에 스스로 올바른 길을 찾고 쉼 없는 동력으로 그 길을 내딛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게 나는 진짜 누나가 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