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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양이 Aug 03. 2019

12살이 애를 어떻게 키워요

띠동갑 남매가 사는 법



남매 대전

띠동갑 동생이 있다고 얘기하면 10명 중 8명은 (어디서 교육이라도 받은 건지) '네가 다 키웠겠네'라는 말을 한다. 다른 집 누나들은 그리 할지도 모르겠으나 내 경우는 아니었으므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민망한 기분이 든다. 오히려 누나의 도리를 반도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 기억나는 가장 첫 장면은 엄마가 몸조리를 하던 외갓집 풍경이다. 엄마는 한 달 내내 미역국을 먹었고 나도 덩달아 미역국을 먹어야 했다. 엄마가 일어나 무슨 행동이라도 할라 치면 걱정이 되어 눈을 뗄 수 없었는데 마치 동생과 엄마가 자칫 잘못하면 깨질 것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동생을 처음 내 품에 안던 순간, 가족들의 얼굴엔 걱정이 떠올랐다. 나 같은 어린애가 동생을 제대로 안을 수 있을까,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나 또한 머릿속으로 동생을 안아 드는 상상을 많이 했는데 그때마다 실수로 동생을 떨어뜨리는 생각이 따라다니는 바람에 무서웠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고 소중한 순간이고 기억이다.


하지만 좋았던 기억은 그게 전부다. 내가 기억하는 동생의 어린 시절은 내게 고통 그 자체였다. 잔병치레가 잦았던 동생은 새벽마다 응급실에 실려가기 일쑤였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집에 나 혼자 뿐인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늦게 낳은 자식이라 건강하게 낳아주질 못했다며 자책했고 나도 말은 안 했지만 정말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난 크면서 병원에 입원해 본 적도 없고 남들 다 걸리는 수두며 홍역이며 당시 유행하던 아폴로 눈병 같은 것들도 걸려온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하게 자랐으니까.


하지만 고통의 기억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동생은 불통 장군의 화신처럼 고집과 자기주장이 센 놈이었다. 나도 한 고집했는데 얘는 한술 더 떠 성격도 보통이 아니어서 집안은 늘 눈물과 화로 가득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쪼꼬만 녀석이 밥을 먹다 말고 밥상을 뒤집어 엎는다던가(정말이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리모컨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당시 나도 질풍노도의 시기로 치닫던 때라 그런 동생의 모습을 도무지 참아줄 수가 없었고 그래서 동생과 자주 싸웠다.


동생과 자주 싸운다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하질 못했는데, 대체 그 어린 애랑 어떻게 싸움을 한다는 거야?라는 반응이다. 하지만 우린 정말 자주 싸웠다. 동생은 말도 제대로 다 배우지 못했으면서 꼬박꼬박 말대꾸를 했고 안되면 그냥 울어버렸다. '내 마음은 내 건데 왜 내 맘대로 못하게 해?' 라던가 '나도 내 생각이 있어!' 같은 도무지 그 나이 때 아이가 하지 않을 법한 말들을 내뱉어 난처하게 했다.(딱히 반박할 수가 없어 더 화가 났다.) 엄마는 그런 동생으로 인해 상처를 많이 받았고 엄마가 눈물을 보이던 날이면 동생을 방에 데려가 등짝이며 궁둥이를 후려갈기거나 매를 들었다. 마음이 약한 엄마 아빠를 대신해 훈육(이라 쓰고 실제로는 체벌이었지만)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는 급기야 동생이 나를 보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요약하자면, 나와 동생은 건강하지 못한 관계였던 것이다.  



가족이 '되는' 일

언젠가 동생이 이 글을 읽을지도 몰라서 쓰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 내용이라서. 하지만 지금 우리는 꽤 괜찮은 관계이므로 과거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동생을 내 동생으로, 그러니까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면 당연히 가족이 되는 건데도 그랬다. 10년 넘게 혼자 살다가 갑자기 생긴 동생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공감대나 생활환경이 달라서일 수도 있고, 성별이 달라서일 수도 있겠다. 게다가 그때의 난 가족보단 학교생활에 심취해 있었다. 중학교 때는 친구, 고등학교 때는 공부. 집에서는 손님처럼 잠만 잤으니 동생이 유치원에 들어갈 쯤에는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다. 이런 패턴은 대학생 이후로 더 심해졌는데 대학생 때 나는 밖으로 많이 나돌았고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되어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집에 가서 동생을 볼 때마다 동생은 변해있었고 나는 그게 낯설었다. 동생의 경우는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동생의 기억 속 누나란 언제나 무섭고 짜증스러운 존재로, 관계 회복의 기회가 없으니 그 이상 나아질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철이 들고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자리를 잡고 나서야 나는 가족들을 돌아볼 여유가 되었는데 그땐 이미 동생이 사춘기가 시작되어 회복은 커녕 누나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25년간 내가 동생에게 했던, 혹은 하지 못했던 일, 그리고 그 시간들을 회복할 만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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