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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양이 Aug 01. 2019

11살 때까진 외동딸이었는데

띠동갑 남매가 사는 법



엄마의 고백

집에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멀지 않은 거리였는데도 엄마가 데리러 오던 날에는 기분이 한 껏 고조된 채로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엄마는 가끔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학교에 등장했는데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정문, 후문, 쪽문 중에 내가 어디로 나올지 늘 고민했다고 한다.(나는 공원과 이어져 있는 쪽문을 애용했다.) 때론 길이 엇갈려 집에 먼저 도착한 내가 영문도 모른 채 엄마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내게 준 편지를 보면 나는 눈 오는 날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아이였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엔 엄마가 데리러 올 테니까.  


그날도 엄마가 말없이 데리러 온 날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두 가지 코스 중에 나는 조금 복잡하긴 해도 문방구를 지나는 최단 루트를 좋아했다. 특히 엄마와 함께 귀가하는 날에는 꼭 문방구를 지나갔는데 아마 뭐라도 하나 건지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엄마를 대동한 나는 한껏 어깨를 펴고 평소에는 사먹지 못했던 500원짜리 불량식품을 고르거나, 종이옷 입히기 같은 것들을 티 나게 아쉬운 듯 만지작거렸다. 마음이 약한 엄마는 그런 내 모습을 지나치지 못했으니까.


당시 나는 참으로 수다스러운 아이였고 그날도 엄마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재잘대며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전철역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 다다랐을 즈음 엄마는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이 알쏭달쏭해서 무슨 말을 할지 선뜻 예상할 수가 없었는데, 머뭇거리는 표정이 겁먹은 것 같기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이 말을 하려고 오늘 데리러 왔구나 싶어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입을 열기까지 그 짧은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초등학교 4학년이 늦게 끝나 봤자 밝을 시간일 텐데 내 기억 속 그 날의 주변은 고요했고 왠지 어둑한 느낌마저 들었다.


"너 동생 생긴다."


수줍은 엄마의 고백이었다.(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때 엄마는 임신한 사실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벌써 17년 전 일이기 때문에 나도 어떤 반응을 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동생을 낳아도 괜찮냐는 엄마의 물음에 나는 괜찮다는 대답을 건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당시의 나는 11년간 외동딸로 자라며 온갖 혜택은 다 받아온 이기적 일대로 이기적인 초등학생이었다. 내가 갖는 모든 것들은 다 새 것이었고 맛있는 음식이나 물건들을 형제들과 나누지 않아도 되었으며 TV 채널로 싸울 일도 없었다. 그렇기에 엄마 아빠가 둘이 하하 호호하는 것에도, 친척들이 놀러 와 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도 난 곧잘 화가 나곤 했다. 엄마 사랑도 내 거, 아빠 사랑도 내 거, 내 물건도 내 거였으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진 잠도 엄마 아빠 사이에서만 잤다.


유난히 질투와 애착이 강한 내 모습이 피곤했을 텐데도 엄마 아빠는 나를 곧잘 놀려댔다. 보란 듯 서로 껴안고 있거나 놀러 온 친구들을 과하게 칭찬하거나. 그런 날이면 난 하루 종일 죽상을 하고 짜증을 부렸다.(지금 생각해도 참 얄궂기 그지없다.) 그런 내게 동생이 생긴다니 부모님이 걱정할 만도. 한 번도 동생을 낳아달라 한 적도 없었을뿐더러 친척동생들도 예뻐한 적이 없던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엄마 아빠의 걱정과는 다르게 동생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꽤 기뻤다. 약아빠진 그때의 생각으론,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많이 누렸고 동생이라기 보단 '아기'에 가까운 그 존재가 나와 싸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 테지. 무엇보다 제법 머리가 컸을 때라 외동딸은 귀하게 자라 버릇이 없다는 편견(혹은 진실)이 슬슬 거슬릴 때였기도 했다.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당시 내게 늦은 동생이 생기는 건 썩 괜찮은 일이었다.



그렇게 난 나만의 방식으로 누나가 될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내게 어떤 동생이 생길지 상상도 못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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