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동갑 남매가 사는 법
동생이 태어나던 날 아빠와 이모와 함께 산부인과로 향했다. 엄마가 나를 낳을 때 제왕절개를 했기 때문에 두 번째 출산도 당연히 수술을 해야 했다. 수술일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TV에서 보던 일(갑작스럽게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한다던가)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전신마취 수술은 큰 걱정거리였다. 지금이야 결혼 시기가 늦어져 30대 후반- 40대 산모도 많지만 당시 40살 산모는 드문 케이스였으니까. 특히 35세 이상 산모(노산)의 기형아 검사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일이다. 기형아 결과가 나오던 날 온 가족이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난다.
엄마가 분만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엄마가 무사히 출산을 마치는 것 그리고 나에게 남동생이 생길지 여동생이 생길지 추측하는 것. 주위의 끊임없는 물음에도 엄마는 한 번도 동생의 성별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당시에는 아이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는 병원이 많았다. 엄마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다고 한다.(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았다는 생각도 종종 들지만 그건 엄마만 알겠지.) 아마 딸이었을 때의 (주위의) 실망감을 미리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수술실 앞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던 세 사람은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이 나는 비현실적이다 못해 마치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고 내가 지금을 기억할 수 있는 나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곧 수술실에서 나온 간호사는 해사한 얼굴로 우리에게 고했다.
"왕자님이에요."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만 느껴졌는지, 동생이 태어나던 순간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쨌거나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10개월 동안 품어온 궁금의 응어리가 단박에 해소된 듯한 느낌이었다.
'아, 나에게 남동생이 생겼구나.'
그렇게 매서운 새해의 바람이 불어오던 1월, 엄마는 40살이 되자마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나에게는 같은 띠를 가진 동생이 생겼다.
동생이 태어나던 순간, 정확히 말해서는 남동생이 태어나던 순간 아빠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은근히 여동생보다는 남동생을 기대했던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사실 늦둥이 동생이 있다고 하면 다들 아들이죠?라고 물어오곤 한다. 지금이야 '딸바보'라는 말이 흔할 정도로 딸에 대한 선호가 늘어났지만, 그때만 해도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으니까. 그래서 내 주위에는 누나가 둘이나 셋 있는 막내아들이 꽤 있었고 내 동생도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치부되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엄마는 억울할지도 모르겠다. 계획된 임신은 아니었고, 출산 전까지 아들인지도 몰랐으니까. 다만 아들을 바라던 게 아니라고 할 순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아들을 원했기에.
나는 어릴 적부터 친할머니를 잘 따르지 않았다. 자라면서 엄마에게 들어왔던 많은 이야기들 때문이었으리라. 그 당시 흔했던 남아선호 사상 기반의 시집살이에서 우리 엄마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첫 아이를 딸을 낳아 놓고 고개숙여 살아야 했던 엄마는 몸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아직도 비 오는 날 몸이 쑤실 때면 그때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아픈 거라며 하소연을 하곤 한다. 심지어 아빠조차 내가 태어나던 날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이모에게 놀림을 받으니 말이다. 딸을 낳아서 받아야 했던 수모, 품에 손자를 안기고도 당당하지 못했던 나날들. 그 오랜 과거들을 12년 만에 청산하고 엄마는 당당히 큰집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이어서 다행이라고, 나 또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