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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Dec 03. 2022

수프 드 오뇽/ 양파수프

제발 저녁 좀 빨리 먹자!!

  양파는 세계 어딜 가도 똑같다.

  그게 뭐 특별하냐고?

  비행기를 하루 반나절 타고 내린 낯선 곳의 길모퉁이 가게에서 여태 먹어온 양파와 똑같은 식재료를 발견했을 때 순간 드는 감정이 있다. 위안이다.

  아, 얘는 익숙하구나. 널 잘 알고 있어. 마치 오래된 동네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부엌에서 요리를 한 적이 없는 사람조차도.

  공감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이건 내 글이고 나는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암스테르담에서 다시 리옹으로 시간의 관한 감각이 흐릿해졌을 무렵 어둡고 서늘한 공항에 내렸고 엉망의 장발을 한 H를 만나자 무릎이 꺾였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은 공기마저 생경했다. 도착하자 나는 무너지듯 쓰러졌다.


  잠이 들자마자 잠이 깼다. 

  아침 식사를 위해 새벽부터 빵을 사러 나가던 길, 잡동사니를 파는 따바tabac를 지나 채소 가게 앞을 지나가며 흘낏 스캔하던 중, 다양한 채소 더미 사이에서 양파가 눈에 들어왔다. 채소들의 이름은 익숙했으나 한국에서 알고 지내던 채소와는 묘하게 다른 모습이 낯설었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불경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나 양파는 똑같았다!!! 마치 엄마가 봉지에 넣어 주시던 양파처럼 동글동글하고 껍질도 대충 말라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낯설고 도망치고 싶었던 이 동네가 조금은 익숙해졌고 살아볼 만하다는 의지가 생겼다. 양파 하나가 이런 힘이 있을 줄이야. 마음 붙일 이유를 찾던 사람에게 마음을 내려놔도 괜찮겠다는 여유가 생겼다.


  동네 광장에 장이 열렸다. 양파를 한 바구니 샀다.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단지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양파를 한 바구니 사와 부엌에 놓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마라면 뭘 만들었을까. 장아찌? 간장이 없었다. 살 수는 있으나 트람tram을 타고 40분이나 가서 비싼 기꼬망 간장을 사 와 장아찌를 하기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앙파김치? 그런 게 있었나? 양파는 고기에 곁들이는 사이드 메뉴로서의 재료였을 뿐 좀처럼 시도할 만한 것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그 사이 양파는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묵찌빠. 숲을 이루더니 마침내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한동안 현실에 적응하느라 낯선 곳에서 위안을 주던 양파의 존재를 잊었다. 

  인간이란 흔히 은혜를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그게 나다.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복합 상업공간에서 세탁기를 샀으나 배달은 한 달 뒤, 은행 업무도 예약, 병원도 예약. 성질 급한 사람은 속 터질 상황의 반복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를 환영하는 프랑스 친구들이 집에 초대를 했다. 가뜩이나 시차 적응도 안된 상태라 저녁 언저리쯤 기절하듯 그냥 잠이 들 정도로 수면 상황이 엉망인 시기였다. 하지만 선의로 가득한 그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반갑게 초대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끌로드와 마리옹의 집. 저녁 6시 반.

  나와 H는 꽃다발과 와인을 들고 리옹 시내 천년은 묵은 듯한 빈티지를 넘어 앤틱 고물상 같은 아파트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굉장히 비싼 아파트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글쎄다. 암튼 엘리베이터는 2인승이었고 문은 쇠창살로 된 여닫이로 되어 타는 사람이 열고 닫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엘리베이터였다. 올라가는 동안 마치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듯 울퉁불퉁한 돌 벽이 보였다. 약간 공포스러웠다. 영화에서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바깥에 가위를 든 살인마가 서 있었는데. 그 영화가 뭐더라 설단 현상으로 입을 씰룩거리고 있을 즈음 문이 열렸다.

  가위 대신 와인잔을 든, 살인마 대신 활짝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끌로드와 마리옹이 있었다.  늘 할 때마다 거북하기 짝이 없는 비주bisou(프랑스식 인사- 단 친밀한 사이일 경우)를 양 볼에 쪽쪽 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끌로드는 진짜 6시 반에 오는 손님은 너희가 처음이야 라며 울랄라oh la la를 반복했다. 

  나와 H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할 수 없어서 약속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끌로드는 프랑스에서 식사 초대 약속은 한 시간 정도 뒤늦게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이게 뭔 개떡 같은 약속 방식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개떡의 프랑스 표현이 뭘까 생각하다 입을 다물어야 했다.

  

  역시 그랬구나.

  7시 반에 왔어야 했다. 

  집 상태는 손님을 맞기에는 많이 부족해 보였다. 비교적 난장판이었다. 덕분에 분명 손님이었던 나는 부엌과 거실을 오가면서 손님 맞을 준비에 전력을 다해야 했다. 프랑스인답게 한 시간 뒤에 나타난 다비드와 안느가 오늘의 진정한 손님이었다.

  다비드와 안느는 양손에 와인을 들고 정확하게 7시 반쯤 문 앞에서 우리와 비주를 했다. 그리고 저녁이 시작되었다.


  7시 반부터 시작된 아페리티프aperitf. 

  식사 전에 화이트 와인과 뽁또porto(포루투갈 주정와인)를 섞어 끼르kir라는 식전주를 마신다. 안주로는 올리브나 감자칩 또는 바삭하게 구운 작은 토스트와 올리브와 앤초비를 갈아 만든 따쁘나드tapenade(일종의 스프레드) 같은 가벼운 것들을 곁들였다. 

  끌로드는 끼르를 만들기 시작했다. 계속 만들고 마시고 또 만들고 마셨다.


  그 시간 나는 무척 배가 고팠다. 평생을 일찍 먹고 일찍 자는 습관이 시차가 달라졌다고 해서 바뀔 리가 없었다. 배도 고프고 졸릴 것을 예상해서 낮부터 진하게 만든 에스프레소를 몇 잔 미리 마셔두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자 카페인은 힘을 내지 못했다. 빈 속에 알코올의 힘은 강력했다. 

  끼르를 한 잔 마시자 허기가 졌다. 허겁지겁 칩을 각종 소스에 찍어 먹다 보니 목이 말랐다. 물을 가지러 부엌에 가기가 귀찮았고 물을 대신할 끼르는 눈앞에 있었다. 끼르를 한 잔 더. 마셨다. 다시 칩을 먹고 끼르, 칩, 끼르, 칩, 끼르. 뫼비우스의 아페리티프.

 

  아!!! 대체 저녁은 언제 주는 거냐!!!! 

  프랑스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하다 보면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아페리티프부터 샐러드 또는 수프, 본 메뉴, 빵, 치즈, 디저트, 식후주까지 틈틈이 와인을 바꿔가며 어찌나 천천히 마시고 먹는지 초저녁 잠 많은 나는 눈이 풀리고 급기야 우리말로 집에 가자!!! 외치는 사태가 빈번했다.

  짧은 시간, 텅 비어있던 위는 키르와 칩, 각종 소스와 올리브로 가득 찼다. 화장실을 가야 했다. 화장실은 거실 한가운데 변기와 조그만 세면대와 작은 책장이 있는 아늑한 장소였다. 들어가 문을 닫자 그 아늑함에 잠시 어지러워 변기 위에 앉았다. 그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다들 근심 어린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며 괜찮아? ca va? 주문을 외우듯 묻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잠시 떠올려야 했다. 화장실에서 끊어진 기억은 H의 설명으로 복원되었다. 화장실에 간다고 나간 지 꽤 시간이 흐르고 나의 부재를 하나 둘 눈치채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화장실을 두드리자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화장실 문은 나무 바닥과 큰 틈이 있었고 그 틈을 통해 들여다보니 변기를 잡고 자는지 기절을 했는지 엎어져 있었다고 한다. 마스터키를 가져온 끌로드는 문을 열고 H가 부축해서 소파에 뉘어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눈을 뜬 것이다.

  이 상황이 참 비현실적으로 유머러스해서 괜찮아/ca va!!! 하며 웃어버리기엔 다들 너무 진지했고 사실은 이러저러 구구절절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까웠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부엌에서 마리옹이 손님 수의 스프볼을 담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드디어!! 밥이다!! 

  본아뻬띠 외치자 방금 전 상황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식사 대형으로 전환되었다. 사람들도 자리를 찾아 앉았다. 더 이상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드디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마리옹은 각자 앞에 오븐에서 막 꺼낸 스프볼을 놓았다.

  수프 드 오뇽. 양파수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부드럽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맨 위의 콩테와 그뤼에르가 오븐에 구워져 갈색을 띠고 바게트는 수프에 푹 적셔져 마치 푸딩처럼 스푼으로 잘라졌다. 잘 그을린 양파와 수프는 달콤하고 구수했다.

  양파수프로 건강을 되찾은 위장은 새벽 2시까지 이어진 저녁 메뉴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양파 수프를 할 때마다 그때의 기억들은 부케 가르니(국물요리에 들어가는 향신료 묶음)처럼 그윽하고 향긋한 맛을 더하는 재료가 되었다.



<만들기>

  ** 비교적 쉽고 매우 지겨움

1. 양파를 슬라이서로 최대한 얇게 저민다.

2. 양파의 수분을 없앤 후 볶아야 시간이 단축된다. 슬라이스 된 양파를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오븐 또는 

    에어 프라이어에 돌려 수분을 날려준다. 이도 저도 귀찮으면 반나절 햇볕 아래 펼쳐둔다.

3. 약간 건조된 양파를 웍에 넣고 볶는다. 

    아직 물기가 많아서 버터 없이 수분을 날려준다는 의미로 더 볶는다.

4. 수분이 없어져서 뻑뻑하다고 느껴질 때쯤 버터를 넣어 볶는다. 

5. 짙은 갈색이 될 때까지 볶는다. 짙은 색이 된다는 건 태운다는 의미와 같다. 

    그 정도로 오랜 시간 달달 볶아야 한다. 꽤 시간이 소요된다. 지칠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지 말고 수프를 완성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며 참아내자. 

5. 충분한 색깔이 나왔을 때 밀가루 한 스푼을 넣어 같이 볶아준다. 

6. 물과 치킨 스톡을 넣어 끓인다. 소금. 후추 더한다. 

    양파의 형태가 흐물흐물해져야 한다. 그때까지 부글부글.

7.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가도 되는 수프 볼을 준비한다.

8. 끓여놓은 수프를 담는다. 

9. 그 위에 바게트를 얹는다. 여기서 집중!!! 바게트는 수프의 국물을 꽤 많이 빨아들일 예정이다.

    국물을 바게트가 빨아들일 양과 떠먹을 수 있는 양을 계산하며 국물을 넣어야 한다.

10. 그 위에 꽁떼 또는 그뤼에르 치즈를 갈아 얹는다.

11.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넣어 치즈가 지글지글 갈색이 되면 꺼내 서빙한다.

12. 뜨겁다. 만든 게 기쁘다고 한 입 떠서 훅 넣으면 입천장의 세포들과 이별하는 수가 있다. 조심!!

13. 본아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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