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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로 쓰는 앎Arm Jun 23. 2020

내력이 있으면 그냥 산다

자기 속한 곳 욕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다. 해서 나는 지인들에게 내가 속한 곳에 대한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 늘 '좋다'고만 말한다. 일견 사실이다.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만 말한다. 말은 씨가 되고 말은 힘이 세다. 어리석을 말일지 모르지만 어린 시절 '노인과 바다'서 본 '될 일도 말하면 안 된다'를 소중하게 믿어서, 나는 가슴에 품은 좋은 일에 대한 진심은 말하지 않는 대신, 남에게 현실을 표현할 땐 '좋다'고 말한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내가 그렇게 말하면 사실이 된다. 이 회사를 올 때 지향했던 가치들을 어떤 측면서는 지켜냈고, 어떤 측면은 잃었다. 그래도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유가 어디있어. 마음이 그렇다.


힘든 순간이 오면 뭐든 한다. 청소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소주를 마시거나 사람을 만나고 단톡방에서 별 것 아닌 일에 웃긴 척 연기를 하고 뭐 그런다. 인간의 노릇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하다가 얼마나 또 가벼운가 하다가 얼마나 값어치 있나 하다가 얼마나 또…. 하다 생각을 끊는다. 하루 하루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흘러간다. 오늘은 세 번 소리를 냈다. 힘들어서 낸 소리 말고, 으라차차 하는 소리를 냈다. 할 일이 계속 되면 웃음이 난다. 조금의 쉴 틈도 없이 숨돌릴 수 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언젠가는 병이 났다가, 나아지면 으라차차 하고는 세 번 피식 웃고 다시 하루를 보낸다. 그냥 웃음이 난다. 해도 해도 계속 있네 하면서 웃는다. 내가 자처한 것들이니 어쩔 수 없다. 즐겁게 해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 즐겁다고 생각하면 즐겁다. 아무 것도 안 하면 뭐할 건데. 


즐겁다. 집을 돌보고 해를 받으며 일을 하고는 다시 과업들을 해내고 끝이 없으니 일기장 와서 숨돌린다. 멍하니 주저앉으면 끝도 없이 주저앉을 테니 나는 숨돌리고 싶으면 포스트잇에 단어를 주절거리거나 일기를 편다. 대개 일기를 쓴다. 해야할 일을 기록하는 일은 그만둔지 오래다. 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쓰다가 질려버리니 젊은 게 복이라고, 기억나니 다 해둔다. 그렇게 로보트처럼 머리 따라 손이 움직이다 가끔은 탈이 나고, 그럼 병원엘 간다. 아프면 꼭 병원엘 가야지. 누워 있으면 낫겠거니 하는 건 없다. 안 나아. 일상을 먹다 먹다 체하면 뭘 버린다. 내게 필요없어진 물건을 보내는 순간은 단단하다. 알이 꽉 차있다. 그 물건을 어떻게 만났는지, 어떻게 미련없이 버리는지 등은 순간에 판가름난다. 몇 개월을 미루다 판단하는 거니 그러겠지 하다가 또 만다. 일상을 단단하게 끌어 가려면, 많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균형을 찾는 일은 어렵다. 에너지 쏟을 곳에 쏟고 아닐 곳엔 말아야 하는데, 갈수록 인간의 노릇을 해야 하니 그건 어렵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믿는 신조 하나는, 가장 바쁜 사람이 가장 많은 시간을 갖는다는 거다. 노오력 쥐어짜는 걸 비웃는 세상서 새삼 말하기 민망하고 구시대 같지만, 노오력은 적당량은 보상을 담보한다. 뛰어난 부자가 되거나 갑자기 계단을 오를 순 없더라도, 성실함은 개인을 함부로 배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성실함을 말 그대로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쳇바퀴 도는 것처럼 언뜻 느낄 수 있을 테다. 쳇바퀴 돌 힘이 있다는 게 어딘인가. 꾸준히 달릴 힘이 있다는 게 어디인가. 언제나 알았다. 힘이 있을 때 달려야 한다. 날 것일 때 날 것임을 드러내야 한다. 두려운 게 없을 때 두렵지 않을 행동들을 해야 한다. 언제나 인생은 타이밍이다.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사는 것은 피곤하지만 그 값어치가 있다.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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