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일단 이건 절대 부치지 않을 편지야.
하지만 20대 초반 행복한 기억을 남겨준 너에게
너무 어려서 부족했던 나 자신의 행동에 대해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한 번쯤 해보고 싶던 말을 해보려고 해.
알다시피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어.
그리고 공대에 갔지.
즉, 남자에 대한 면역이 없었어.
면역이라고 하면 정말 웃긴데,
나도 그럴 거라고는 대학에 가고 나서야 알았어.
낮은 저음의 목소리. 내 시야를 가리는 덩치들(나는 키가 큰 편이라 누군가 내 시야를 가린다는 게 너무 생경했어)
안 그래도 낯을 많이 가리는데, 남자애들? 더 어렵지.
나는 여자, 남자는 무조건 성을 붙여서 이름을 부르던 초등학교 시절에 멈춘 채로 성인이 된 거였단 말이야.
"여자애들은 되게 귀엽게 노는구나?"
처음 만난 동아리 회식자리에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 나는 너를 보았고, 너는 나를 보고 웃었어.
너의 첫인상은 뭐랄까... 당연히 복학한 복학생. 약간 날티남. 오빠가 오빠가,라고 말할 것 같은 남자.
내가 생각하는 모범생과는 적어도 120도 이상 차이가 날 것 같은 사람.
이었어.
내가 처음에 너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을 때, 아냐 우리 동갑이야.라고 했지.
나는 민망했어. 근데 그런 착각 많이들 한다고 너는 내가 무안하지 않게 해 주었어.
너는 여자인 친구들을 00아, 00이 라고 친근하게 불렀고 남자인 친구들과도 친하게 지냈어.
아마도 나와는 전혀 다른 성향의 남자애.
여자애들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는 남자애.
그런데도 내게 뭔가를 줄 때면 너는 내 손에 자기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했어.
내가 그걸 싫어하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게 너무 신기했어.
그다음부터 너를 관찰했던 것 같아.
시간이 많이 지나고, 우린 만났고, 너는 떠났어. 군대로.
그 시절 나는 암흑기에 접어들었어.
너의 문제는 아니야. 그냥 당시의 환경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아떨어졌는지.
너무 힘든 시기였어.
안 그래도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나인데,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으니. 엄청나게 폐쇄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으려니, 어느 순간 화가 나더라.
나랑 가장 가까웠던 너는 그냥 도망가버렸다는 생각에 그 화가 너한테 향하더라.
미웠어. 나는 혼자가 되었는데, 내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네가 밉더라.
나는 가족 이외에 모든 사람이 싫어져서 집과 학교만 오가는 단조로운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너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만날 날을 기대한다는 게 싫더라.
나도 어렸지.
그래서 휴가 나온 너의 연락에 핸드폰을 끄고 '보기 싫으니 연락하지 말아라'라고 말해버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런 통보를 받은 네 마음은 어땠을까?
하지만 그때 나는 내 생각밖에 할 줄 몰랐어.
후회하고 미안한 마음은 나중에 찾아왔고, 그땐 이미 늦었더라.
무슨 말을 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더라.
살아가며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언젠가 허심탄회하게 너와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온다면 하고 말이야.
그러면 그때의 내 마음을 대변해서, 잘 말해줄 수 있고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할 수 있고
사실 그 후로 네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겠지?
그냥 내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상상 속 장면일 뿐일 거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어.
건너 듣기로 너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것 같더라.
그렇다면 좋은 연애를 하고 있기를.
그래서 이건 부치지 않는 편지.
다만 상처 준 내가 미안해하는 마음을 담았어.
혹여나 내가 너를 미워한 게 너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나의 문제였으니까. 변명이어도, 그게 사실이니까.
행복하길 바랄게. 항상.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