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자
안녕 오빠?
너와 함께 산지도 벌써 1년이 되었네.
안녕 T.
실명을 공개할 순 없어서 이니셜로 대체해.
이름에 T가 들어가있어서, T라고 썼는데 요즘 유행하는 MBTI 같다ㅎㅎ
나와 만나기 전, 너는 어떤 삶을 살았니?
궁금하다.
나는 섬세한 글을 좋아해. 사람의 마음에 스펙트럼이 있다면, 한가지 감정을 가지고도 그걸 얇고 얇게 썰어낸 것처럼 다채롭게 표현하는게 좋아.
그게 진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같아서.
똑같은 풍경, 사람, 상황을 겪어도
모두가 다른 풍경, 사람, 상황을 겪는다고 하니까.
네가 보는 세상이 궁금해.
그래서 매번 물어봤지.
좋아, 하면
뭐가 좋은데? 하고.
너가 좋아, 하면
어떻게 좋은데? 얼마나 좋은데? 그냥 좋다 말고 다른 말로 표현할 건 없어? 하고.
너는 당황했겠지.
'오늘 나 뭐 바뀐 것 없어?' 라는
희대의 난제를 비틀어 낸 문제인가 싶었을수도 있어.
하지만 항상 궁금했어.
남들 다 아는 말로 말고, 너가 느낀 좀 더 다른 감각이 알고 싶었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느낀다는 '좋아'의 감정에, 그 무수한 다름 속에.
특별히 네 감정이 궁금했단 말이야.
그래서 나는 조금씩 너의 감정을 수집해.
그냥 좋아, 라고 말하는 것과
좋아! 라고 말하는 것.
초롱초롱한 눈 안에 담긴 것.
살짝 올라가는 입꼬리에,
얇게 휘어지는 눈가 주름에
뭔가가 더 담겨있는지 확인해.
나를 만나고 세상이 다채로워졌다고,
그 전엔 어떻게 살았나 싶다고
말하는 말을 들으며 괜히 으쓱하기도 했어.
적어도 나와 시간을 보내며 감정이 더 다양해졌다고 느낀다면
왠지 모르게 뿌듯해.
얼마 전 여행을 다녀왔어.
처음 만나고, 우리가 손을 꼭 잡고 다니던 시기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그냥 나란히 걸어다니는게 신기해보였어.
손도 잡지 않고, 꼭 붙어가지도 않고.
하지만 남이라기엔 조금 가까운.
걸어가다 문득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아, 남이 아니구나 알게되는 사람들의 모습.
애정이 식으면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아.
얼마 전 여행에서 문득 그런 나를 발견했어.
손을 잡지 않고, 각자의 짐을 들고
그냥 적당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채 걸어가는 우리 둘의 모습.
만일 우리가 그렇게 된다면 슬퍼질거라는 예전의 감상과 달리 신기한 기분이 들더라.
아. 이거였구나.
너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그냥 당연히 옆에 있겠거니 싶은 마음.
손을 잡고 걷지 않아도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고,
언제든 다시 손을 잡거나 놓는게 자연스러운 사이.
시간이 지나야 알게되는 것들이 있더라.
그래서 기분이 좋아졌어.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너는 그럴것 같았다며 응원해주었어.
나의 글이 '기가 막히다'고,
리액션 부자도 아닌데 고개를 연신 끄덕여가며 감탄해주곤 했지.
처음 출판사계약을 했을 때도 될 줄 알았다고,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지 않는다고 시무룩할때도 언젠가 될거라고 했어.
그게 힘이 되더라.
나는 머릿속으로 너무 많은 생각을 해서 아주 깊은 어둠으로 들어갈 때가 있는데,
그냥 될 것 같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그 특유의 단순한 말로 나를 위로했어.
그럴 때 느꼈어. 너의 단순함은 사실 나의 복잡함보다 강할 때가 있다고.
그래서 좋다고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
뭐든 적당히가 어렵다고, 애정어린 말도 미운 말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지만
어디까지 글로 풀어내도 되는지 모르겠어.
(이 글을 보는 누군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되니까)
못다한 말은 살아가며 찬찬히 풀어나가자.
너를 만나며 다짐했던 말.
나조차도 가끔가끔 잊어서 다시 새기는 말.
항상 고마워. 고마운 걸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고마워할게.
안뇽!
- 반려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