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부치지 않는 편지. 아니, 못하는 편지? 왜냐하면 이걸 보는 아빠는 나보다 어린 아빠니까. 내가 태어나던 해,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
당연한 말이지만 아빠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 그냥 알게 된 순간부터 아빠는 그냥 아빠였어.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 그리고 아빠. 어른. 아빠. 그래서 내가 아빠의 나이를 넘어설 거란 생각은 안 해봤다? 근데 이 편지를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하네. 내가 태어나던 해, 아빠는 나보다 어렸어. 계산해 보고 놀랐지 뭐야. 나보다 어린 아빠. 음.. 이렇게 말하면ㅋㅋㅋ 발끈할 수도 있겠지만 그 나이대 남자란 아직 철이 안 들은 사람이 왕왕이란 말이지. 어려. 정말로 어린데, 부모가 되었네. 처음 봤을 때 내가 울고 있는데 내 입이 너무너무 커서, 와 얼굴이 안 보인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었지? 어릴 적 그 얘기를 해주면 나는 입을 앙 크게 벌렸어. 나름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면 엄마랑 아빠는 또 잘한다고 해주고. 괜히 신나서 더 입을 크게 벌렸던 것 같아. 그게 뭐라고.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케이크에 초를 부는 모습. 생크림을 묻히고 환하게 웃는 내 어릴 적 얼굴. 나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사진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돼. 그때의 나는 정말로 행복했겠지? 항상 옆에 있어서 엄마 아빠가 나이 먹은지도 몰랐네. 사진 속 엄마 아빠는 정말로 어리더라. 예쁘고 잘생겼더라. 아빠는 처음 부모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그 마음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을 해? 내가 어떤 딸이 되기를 바랐어? 궁금하다.
우리 아빠는 과묵한 사람. 가끔 뭘 물으면 대답이 없어서 막 화를 내면,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 특별히 묻는 게 아니면 뭔가를 말해주지 않는 사람. 우리의 어릴 적엔 이랬다 저랬다. 너네 아빠는 이랬다 저랬다. 너무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로 말해주는 엄마와 달리, 아빠의 시점에서는 하나도 들을 수 없던 이야기들.
나는 가끔 아빠의 속이 궁금했어. 나도 말이 많지 않잖아. 그런데 할 말이 없는 게 아니거든. 그만큼 그냥 담고 있을 뿐. 속에 든 생각이 많아. 하고 싶은 말도, 하기 싫은 말도. 마음속에 가득 담고 있어. 그래서 글을 쓴 건데. 내 마음을 잘 보여주고 싶어서. 아빠는 글도 쓰지 않고, 별로 말도 하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어. 아빠의 시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가 있더라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 어릴 적 읽어주던 동화책. 엄마가 시켜서 해준 거라고는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 행복한 상태로 남아있어. '꾸준히'가 어려운 거잖아. 잠이 들기 전, 동생과 내가 책 하나를 골라와. 아빠는 소파에 앉아있고, 우리는 책을 건네고 아빠의 양옆에 앉아. 동화책을 처음 읽은 날은 기억이 나질 않아. 이상하지? 정말 많이, 수십 번은 더 읽었을,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책을 또 읽어. 아빠는 구현을 잘하는 편이었어. 남자목소리. 여자목소리. 아기목소리. 할머니목소리. 매번 들었는데도 우리는 재밌어서 매일매일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거, 기억나? 그 시절 사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조금 아쉽다. 그림도 그려줬어. 아빠가 그려주는 신데렐라는 하나도 안 이뻤는데. 근데 점점 실력이 늘어서 나중에는 제법 잘 그려준 것도 기억이 나? 되게 기뻤어. 그림도 예쁘고, 그걸 그려준 게 아빠라서. 어느 날 아빠는 평소처럼 똑같이 동화책을 읽어줬어. 다 읽고 나서 말했어. "책 읽어주는 건 오늘로 끝이야."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어. 대체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정한 거야? 나중에, 그 얘기가 나온 김에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아빠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 그런 말을 했던가~? 이러는 거야. 아이구 답답해.
어떻게 6,7 ? 7,8 미취학 아동한테, 눈을 빛내며 매번 동화책 낭독을 듣는 딸들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해!ㅋㅋ) 우리는 한글을 읽을 줄 알았어. 그 책들도 수십 번 읽었어. 원한다면 우리가 읽는 게 가능했다는 거, 우리도 알아. 하지만 아빠가 읽어주는 게 좋아서 매번 읽어달라고 한 건데. 어차피 몇 년.. 아니 몇 달만 더 지나면 우리가 먼저 '아빠 이제 안 읽어줘도 돼'라고 했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어쨌든 달콤한 시간은 어느 날 무 자르듯 끝이 났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지만..ㅎ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빠가 생각하는 우리들. 아빠의 인생 이야기가 듣고 싶다. 아빠의 시점에서 말이야.
원래 사람들은 다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한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걸 좋아한대.
난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나 같은 딸이 있다는 거, 꽤 좋은 일이지? 나보다 어렸던 아빠는 이제 없지만 언제나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우리 집 유일한 청일점. 앞으로도 계속 든든하게 있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