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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Nov 14. 2024

To. 나 어릴 적 아빠에게

나보다 어린 아빠. 안녕?

안녕 아빠.
아빠의 큰딸이예요

이건 부치지 않는 편지. 아니, 못하는 편지?
왜냐하면 이걸 보는 아빠는 나보다 어린 아빠니까.
내가 태어나던 해,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



당연한 말이지만 아빠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
그냥 알게 된 순간부터 아빠는 그냥 아빠였어.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 그리고 아빠.
어른. 아빠.
그래서 내가 아빠의 나이를 넘어설 거란 생각은 안 해봤다? 근데 이 편지를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하네.
내가 태어나던 해, 아빠는 나보다 어렸어.
계산해 보고 놀랐지 뭐야. 나보다 어린 아빠.
음.. 이렇게 말하면ㅋㅋㅋ 발끈할 수도 있겠지만
그 나이대 남자란 아직 철이 안 들은 사람이 왕왕이란 말이지.
어려. 정말로 어린데, 부모가 되었네.
처음 봤을 때 내가 울고 있는데
내 입이 너무너무 커서, 와 얼굴이 안 보인다. 그렇게 생각했다고 했었지?
어릴 적 그 얘기를 해주면 나는 입을 앙 크게 벌렸어. 나름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러면 엄마랑 아빠는 또 잘한다고 해주고. 괜히 신나서 더 입을 크게 벌렸던 것 같아. 그게 뭐라고.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케이크에 초를 부는 모습. 생크림을 묻히고 환하게 웃는 내 어릴 적 얼굴.
나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 사진이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돼.
그때의 나는 정말로 행복했겠지?
항상 옆에 있어서 엄마 아빠가 나이 먹은지도 몰랐네. 사진 속 엄마 아빠는 정말로 어리더라. 예쁘고 잘생겼더라.
아빠는 처음 부모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그 마음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을 해?
내가 어떤 딸이 되기를 바랐어?
궁금하다.

우리 아빠는 과묵한 사람. 가끔 뭘 물으면 대답이 없어서 막 화를 내면,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
특별히 묻는 게 아니면 뭔가를 말해주지 않는 사람.
우리의 어릴 적엔 이랬다 저랬다. 너네 아빠는 이랬다 저랬다.
너무 많이 들어서 외울 정도로 말해주는 엄마와 달리, 아빠의 시점에서는 하나도 들을 수 없던 이야기들.

나는 가끔 아빠의 속이 궁금했어.
나도 말이 많지 않잖아. 그런데 할 말이 없는 게 아니거든. 그만큼 그냥 담고 있을 뿐.
속에 든 생각이 많아. 하고 싶은 말도, 하기 싫은 말도.
마음속에 가득 담고 있어. 그래서 글을 쓴 건데. 내 마음을 잘 보여주고 싶어서.
아빠는 글도 쓰지 않고, 별로 말도 하지 않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어.
아빠의 시점에서 바라본 우리의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가 있더라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
어릴 적 읽어주던 동화책. 엄마가 시켜서 해준 거라고는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 행복한 상태로 남아있어.
'꾸준히'가 어려운 거잖아.
잠이 들기 전, 동생과 내가 책 하나를 골라와. 아빠는 소파에 앉아있고, 우리는 책을 건네고 아빠의 양옆에 앉아.
동화책을 처음 읽은 날은 기억이 나질 않아. 이상하지?
정말 많이, 수십 번은 더 읽었을,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책을 또 읽어.
아빠는 구현을 잘하는 편이었어. 남자목소리. 여자목소리. 아기목소리. 할머니목소리. 매번 들었는데도 우리는 재밌어서 매일매일 책을 읽어달라고 했던 거, 기억나?
그 시절 사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조금 아쉽다.
그림도 그려줬어. 아빠가 그려주는 신데렐라는 하나도 안 이뻤는데.
근데 점점 실력이 늘어서 나중에는 제법 잘 그려준 것도 기억이 나? 되게 기뻤어.
그림도 예쁘고, 그걸 그려준 게 아빠라서.
어느 날 아빠는 평소처럼 똑같이 동화책을 읽어줬어.
다 읽고 나서 말했어.
 "책 읽어주는 건 오늘로 끝이야."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어.
대체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정한 거야? 나중에, 그 얘기가 나온 김에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아빠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 그런 말을 했던가~? 이러는 거야.
아이구 답답해.

어떻게 6,7 ? 7,8 미취학 아동한테, 눈을 빛내며 매번 동화책 낭독을 듣는 딸들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너무해!ㅋㅋ)
우리는 한글을 읽을 줄 알았어. 그 책들도 수십 번 읽었어. 원한다면 우리가 읽는 게 가능했다는 거, 우리도 알아.
하지만 아빠가 읽어주는 게 좋아서 매번 읽어달라고 한 건데.
어차피 몇 년.. 아니 몇 달만 더 지나면 우리가 먼저 '아빠 이제 안 읽어줘도 돼'라고 했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어쨌든 달콤한 시간은 어느 날 무 자르듯 끝이 났어.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지만..ㅎ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빠가 생각하는 우리들. 아빠의 인생 이야기가 듣고 싶다.
아빠의 시점에서 말이야.

원래 사람들은 다 자기 얘기를 하는 걸 좋아한대. 듣는 것보다 말하는 걸 좋아한대.

난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나 같은 딸이 있다는 거, 꽤 좋은 일이지?
 
나보다 어렸던 아빠는 이제 없지만
언제나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우리 집 유일한 청일점.
앞으로도 계속 든든하게 있어주세요.
감사합니다.


당신의 영원한 첫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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