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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Dec 25. 2024

55화 수진을 만났습니다

그런 깨달음과는 별개로 나는 치호의 진심을 마주하고 차마 서 있기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꿈에서 깨실 시간입니다. 김도욱씨."




치호가 옆에 있던 선반에 팔을 넣고 있는 힘껏 밀었다. 힘에 못이긴 와인병이 구르고 깨지며 돌바닥에 산산조각났다. 김도욱이 포효하며 그에게 달려든 건 순식간이었다.


내가 등장해야할 순간이 있다면 바로 지금이 아닐까. 

그때까지 구석에서 숨이나 죽이고 있던 나는, 사실상 폼잡을 여유도 없이 뛰쳐나갔다.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김도욱의 얼굴색이나 근육 같은 사소한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그가 치호에게 달려드는 순간 거의 엇비슷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얼추 두 사람이 한 남자애에게 달려드는 듯한 양상으로 지하내부에 세 사람이 등장했다. 그 와중에도 치호의 동공이 눈사태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감이 좋은 녀석도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까지는 몰랐던 모양이었다. 


치호에게 집중하느라 나를 보지 못한 김도욱을 내 온몸으로 깔고 뭉개며 어디서 본 듯한 자세로 뒷 팔을 꺾어 제압했다. 아, 이게 되는 거구나. 김도욱이 소리를 질러서 보니 깨진 와인병에 허벅지가 쓸려 피가 나고 있었다. 


"뭐야?!"


황당한 치호의 말에 내가 답했다. 


"왕자님 등장..?"


내 밑에서 김도욱이 꿈틀대는 와중에 위에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위험을 감지한 그가 나가자고 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어..?"


다리에 힘을 실어 일어서는데 무릎이 휘청거렸다. 와인병을 뒤집어 썼다는 사실을 그제야 인지했다. 여긴 변형된 네카가 많이 들어 있을까? 직접 섭취한 것도 아닌데?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잡고 있던 김도욱과 함께 바닥에 주저 앉았지만 이내 바닥과 함께 머리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으아아. 초점을 맞출 수 없는 시선에 치호로 보이는 뭔가가 휙휙 지나갔다. 그가 나를 부르는 듯 했으나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김도욱이 비릿하게 웃었다. 


치호가 나를 여러 번 불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핏대 선 목울대가 꽤나 선명했다. 그리고 그의 뒤로 여러 사람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달려오는게 보였다. 꼭 좀비처럼. 내가 환영을 보는 건가? 그가 입술새를 씹으며 다시 나를 불렀다. 대답을 하려 했으나 어지러워 도무지 정신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세상이 돌다가 딱 멈췄다. 


눈을 감은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지하실에는 나 혼자만 있었다. 이치호도 없고 김도욱도 없었다. 기울어진 선반과 깨진 와인병은 그대로였다. 뭐지? 바닥에서 형광등을 반사시키는 유리조각을 보다가 인기척이 나 고개를 들었다. 역광으로 얼굴이 잠시 보이지 않았다. 적당한 중단발. 굽이치는 머리를 풀고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이는 수진이었다. 


"왜..."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물으려던 질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잘 지내?"


미쳤구나 신창준. 물어보고 싶었고 떠오르는 말이 그것밖에 없었는데도 막상 말하고 나니 적절치 못했다. 잘지내냐니. 나참..잘지내냐니.


"...잘 지내요."


수진이 웃었다. 스물아홉의 수진과 서른여덟의 나. 이 와중에도 잘 지낸다며, 너는 친절했다. 그대로 멈춰있는 그 시간 속에 잘 지낸다는 그녀의 말은 대체 어디서 온걸까. 그녀가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이거 꿈이야?"

"네. 꿈이에요. 그러니까 여기 있으면 안 돼."

"꿈이면 당신도 내가 만든 거야?"

"..."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 말 없는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 이건 나의 환상이야. 대답하지 않는 건 내가 그 대답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고.


"시간이 됐어."


댕.댕.댕. 어디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옛날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음산하고 커다란 괘종이 머릿속을 스쳤다. 분명 이 소리는 그런 괘종시계에서 나는 소리일거야. 나는 확신하면서, 왜 그런 소리가 났는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늦기 전에 말해야 했다. 나는 뒤돌아서는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머리칼이 굽이쳤다. 그녀는 내 앞에서 머리를 푼 적이 한번도 없었다.


“미안해!”

"...."


수진은 묵묵부답이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미안해서.. 네가 중간에 이상하다는 그 말을 대충넘겨서. 그리고 일이 위험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발을 빼서. 당신이랑 최훈이 고생하는걸 보면서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어. 그저 내 실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알 수 있던걸 넘겨버려서. 내가 너무 비겁해서..!"


그때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언젠가 마주잡았던 보드라운 손이었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보아서 다행이었다. 이게 내 꿈이라면, 겪지 못한 환상이 나와 무엇을 하던 그 느낌은 실재와 다를 테니. 

나는 그녀의 갸날픈 몸을 확 잡아당겨 끌어안았다. 역시. 푸스스 부서지는, 공기처럼 허한 감각 뒤에 그녀는 없었다. 동시에 사위가 깜깜해졌다.


아득했던 소리는 점점 커졌다. 댕.댕.댕.댕.댕..!

달깍.


뚜껑을 돌리는 손이 보였고 모든게 갑자기 생생했다. 파하, 라며 숨을 크게 내뱉었는데 아마도 느낌뿐이었던 것 같다. 순간이동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순식간에 내 주위가 온통 그려지고 색채를 입고, 그 위에 소리가 덧씌워졌다.


처음 보이는 손목 위로 시계가 있었다. 괘종시계가 아니었네. 게다가 시계는 깨져있었다. 투박한 디자인이 어딘가 익숙한 그것을 바라보다 손 위로 시선을 따라가니 손의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정신 들어??"

“어..아우, 야.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미안한데, 일단 우리 여기서 탈출해야 해.”


치호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게, 와인 몇 병을 넣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 팔을 둘러 어깨에 멨다. 서늘한 지하3층의 공기에도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비상계단으로 가면 되지 않아?”

“그거 안에서 안 열려. 나가려면 정문 뿐이야. 근데..”


금고처럼 생긴 정문은 안에도 키패드가 달려 있었다. 안과 밖 모두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구조였다. 


“김도욱은?”


치호는 인상을 쓰며 고갯짓했다. 한쪽 구석에 김도욱이 밧줄에 칭칭 묶인 채 앉아있었다. 눈은 뜨고 있지만 정신나간 표정이, 이미 여기에 의식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해?”

“무전기를 전달하고 왔는데 아무래도 통신이 안되는 것 같아. 움직일 수 있겠어?”

“어, 어..”

“환풍구로 가자.”


치호는 천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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