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자루 Dec 20. 2024

53화 수백명의 날다람쥐

지직 거리는 소리가 한번 더 좌중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영상이 펼쳐졌다.




영상은 일단 주목을 끌어야 했다. 200명이 넘는 날다람쥐라고 자신을 칭하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그 중 한 남자가 볼멘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이거 해서 뭐해요? 뭐가 달라져요? 내 인생 돌려달라고!”


카메라를 내려치는 바람에 앵글이 뒤집혔다. 그 뒤로 여러 소리가 겹쳐졌다. 


“결국 달라질게 없잖아요.”

“머리에 종양이..”

“팔이 괴사했어요.”

“머리가 다 빠져서..”

“소리가 안들려요.”

“인권? 그런거 없었어요. 실험용 생쥐였죠.”


체념한 듯 날다람쥐라 말하고 서류에 사인을 했던 사람들의 불만 섞이고, 힘겨운 목소리였다. 남녀노소 모두가 뒤섞인 목소리가 클럽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뒤로 묵직하고 어두운 BGM이 깔렸다. 영상은 그런식으로 짧고 임팩트있게 이어졌다.


...직접 보라고, 치호는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다. 이래서였나. 눈을 떼기 힘들었다. 어느 누구든 순식간에, 영상 속 사람들에게 일말의 애잔함이라도 느낄 수 있게 제대로 구성된 영상이었다.


“단순한 호소가지고는 안 돼.”


치호는 자신의 계획에 무수한 날다람쥐가 있다고 했다. 도진요 사이트에서 ‘날다람쥐’라는 이름을 쓴 것도, 결국 동질감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모으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는 것도. 


‘남들은 생각보다 더 타인의 일에 흥미가 없거든. 그래서, 적어도 그들의 중심을 확실하게 드러내면서 충격을 줘야 해. 우습게도 진심보다 계산된 방식이 더욱 효과적이야.’


그렇게 말하는 치호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얼굴을 했다. 누가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을만큼 냉정해보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태도가 되려 반대로 느껴졌다. 마치 자신의 냉정함에 내가 질려하길 바라는 투로 날을 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2호영감이 말했다. 


"저희는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공통점은 여러분이 들고 있거나 마셨거나 앞으로 마실 예정인 와인에 있습니다."


의아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본인이 들고 있는 와인을 쳐다보거나 병으로 시선을 옮겼다. 뭔들 보일리 없었다. 


"엔씨(N.C)라고 하는 이 물질은 일종의 마약이지만 반응하는 개체수가 많지 않습니다. 효능도 제각각이고 발현시기도 다양합니다. 짧게는 몇 시간이 걸리지 않기도 하거니와 길게는 삼사년 뒤에 나타나기도 하지요. 마약과 비슷한 효과를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합니다. 제 말이 너무 뜬구름같나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저처럼 눈이 노랗게 되어 시력을 잃기도 하거니와, 어떤 사람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도 웃는 겁니다."


몇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몇은 숨을 삼켰다. 나는 어느새 2층 난간을 꽉 붙잡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도명제약의 산물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나와야하지 말아야할 물질을 연구하고, 약품으로 만든 건 도명제약 뒤를 이은 DM클럽입니다. 반응군이 다양한 엔씨를 상용화하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하겠죠. 여러분처럼 건강하거나 혹은 건강하지 않더라도요. 나이대도 다양할수록 좋습니다. 수년전 도명제약이 실험군으로 삼은 건 그나마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에 걸려도 뭔가의 지병이 있던 사람이면 의심을 피할 좋은 변명거리가 되니까요. 이번엔 건강한 젊은이들이 좋겠죠. 아시다시피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제가 대체 뭘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짐작할 뿐입니다. 이 눈을 잃고 나서 생긴 본능적인 감각으로요."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 도명제약이 뭐냐고 묻는 이들과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 나뉘었다. 이거 이벤트예요? 새된 목소리도 섞여들었다.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막아."


김도욱이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관통했다.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려와 소름이 돋았으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최훈이 일어섰다. 그는 재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음악이 켜졌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음악소리에 묻혔다. 웨이터와 직원들이 나와 날다람쥐2호 영감의 마이크를 빼앗았다. DJ로 보이는 사람이 그걸 쥐고서 말했다.


"여러분 소란을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잠시 오해가 있었던 모양으로.."


해명하라는 웅성거림이 섞여들었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DJ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난감해했다. 

그들이 시간을 끌고 있을 때가 기회였다.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모두 1층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혼란을 틈타 안쪽 복도로 들어섰다. 


“이쯤에 비상출구가..있다!”


화재시 비상출구로 사용될 최소한의 공간에 사다리가 있었다. 횡량한 공간에 철사다리 하나가 전부였지만,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통과하지 않고 지하까지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나는 차분히 숨을 내쉬고 사다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서늘한 냉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문이 안열리면 낭패였지만 다행히 지하 3층 통로에 있는 비상출구 문도 열려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와인창고는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아닌게 아니라 정말 지하 3층을 모두 술로 뒤덮은 모양이었다. 입구부터 맞은편 벽 끝까지, 바닥부터 천장에 조금 못미치는 높이까지 빼곡히 늘어선 나무선반에 성인남자 팔뚝만한 와인병이 차곡차곡 꽂혀 있었다. 그 규모와 수에 왠지모를 화려함까지 느껴졌다.


나는 그 중 하나를 꺼내어 향을 맡았다. 박하향이 났다. 

설마 이렇게 빠르게 찾아낸다고? 

다시 다른 선반으로 가서 다른 종류를 꺼냈다. 아까보다 약하지만 여전히 박하향이 코 끝에 남았다.


“설마...”


3개 정도 와인을 더 꺼냈다. 착각이 아니었다. 모두 아주 약한 박하향을 머금고 있었다. 

와인 중 몇 개 정도가 네카로 가득채워져 있을거라 생각했다. 조금 전 마시고 온 것도 섞었을 것이라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이 안에 빼곡히 꽂혀 있는 와인은 모두.. 네카가 이미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이 미친놈들.”


그때 누군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 쥐새끼 같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