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자루 Dec 23. 2024

54화 그 남자의 속사정

그때 누군가 이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 쥐새끼 같은..!”





숨을 헉 삼켰다. 몸을 숨겼지만 이미 늦었다. 끝이다.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기왕이면 날다람쥐라고 해주면 좋을텐데요.”


치호의 목소리였다. 김도욱은 나를 향해 소리친 게 아니었다.

치호는 특유의 여유로움을 담고 김도욱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내 눈엔 김도욱의 등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가 불쾌해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날다람쥐?"

"네.“

“거지 같은 이름이네.”

“아저씨도 만만치 않은걸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글쎄요. 문 열고?"


한참이나 어린 녀석이 신경을 긁으니 김도욱도 어지간히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는 굵진한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한 번만 봐준다는 듯 서글서글한 말투로 대적한다.


"여긴 관계자 외 출입금지야.“

“당신은 관계자인가요?”


치호는 김도욱을 향해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김도욱이 얼굴을 구겼다.


“너무 당연한 말을 묻네. 날다람쥐라면서 그것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죠?”

“피험체를 날다람쥐라고 부른걸 내가 모를 것 같았나? 대니스도 요상한 취미가 있지 뭐야. 아니, 그 옆에 있던 계집애였나?”


계집애, 라니. 정황상 수진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치호가 불안정한 눈으로 김도욱을 바라봤다. 김도욱은 자기가 우위를 잡았다는 거만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DM을 캐는 쥐새끼가 너인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제발로 나타나줬다니 다행이네. 1층 무대도 네가 꾸민 거야?”

“네. 비슷해요.”
 “재밌네.”


말뿐 아니라 김도욱이 킥,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어 숨이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와인만 가득 차 있는 지하 3층에 그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조하고 소름 돋는 웃음소리였다. 


“너, 머리가 좋구나? 단순한 사실관계말고 컨텐츠를 이용하는건, 아주 좋은 방법이었어. 사람들 선동하기에도 좋고. 나도 자주 쓰는건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치호는 반신반의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대니스도 그렇고, 큭, 세상엔 은근히 재밌는 인간들이 있단 말이야. 보통은 다들 흔해 빠지고, 지루하잖아. 하..이러면 또 곤란하단 말이지.”


말을 하면서도 계속 큭큭거리던 최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런 위기도 긴장도 없지.”


치호는 어느새 무표정이었다. 


“내 머릿속엔 작은 혹이 있어. 이게 대뇌피질을 건드려서 가끔씩 정신이 나갈 것 같아. 하지만 나름 좋은 점도 있어. 궁금하나?”

“글쎄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할 권리. 그리고 11년 전, 모두 나처럼 만들기에 적합한 약물을 하나 찾았어.”


그 말에 숨이 턱 막혔다. 그 약물이 네카라는 건 더 말할 필요없는 진실이었다. 


“모두 나처럼 될 기회를 주고 싶은 거지. 꽤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당신처럼..되는게 뭔데요?”

“그건 되보면 알아. 아직까지 된 인간은 본 적이 없긴 하지만 말야. 대니스는 너무 이성적이고 딱딱한 인간이야. 제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해. 처음엔 매력적이었는데..이제는 잘 모르겠더라. 그리고,”


치호는 이제 김도욱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김도욱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장난감(사람)을 가지고 노는게 제일 재밌는 법이잖아?”

“미친,”

“미친놈.”


내 입에서 육성으로 나온 욕이 갈무리되기 전, 이미 치호의 입에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뭐, 라고?”

“당신같은 인간이랑 말을 섞었다는 사실 자체가 수치스럽네요.”

순간적으로 김도욱의 말문이 막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아버지를 죽였나요?”

“뭐..그게 무슨 소리,?”

“제가 아무 생각 없이 여기 왔겠어요. 김도욱 대표님. 당신이 김도명을 죽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되면 어떻게 될까.”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너, 더 이상 그 이름 입에 담지마."


김도욱이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한쪽 손으로 머리와 귀를 꽉 감싼 자세였다. 으으, 낮은 신음이 터져 나오고 김도욱은 한 번 더 시끄럽다고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 고요했던 와인창고가 쩌렁쩌렁 울렸다.

김도욱의 반응은 과한 감이 있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마치 얼마 전 최훈이 보였던 모습처럼.


치호는 조금 놀란 얼굴로,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침착한 모습에 되려 내가 놀라고 있었다. 저건 연기인가? 아니면 본모습인가. 

이내 그는 아하, 라며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주먹을 콩 하고 올렸다. 작위적인 몸짓이었지만 김도욱은 치호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요할 정도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거슬리는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

"그 소리 들리세요?"


이번에 눈에 띄게 움찔한 건 김도욱이었다. 


"너도..들려?"


치호는 그저 웃었다. 김도욱의 시선이 불안으로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날 속이지 마.. 난 안 속아. '이 녀석'도 말하고 있어. 네 말은 다 거짓이야. 내가 속을 것 같아?“

"아버지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뒤에 서서 조종하는 게 재밌지 않냐고 말하던가요?"

"하, 한참 잘못 짚었군. 이 녀석은 아버지를 죽이라고 했어. 나보고 친부살해를 하라고 하더군. 내가 그런 미친 소리를 들을 것 같나? 다 이 녀석을 위한 만찬일 뿐이야. 나는 아버지를 살리려 노력했어. 안 그러면 그 녀석한테 잡아먹힐 게 뻔한데, 안 그래?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껍데기일 뿐이야. 그 녀석이 아버지를 잡아먹었어. 그래서 내가 행동하는거야. 내가 맞으니까. 모두가 그 녀석의 소리를 듣고 내가 정상이라는걸 알아야 해. 알지도 못하면서 날 속이려하다니"

"그 와중에도 자신을 속이려고 하는군요."

"뭐?"


치호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당연히 잘못 짚었죠. 저는 그런 소리 안 들리니까. 당신은 그냥 조현병 환자잖아."


김도욱의 숨이 거칠어졌다. 치호가 눈썹을 그러모았다.


“왜 다른 사람을 당신처럼 만들려고 했어요.”


그 말에 깊은 원망과 그보다 더 깊은 허무가 담겨 있었다. 그렇구나. 도명제약의 시작은 김도명이 아니라 그 아버지를 내세운 김도욱이었다. 그런 깨달음과는 별개로 나는 치호의 진심을 마주하고 차마 서 있기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꿈에서 깨실 시간입니다. 김도욱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