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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Dec 27. 2024

56화 내 이름은 최훈 (1)

“환풍구로 가자.”

치호는 천장을 가리켰다. 





나와 치호는 천장 통로를 기어갔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지만 주변은 무척 깜깜했다.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오긴 했지만 치호는 어둠에 취약했다.


“괜찮아?”

“괜찮다니까, 몇 번을 물어.”

“아니 그래도..”

“차라리 이렇게 좁은 공간은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해서 괜찮아. 진짜로.”

“....”

“안 괜찮으면 말할테니까 빨리 가.”

“알았어.”


괜히 타박만 듣고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눈앞에 나가는 출구가 나타났다.


“..근데 이거 안 열려.”

“젠장.”


이어지는 털썩, 하는 소리. 치호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손전등을 그가 있는 쪽으로 비췄다.

그가 바닥에 쓰려져 있었다. 땀범벅인 얼굴에 젖은 머리카락과 흙먼지가 들러붙어 있다. 


“이치호?”

“.....”


괜찮다고 한 건 다 거짓말이었다. 그래. 괜찮을리 없었다. 나는 그를 붙들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할지 생각했지만, 머리가 굳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나가야 해..”


나 때문이다. 지하3층에 있어도 누군가는 찾아왔을 거다. 하지만 빠르게 나가려고 했던 건 나 때문일거다. 내가 이미 중독증세를 보였으니까. 또 아무것도 몰랐다. 


“젠장, 젠장..!”


나는 입구의 흠을 무작정 손톱으로 파내며 힘을 주었다. 얼얼한 아픔이 일었지만 멈출 순 없었다. 치호의 숨소리는 점점 힘이 없어졌다.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이곳을 나가야 했다. 


“젠장!! 여기 사람 있어요!”


그때였다. 사람 하나 통과할 작은 출구에서 철컥 소리가 들리더니 열렸다.


“자네..”


그 앞에 있는 건 최훈이었다. 

지하 2층 룸 한 공간에 도달했는데 최훈이 그곳에 있었다. 

탈진한 치호를 옮기고,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때까지도 최훈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19 좀 불러주세요.”

“그래.”


최훈의 통화가 끝나자 내가 물었다.


“당신도 네카 부작용을 겪고 있어요?”

“그래.”

“수진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거예요.”

“용서받을 그런 파렴치한 생각은 하지 않아.”

“저도요.”

“..그래.”


아까보다 치호의 숨소리가 나아졌다. 이 공간에 최훈과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업고 밖으로 나갈 자세를 취했다. 최훈은 말리지 않았다. 


“그래도.. 제가 네카에 중독되지 않도록 해주신 건,”


최훈이 나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말을 하는 순간 문이 닫혔기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나는 철근처럼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빠르게 지상으로 향했다.          




최훈은 자리를 떠나는 창준을 잡지 못했다. 욕지기를 내뱉으며 일어서서 사라지는 김도욱의 안중에 그는 없었다. 그건 창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뒤편에 물러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고 무대에 서기를 원했고, 주목을 바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항상 중앙 무대에서 제외됐다. 


 최훈이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서른여섯이었고 남자는 스물 여덣이었다.

묘한 분위기의 남자라고 최훈은 생각했다. 편한 옷차림과 달리 남자에게서는 질서가 느껴졌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었고 예의바르다고 세간에서 표현하는 종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딘지 알 수 없는 어색함을 느꼈다.


"메뉴얼 같은 걸 정해놓고 행동하는 편이예요. 하지만 이제 그것도 질렸어.“


남자는 그럴 때 보는사람까지 흥이 식을정도로 참으로 따분한 얼굴을 했다. 

남자와 만난 건 최훈의 본의는 아니었다. 남자는 그가 만나려고 했던 사람의 아들이었다. 만난 당시에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그 흔하디흔한 말을, 최훈이 살면서 가장 낯설게 들었던 것도 그때였다. 인사를 건네는 동시에 우위를 점하고, 네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는 동시에, 얼추 알 것 같다는 그 표정. 말투, 목소리. 사실 최훈은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으로 그 말에 화가 났다. 모로보나 정으로보나 연장자를 대하는 투는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던건 최훈이 가진 독특한 성정이 한몫했다. 화가 난건 사실이었으나 잠시 생각해본 결과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결론내렸다. 서른여섯의 최훈은 대인배였고, 남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이 확연히 넓었다. 그도 자신이 독특하다는 자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자신 같은 사람이 한 둘 있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최훈은 채워지지 않는 지식욕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뭔가 하나 획기적인걸 발견하고 싶었고, 기왕이면 그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고 싶었다. 정말 그렇게 되어서 세계에 알려진다면 뭇 학자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이름을 내어줄 의향도 있었다. 너무나 현실적인 한국사회에서 그런 얘기를 했다가 술자리 안주거리로 삼아지는 경우도 있었다. 괴짜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인 것 같다.


한 번 사는 인생에 남의 눈치 볼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최훈은 그대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다. 뒤탈 없고 막히지 않는 성격 탓에 혼자가 되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 최훈이 교내외 상을 몇 번 받고, 교수님의 촉망을 받는 사이 다시 인간관계가 물밀듯 몰려와도 그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제약내외기록입출입관리부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와 맥락을 나란히 했다. 얼핏 보기에도 중요한 부서는 단지 그것이 전부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지만, 자신이 영향력을 끼쳐 커질 수 있을법한 공간을 탐색했다. 어중간한 회사. 어중간한 부서. 되려 허술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어떤 테두리 안에서 테두리 바깥을 바라본다는 건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판단했다. 최훈은 회사 임원들도 설핏 고개를 갸우뚱하는 부서에 입사를 희망한다고 자기소개서에 아주 명확하게 적어놨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제록부의 일원이 되었다. 과장이란 직함을 다는 데에도 채 3년이 걸리지 않았다. 인생 참 미묘하고 재미없네. 그의 감상은 단지 그 뿐이었다.


그 배양세포를 발견한 게 최훈의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발견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최훈은 질서에 무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배양세포가 가지고 있는 불규칙한 형상에, 질서가 아닌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아, 이거라면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세상을 바꾸는 데엔 이정도 발견 아닌 발견이 필요한 법.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이 행동으로 이어져 최훈은 오리나무로 만든 두껍고 반질반질한 책상에 앉아 고개를 파묻고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그건 꽤 흔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부서의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는 하얀 종이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머릿속 식을 이리굴리고 저리굴리는 사이 뭔가가 나오면 내용을 추려 연구실로 향했다. 


어느정도 이론이 정리되었을 때 최훈에게 닥친 벽은 자금이었다. 


돈이 필요하다. 


이 간단한 명제는 최훈의 머리를 내려쳤다. 풍족하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적당히 맞춰서 살아왔다. 그마저도 취업이후 사무실에 있는 시간이 반수 이상인 그에게 크게 문제되지 않는 일이었다. 회사가 굴러가는 자본. 자본으로 운영되는 사회시스템. 회사는 약력이 산처럼 쌓아올려진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최훈이 내미는 서류에 사인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말인즉슨 그에게 더 이상 이론을 확장시킬만한 자본을 얻을 수 없다는걸 의미했다. 결론은 한가지로 귀결됐다. 결국 그것밖에 없었다.


최훈은 대표이사인 김도명을 직접만나 담판 짓기로 했다.

김도명을 만나기 위해 최훈이 취한 행동은 그가 생각하기에 지극히 예의바르고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는 김도명의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는 별관 17층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 와중에 비서와 경호실장이 나타나 제지했지만 최훈은 막무가내였다. 직원을 패대기치는식의 비인도적 행위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다지도 속수무책으로 대표이사를 본다고 바득거리는 남자를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최훈한테 지고 말았다.

벌컥 열리는 문소리를 들으며-비록 자신이 열었으나-최훈은 고급난이도 게임의 최종장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최종보스는 바로 앞이었고, 무기는 그간의 내용을 정리해놓은 파일하나와 최훈 자신의 화술 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훈은 김도욱을 처음 만났다.

일은 일사불란하게 처리되었다. 정말 이렇게 쉬워도 되나 싶을 만큼 간단했다. 안그래도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없었다며, 제발로 와주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그 이후로 김도욱은 최훈이 생각한 모든 것을 실현시켜주었다. 돈이면 다된다는 뭇 어른들의 말이 최훈의 온몸을 관통했다. 최훈은 호기심 많은 어른이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살짝-이라고 본인은 생각한다-김도욱의 재력을 시험해본적도 있었다. 돈으로 되는 일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정도를 높이는 일은 어느 정도 비인도적인 일을 행하는 것에 비례했다. 처음엔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는데 요건을 제시하고 받아들이는 김도욱의 낯빛이 환했다. 그게 묘한 희열을 가져와서 최훈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담해졌다. 그때마다 김도욱은 더욱 즐거워했다. 최훈의 머리 굴리는 방식에 칭찬을 숨기지 않고 경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진행하겠다 약속해주었다. 그게 거짓말이 아니란 건 최훈이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시행되기 전 그 허가의 제스쳐가 그에겐 큰 성취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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