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니니까 힘내라는 말이라던가, 그조차도 알아서 시간이 흘러가면 괜찮을 거라던지 아니면 아예 그게 뭐가 힘든 건지 이해하지 못했던 사고에 이리저리 치이다 어느 순간 끊어졌을 것이다.
희망이란 것이. 행복이란 것이. 앞으로의 미래라는 것이.
거기까지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였다. 나는 의무감어린 숟가락질을 그만두었다.
그 후로 숱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장례식장을 갔다. 애석하게도 누적되는 횟수 속에 그녀도 잊혀갔다. 누군가 죽고 그의 명복을 바라고 다시, 일상을 살아간다.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다가도 어느 날 생각했다. 이만큼 잔인한 일이 또 있을까. 형식한번 갖추고 돌아서서 잊어버리는 절차를, 그 어수선하고 정리되지 않는 시간을. 그건 고인에게 정말 필요한 일일까.
장례식장을 나오는 길목부터 공기가 바뀌었다. 때는 초겨울이었고 실내는 따뜻한 공기가, 바깥에는 제법 쌀쌀한 공기가 주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가슴 속 응어리를 뚫어줄 것 같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데도 답답했다. 그건 집으로 오는 내내 느낀 감정이었다.
어쩐지 지독한 피로가 몰려들어서 나는 외투를 입은 채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대로 불이 켜지지 않은 칙칙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 변함은 없다. 그 현명함에 너무 의지했던 걸까? 그녀는 발밑이 무너지는 느낌에 괴로워했던 걸까? 그래서 세상을 져버렸나?
그제서야 나는 나를 돌아볼 시간을 가졌다. 이런 사단이 나기 전에, 나는 슬그머니 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뭔가가 이상하다. 성과는 나오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옳은 행동을 한다는, 어딘가에 큰 기여를 한다는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려하지 않는 뭔가가 사실상 본게 아닐까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그녀가 말했던 것이다. 조금 이상해.
나는 그 말을 대충 흘려듣는'척'을 했다. 나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린 말은 본질에 가까웠고 그 영향력이 내 심장을 벌렁이게 했다. 나만 느낀게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자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멈추자고.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차츰 잘 모르겠다, 알아서 하시라. 라는 가벼운 이유로 프로젝트에서 내 이름을 지워갔다. 그렇게 가다보면 내 죄가 없어질거라는-당시엔 죄라고 정의하기 싫은 마음에 속으로도 생각치 않았다-얄팍한 믿음이 있었다. 수진은 내 몫까지 시간을 들였다. 내게 불평불만 한마디 꺼내지 않는 그녀를 의아하게 여겼지만 이 또한 나는 그냥 넘겼다.
우리가 도명제약의 일원으로 있던 마지막 몇 달동안 나와 마주치면 소심하게 놀라던 그녀는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항상 눈을 피하지 않아서 그때마다 조금씩 놀라던 나도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졌다. 우리는 친해져 서로 장난을 친 적도 있었다. 그런 일상적인 일들이 있었다는 깨달음에 나는 침대에서 퉁 하고 튕겨지듯 앉았다. 베시시 웃는 그녀의 눈가. 정말 즐거울 때 그녀의 눈은 반달을 그렸다. 모습만으로 친근함이 전해져오는, 무장해제같은 웃음이었다. 반대로 어둡게 굳은 그녀의 얼굴도 떠올랐다. 주위환경이 순식간에 바뀌던 그 시기의 얼굴. 책상을 정리하고 자료를 경찰에게 제출하고, 소지품 하나하나도 검사를 받고나서야 주섬주섬 챙겨가던 그녀가 정확히 기억났다. 나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이유로 외면했던 그녀의 모습.
스물아홉 죽음을 선택할 만큼 힘들었던 그녀. 이젠 그렇게 짐작하는 것만 가능했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오랜 동료의식으로라도 나만은 알아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문득 이렇게 될걸 내 스스로 알고 있었다고 느꼈다. 대충 넘긴 사소한 일들이 지금을 예견하듯 펼쳐졌다. 알 수 있었는데. 그때 놓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왜 눈치채지 못한건데.
내가 존재했던 세상이 무너지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못했다. 곁에 있던 사람또한 지키지 못했다. 애도하거나 슬퍼할만한 자격이 내게 있나?
어느새 눈 옆이 홧홧해졌다. 우냐고, 네가 울 자격이냐 있냐고. 다른 한구석에서 나 자신을 냉혹하게 채찍하는 시선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창피해하면서도 나는 울었다. 누가 위로해주면 안된다고 외치면서 괜찮다고 말해주길 기다렸다.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마이크를 잡은 그는 말했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마이크를 잡고 서있는 모습이 매우 낯설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더러는 저 미친놈이 저기서 뭐하는 거냐는 강한 분노도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드릴 말씀이 여러분에게 아마 큰 도움이 될 거라서 이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늙은이의 말을 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준비된 듯한 대사를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러 번 혀를 낼름거려 입술을 적셨고, 어디에 시선을 둘지 몰라 동공이 여기서 저기로 튀고 있었다. 그의 말은 진부했고 그 스스로도 말했듯이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정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붙잡았다. 그건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이유였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가릴 의도 없이 넘긴 머리카락 아래로 선명하게 빛을 반사시키고 있는 금색 눈동자였다.
한차례 꺼내서 윤택을 내고 다시 넣어놨다고 해도 믿을 만큼 반지르르한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전보다 유달리 커보였고 사람들은 시력 없는 그 눈동자에 못박혀 쳐다보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유명한 신자와 신도들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얼핏 이런 풍경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자기소개를 했다.
“우선, 저는 날다람쥐2호라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궁금하시죠? 별로 좋은 뜻은 아니지만 저희의 존재를 표현하는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날다람쥐2호 영감님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대체 누가 영감님이 심어놓은 인물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선글라스를 쓴 듬직한 남자가 영감의 신호에 무대 앞에서 뭔가를 조작했다.
지직 거리는 소리가 한번 더 좌중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눈앞에 영상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