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말이 맞아. 하지만.. 그렇게 하는건 불가능해.”
“왜?”
치호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지만 나는 단언했다.
박하향, 이라고 잘 포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네카는 그 자체로도 향이 강하고 역해서 아무런 동의 없이 누군가에게 투약하거나 사용하기 어려운 약물이었다. 심지어 다루기도 까다로워 온도가 조금만 변해도 그 성질이 변질되었다.
와인에 넣는다면, 와인 애호가는 물론 일반인도 쉬이 그 이질감에 알아차릴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전혀 예상 못한 일이었다.
미미하지만 명확한 박하향이었다. 인위적이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레드와인에서 박하향이 나는 건 흔치 않았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내 눈앞 이 차가운 잔 속 술에 네카가 있다고.
침을 꿀꺽 삼키려다 목울대가 보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사람이 당황하면 동공이 흔들린다는데, 이게 두려움인지 흥분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됐다. 어쨌든 평정심은 유지해야 했다.
어느새 김도욱은 잔을 들고 내 옆으로 다가와 친근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참으로 상쾌한 향이 났다. 맑지만 가볍지 않고,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청량감을 머금고 있었다.
덕분에 희미하다 못해 미미한 네카의 향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가리기 위한건가 라는 생각을 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김도욱에게서 나오는 불온한 기운이 나를 툭툭 건들고 있었다.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최훈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술을 마셨다. 이 한잔에 들어있는 네카의 양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면역이 있다는 건가?
그래도 알면서도 모른 척 마시는게 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잔뜩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최훈이 나를 흘끗 보더니 익숙하게 알약 하나를 꺼내먹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던 김도욱이 말했다.
"아, 대니스가 지병이 있어서. 항상 건강 생각에 끔찍하다니까요.“
최훈이 가지고 있는 약은 환각억제제 정도쯤 되려나. 그는 나를 보는 것 같으면서 잠시 내 뒤를 보았다. 지난번 원혼 어쩌고 하는 소리도 그렇고, 그가 환영을 보고 있다는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최훈도 네카 부작용을 겪고 있는 것이었다.
치호도 환영을 보았다. 수진의 환영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고, 어느 순간 선생님이 너무 미웠고 자해까지 했다는 말을 덤덤히 꺼냈을 때, 나는 그와 유진의 병원에 갔을 때 본 왼손의 상처를 떠올렸다.
우리가 앉아있는 테이블은 1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라운지 근처였다. 의자가 조금 높았지만 인기 있는지 젊은 부류가 많았다.
나는 김도욱 눈살에 못 이겨 따라준 와인 한잔을 마시고 포도 한 알을 입 안에 넣고 굴렸다.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지만 무섭도록 차갑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려면 어쩔 수 없었다. 네카의 맛은... 모르겠고 술맛만 났다. 그 오랜 시간동안 향만 맡아보고 양만 가늠해 보았지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권했으면서.
1층을 찬찬히 조망하고 있는데 어떤 반짝임이 있어 그쪽으로 눈이 돌아갔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무더기 속에 느릿느릿하게 자기 자리를 확보하며 서있는 건 날다람쥐2호 영감이었다. 이런데 올 만한 연세는 이미 훌쩍 지나보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빨갛고 파란 불빛 아래 굳건히 서 있었다. 지난날 본 것보다 듬직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눈이 조명 빛을 받을 때,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둔탁한 눈동자에 빛이 감돈다고 할 만한 시점이 있었다. 내가 본 반짝임이 그것이었다. 날다람쥐2호 영감은 그 사실까지는 모르는 듯 했다. 그럴 때 그의 눈은 노란색이 아니라 정말 금색처럼 보였다.
"뭘 그렇게 보나?"
"아."
날다람쥐2호에 눈이 팔려 있다가 김도욱의 날카로운 시선을 잊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바로 내 옆까지 와있었고 나는 막말로 정말 놀랐다. 김도욱은 취한 것 같았지만 취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을 주려 할 뿐이었다. 바로 고개를 돌리고서 별거 아니라고 답했다. 내가 생각해도 변명이 안되는 이유였지만 딱히 해명할 만한 것도 없기에 그대로 있었다.
"한 잔 더 하지."
"아, 그게.."
대답하려는 순간 비명소리가 들렸다.
술과 음악이 오가는 너머로 들린 것 치곤 무서우리만치 생생했다. 놀라면서 동시에 귀가 아파 귀를 틀어막았다. 얼굴을 찡그린 채 그런 행동을 했다는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김도욱과 눈이 마주쳤다. 그도 거슬리는 듯 귀를 살짝 막고 있었다.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웨이터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최훈의 귀에 대고 속닥였다.
그때까지 앉아있던 건 나와 김도욱 뿐이었다. 그는 다리를 꼰 느슨한 자세 그대로였고, 나는 좀 얼어있어서 일어설 타이밍을 놓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치 시켰습니다”
“조치..?”
최훈의 말을 되짚었다. 굳이 더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비명을 질렀던 여자 한 명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몸을 비적거리더니 들것에서 무리하게 일어서 내려왔다. 여자는 비틀비틀 내 앞을 지나갔다. 웨이터가 와서 그녀의 오른팔을 부축했지만 여자가 사납게 그를 내쳤다. 내 발로 갈 거야. 그녀는 마치 여기 앉아있는 모든 사람에게 말하듯 크게 소리치고는 걸어가다 한 번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내쉬고 다시 벌떡 일어섰다. 그 뒤로 여자의 소지품을 든 늙은 남자가 따라왔다. 불안하면서도 안심해하는 표정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래도 되는 건가?
대답을 구하는 표정이었던 모양이다. 김도욱이 말했다.
“종종, 과하게 술을 드시는 분들이 있어서.. 오픈 일부터 이러면 재수가 없는데 말이지.”
그는 놀랍도록 무심하게 말했다. 재수 없다는 말도 의례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문득 최훈이 탁자 아래 손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새파래진 손마디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제서야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비명소리. 여자의 비명소리가 뒤늦게 귓가에 맴돌았다. 여자는 아팠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건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이었다. 하긴 그렇겠지. 쓰러졌는걸. 그런데 다시 일어났잖아. 따라가던 남자는 가족이었을까? 그렇다면 어째서 그런 식으로 당황한 표정이었을까. 주위에 민폐를 끼쳐서 곤란하다는 표정과 쓰러진 여자를 위하기보단 자신의 체면치레에 난감해서 땀을 닦아내던 손동작.
그리고 두 번째 비명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