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네카 투약자들은 괴로워하며 살았다.
“당신은 정말 몰랐지?”
“....”
“처음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 선생님과 일했고, 최훈의 밑에 있었으면서. 정말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모른 척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더 질이 나쁘다고 여겼고.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겠더라. 진짜로.. 몰랐다고. 심지어 최훈과 선생님은 당신을 감쌌잖아. 그들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실형은 면했지.”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최훈과 수진이 나를 대변했다는 건 몰랐었다.
“그래서일까. 당신을 만난 이후로 선생님의 환영은 보이지 않아. 그건 감사해.”
거기까지 말한 치호는 잠시 벤치에 기댔다. 후, 하고 내뱉는 숨이 하얗게 흩어지는 것을 보다 내가 말했다.
“아직도.. 그런식으로 복수하고 싶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
치호는 다시 등을 곧추세웠다.
“네카는 48시간이 지나면 투약 반응을 알 수 없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특성 때문에라도 최훈은 더 많은 실험군에 별다른 부담 없이 투약을 진행했을 것이다.
“DM클럽 11호점 VIP들은 거의 다 중독자일 거야. 마약 같은 거라, 이렇게 몸이 망가지기 전까지는 환영이고 뭐고 좋다고 생각하는 멍청이들도 많거든. 적어도 48시간이 지나기 전에, 투약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해.”
“그래. 그건 내가 확인해 볼게.”
수진의 노트북에는 기존 네카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정확한 제조법만 알면, 투약반응을 확인하는 일은 어럽지 않다.
“나도 그 일기 볼 수 있을까?”
“물론이지.”
나는 일부러 더 크게 말했다. 내심 치호가 그 일기를 읽기를 바랐다.
“일단 수능부터 잘 봐라.”
나는 그가 먹지 않은 엿을 내밀며 말했다. 치호는 잠시 멈칫했다. 피식 웃었다. 그제야 얼굴에 긴장이 사그라들었다.
"누구 덕분에 딱 붙겠네. 아, 입천장에 다 붙었어.“
엿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그가 말했다. 이번엔 내가 웃었다.
DM클럽 11호점 오픈 일에는 눈이 내렸다. 바람은 날카로워도 눅눅한 비 말고는 내린 적이 없던 겨울이었다. 고로 그건 첫눈이었다. 차를 타고 가는 길목, 하얗게 물들어가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해가 바닥에 뜬 것 같았다. 하늘보다 땅이 밝았고, 하얀 눈은 세상의 모든 빛을 구석구석 반사시켰다. 점심이 지나서도 눈은 그치지 않았다. 눈발은 거세졌다 약해졌다 하면서 끊임없이 하늘에서 하얗게 떨어졌다. 오늘이 디데이라는 사실이 소름 돋게 생생하면서도 어딘가 무디게 느껴졌다.
수능이 끝난 날 이치호는 아버지, 할아버지와 식사를 했다. 굉장히 삭막한 풍경이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생각보다 화기애애했던 모양이었다. 그날 처음으로 술을 마시고 뻗었다가 다음날 대낮이 되어서야 연락이 왔다.
"시험은 잘 봤어?"
"평소대로."
너의 평소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모른다고 하자 말해준 점수에 나는 요새 수능이 몇 점 만점인지 물었다. 그 대답을 들고선 말했다.
"엄청 잘봤네. 한 턱 쏴라."
수화기 너머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만 18세로 성인이 되지 못한 치호는 클럽에 들어간다며 위조신분증을 구해왔다. 23살. 이현우. 업데이트 된 명단에 있던 사람이었다. 사진만은 이치호 본인이었다. 이런 건 어디서? 내 질문에 그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오픈일 날은 아무래도 관계자에 포함되는 만큼, 직원들과 이동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해가 지니 기온이 한층 내려갔지만 DM클럽 앞은 사람들로 혼잡했다. 지난번 본 그 헐거운 건물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웅장했다. 풍선으로 만들어 놓은 입구를 통과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양복 입은 남자 둘 중 하나가 빠르고 능숙하게 사람들을 스캔하는 중이었다. 레이더망에 걸렸지만 그는 이내 내 뒤로 시선을 옮겼다.
클럽 내부로 들어가는 순간 시야가 암전됐다. 뒤로 남기고 온 내 구둣발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무수한 소리, 소리, 소리들.
'뭐야 이거'라고 목소리를 냈지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다는 내 생각만 남았다. 클럽 안과 밖의 경계는 극명했다. 그 얇은 문을 두고 이곳은 저곳과 너무나 다른 세계였다.
깜깜한 시야가 오색찬란한 조명에 휩싸인 것도 순식간이었다. 분명히 얼마 전에 공간에 발을 딛고 서 있었는데, 같은 공간이 맞나 싶었다. 내부 공간은 빼곡히 파악해놓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들어서 활기를 띈 이 공간 앞에서 자신감이 수그러들었다. 주변은 어둡고 번쩍번쩍했고,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에 서 찌그러진 공모양으로 만들었다고 최훈이 말한 인테리어만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 나를 비집고 지나갔고, 나도 그 사이에서 어디로든 조금씩 이동했다. 제법 큰 건물이었지만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이게 어떻게 프라이빗 예약제라고 할 수 있을까. 막판에 노선을 바꾼 DM은 당첨 인원수를 급격히 늘렸다. 최종 당첨 된 인원수는 예약인원의 5배였다. 거의 신청만 하면 당첨된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어감이 주는 단정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정신이 혼미했다. 젊은이들은 파랗고 빨간 조명 아래 풀린 눈이었다. 저게 이미 약에 취한건지 술에 취한건지도 판단이 안됐다.
얼마전 구입해 새로 입은 옷만 매정한 대우를 받는 중이었다. 1층에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일정한 패턴으로 네온 빛을 내뿜고 있어서 거기에 시선을 주었다. 계단 아래로부터 늘어선 룸은 비교적 한산해보였다. 계단 초입구에도 양복입은 남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계단 위의 2층도 드문드문 사람이 보였다.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분방하고 살짝 미쳤구나(?) 라는 느낌을 주는 반면 위쪽에 있는 사람들은 여기가 레스토랑이라도 되는 마냥 여유로운 몸짓과 표정이었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을 때 마침 입구근처에 서 있는 치호를 보았다.
괜찮을까? 안그래도 밤이고, 어두운 곳이 쥐약인 그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시선을 위로 옮겼다. 2층.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다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