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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Dec 06. 2024

47화 이제 곧 시작입니다

"난 밤새다 망했거든.“

내 말에 유달리 키득거린다. 시험 전에는 공부만 아니면 다 재미있다고 하더니...얘도 이러나.




들락날락하는 학생 몇이 치호 뒤에 물끄러미 서 있었다. 아. 내가 치호를 쳐다봤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다. 의심하던 사실이 실제라는걸 알게되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나는 치호의 어깨를 잡고 그를 독서실 입구 앞으로 살짝 비켜서게끔 만들었다. 


그제야 눈을 흘기며 지나가는 학생무리를 보고 치호도 상황을 인지한 것 같았다.

우리는 별말 없이 그대로 나와 1분 거리에 있는 공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느리게 걸었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시피 아주 천천히. 나는 그의 걸음걸이에 맞춰 걸었다. 

그새 후드를 눌러쓴 치호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까맣다'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그런 그의 말을 듣고서야 하늘을 봤는데, 실로 까만 밤하늘이었다. 실눈을 떠보니 반짝이는 게 하나 보였지만 유심히 보니 별은 아니었다. 낭만도 없이 그냥 까만 도화지처럼 생긴 하늘이었다.


수능 선물을 산다고 말했을 때 빵집 알바생은 이 아저씨가 조카한테 주는 선물을 고르는가, 자식한테 주는 선물을 고르는가 제 나름대로 가늠해보는 것 같았다. 아마 적당한 가격대를 고르기 위한 세심한 배려와 영업스킬의 일환이었을 테지만 나는 그 예리한 눈썰미가 탐탁지 않았다. 이봐 학생 내 딸은 겨우 다섯 살이라고. 생각만 했던 과거와 달리 나는 입 밖으로 내뱉기 직전까지 갔다가 입을 다물었다. 뻔뻔해지기 때문에 나이를 먹는가, 나이를 먹기 때문에 뻔뻔해지나. 아직은 꼰대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노력했다. 그 노력해야 될 목록이 갈수록 늘어나는 걸 보면, 그 길로 가고 있기는 한가 보다.


마찬가지로 수능을 앞둔 이치호 앞에서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수진을 향해 동경과 애정의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증오의 마음까지 있다는 사실도. 나 역시 그 증오의 대상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사실도.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채로, 여기까지 왔다. 

공원벤치에 앉아서 잠시 서로 말이 없었다. 먼저 말을 붙여볼까 생각했지만 그저 기다렸다. 지금은, 뭘 해도 치호가 먼저 말하고 나는 듣는 게 맞는 일이라고 느껴졌다.


여전히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왠지, 오늘따라 유달리 목소리가 크더라니.”


그랬나?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잘 못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언제부터 알았어?”


치호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한없이 덤덤했고, 그저 올 때를 기다린 나이 든 노인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얼마 안 됐어. 수진의 일기를 봤거든.”

“선생님 일기?”

“응.”


나는 천천히, 하지만 목소리를 평소보다 키워가며 치호가 알아듣기 쉽게 지금까지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치호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어느새 내리깐 눈이 제 발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언제부터 그랬어? 지금은. 치료방법 같은 건.. 없는 건가?”


해가 지면, 그러니까 태양빛이 현저히 적어진 환경에서 이치호는 모든 감각이 둔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하지만 그건 수년전 어린아이에게 발생한 현상이다. 수진이 알고 있는 내용과 지금은 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내가 물었다. 


“하하. 우리 집 잘사는 건 알지?”


많은 걸 함축하고 있는 그 말에 말문이 막혔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은 해봤다고 봐도 무방해. 다행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나아진다는 점? 어릴 때는 해가 지면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어. 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고, 잘 느껴지지 않으니까. 몸이라는 감옥에 정신이 갇혀있는 것 같았거든.”

“....”

“그렇게 불쌍하게 보지 말아줄래? 나 수험생이라 지금 예민한 상태거든.”

“아, 미안.”


이번엔 치호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일자로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본다. 나는 그 의중을 몰라 뭐 더 잘못했냐고 역으로 물었다.


“아니.”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진짜 이상한 어른이야.”

“아하하. 그 얘기는 너한테만 여러 번 듣는 것 같다..?”

“진짜 이상해.”

“그래그래.”


치호는 다시 입을 닫는다. 그대로 가만히 허공을 바라본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할거라고 생각한다. 그 예상은, 감이 좋지 않은 나답지 않게 잘 맞아떨어진다. 


“나 사실은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 당신한테도 복수하고 싶었어. 그래서 명단도 달라고 한거야. DM에선 그 약을 아직 사람한테 쓰려고 하니까. 그러니 당해보라고.”

“....”

“직간접적으로 연관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으로 투약하려고 했어. 그들이 약점을 쥐고 흔든다면 안될 것도 없지. 그냥 그렇게 하려고 했어. 그게 맞을 것 같았어. 나도 모른 채로 당했어.”


치호는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담고 있는 뜻보다, 그렇게 마음먹기까지 그가 느낀 감정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는 사실에 속이 답답해진다.


“미안하다. 난.. 아니, 미안.”


아무것도 몰랐다는 말도 변명이었고 미안하다는 말도 변명이었다. 수진의 몫까지 사과한다고 해서 치호가 낫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 앞에서,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생님의 환영이 보여. 나한테 매번 용서해달라고 해.”


숙인 고개가 절로 들렸다. 치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도 그것이 보이나?’ 그렇게 묻던 최훈의 말. 그저 헛소리로 넘긴 그 말이 꼬리처럼 달라붙는다.


“환영도 부작용인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나타나는 건 다른 것 같지만.”


환영. 해가 지면 감각이 둔화되는 현상. 시력을 상실하고 노란색으로 변해버린 눈동자.

도명제약은 9년 전 그날 이후 무너졌지만 법적으로 도명의 파산에 네카가 있던 건 아니었다.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으니까. 원래도 지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 네카를 투약으로 인해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네카 투약자들은 괴로워하며 살았다.


“당신은 정말 몰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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