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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자루 Dec 02. 2024

45화 복수라는 독, 복수라는 약

‘왜 날다람쥐야?’

나는 그제야 날다람쥐가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되었다.

치호가 네카의 첫 번째 피해자였다. 그것도 수진에 의해서 말이다.




‘약과 독 사이에서 그건 독이 되어가고 있다’     


수진은 죄악감에 시달렸다. 최훈을 좋아했지만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보기 힘들어했다. 그건 수진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일에 휘말리게 한 것도 모자라 자신과 관계 없는 사람들을 알면서도 이용한다는 사실을 치가 떨리도록 혐오했다. 


혹시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그 사람이 좋은 결과를 내면 그간 피해받은 모든 피해자를 구제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있었다.      


‘김도욱에게 찾아갔다. 당장 이 실험을 중단해야한다고. 지금까지 약물을 투여한 모든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해야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내게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하지? 사람을 벌레보듯 쳐다보는 남자가 이 판을 짰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린다. 내가 노려보니 그가 말한다. 나는 모두 나처럼 잘되길 바랄 뿐이야.’     

김도욱. 김도명의 첫째아들이다. 김도명의 뒤에 김도욱이 있었다. 나는 그것도 몰랐다.      

그녀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나를 증오합니다. 미안합니다. 비겁하지만 혼자 편해질게요.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리고 도명제약에 대한 모든 법적 근거가 되는 문서가 남아 있었다. 연구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대상자들의 신원과 몇차까지 시약이 진행된건지, 그로인해 발생할 수 있을법한 경과에 대한 예상치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수사과정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던 부분도 포함해서 말이다. 네카의 부작용 중 가장 대표적인게 환각과 환영에 시달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보이냐’며, 시선을 이상하게 두고 중얼거리던 최훈을 떠올렸다. 

무력하고 바보 같았던 나. 나는 수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나를 찾아온 치호를 보고서도 여전히 그 시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있었다.


치호는 수진을 위해 움직인 게 아니었다. 그는 수진과 나를, 도명제약을 증오하고 있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하고 싶었다.

수진을 기억하고, 그녀의 환영이 나타난 순간부터 치호는 다짐했다. 그들에게 복수하겠다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의 인생을 시작부터 망쳐놓은 것이라고.


수진을 잊고 산 기억은 치호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녀를 기억하고나서 치호의 부작용은 전보다 심해졌다. 해가 지면 눈이 어두워졌다. 그 다음에는 소리. 그리고 촉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이 뭉근해진다. 물속에 가라앉아서 세상을 보는 것마냥 불투명했다.


밤이 되면 누군가 자신을 감싸고 막하나를 둘러놓은 것 같았다.

우습게도 그럴 때마다 수진이 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눈물나도록 그리웠다. 6개월. 타인에게서 조건없는 애정을 받았던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정말 짧은 순간. 


왜 나한테 잘해준걸까. 결국 실험용 생쥐로 쓰기 위해서였나.

그를 둘러싼 모든게 뭉근해지면, 생각은 벼린 것처럼 날카로워졌다. 치호는 수많은 밤을, 자신이 수진을 미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세상에 없어진 그녀를 그리워하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답은 알 수 없었다.     


망가진 사람은 보기가 거북하다.


치호는 멍하니 숨만 쉬는 듯한 창준을 일주일 정도 지켜봤다. 섣불리 다가가봤자 들리지 않을 소리와 말도 있었다. 그의 눈은 공허했고, 이따금 끔뻑거렸으나 울지는 않았다. 무척 슬퍼보였는데, 그만큼 깊어서 그 끝에 있는 감정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그의 인중에 산발해 있었다. 그래도 밖으로 나온다고 노숙자처럼 기름진 머리나 빨지도 않은 옷을 입고 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실 때 만큼은 그도 편해보였다. 한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다 한참 후 아마 식었을 커피를 다시 음미하며 들이킬 때. 엄청 지루한 풍경이었지만 한 삼 일쯤 보고 있으려니 그에게 이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 했는데 없었을 뿐이라고. 


주말에는 몰래 지켜보느라 치호도 덩달아 카페에 죽치고 앉아있었다. 카페 사장은 다 알면서도 적당한 흥미만 내비치며 묻지도 않고 그에게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었다. 


대니스 최와 신창준.

DM의 대니스 최를 만나고 나서 신창준은 회사에서 쫓겨났다. 왜?

어차피 창준이 그 회사에 남아있지 않을거라면, DM쪽으로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었다. 치호는 헤드헌터를 가장해 이력서와 파일을 위조하던 도중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이미 대니스가 창준을 DM에 영입하려고 수를 써놨다. 그건 또 왜? 


정확한 인과관계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었다. 대니스 최의 한국이름은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프랑스 유학절차를 밟았으니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을 것이었다. 하지만 기록은 깔끔했다. 쓸데없이 하얀 백지너머로 어떤 낙서를 숨기고 있기에.


그는 의심부터 작동하는 사고방식을 부정하지 않고 그 속에서 올라오는 찜찜함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해볼수도 있었다. 대니스최와 신창준은 구면이다. 그리고 수진과도 연관이 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결국 치호의 예상은 적중했다. 그걸 창준이 스스로 말해줄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치호는 이 주가 지나기 전에 창준의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놀란 듯 보였다. 맨날 근처에 배회한데다 나중엔 화장실도 편하게 왔다 갔다 했는데, 저렇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는 게 신선할 정도였다. 


중심을 들먹일 수밖에 없었다. 신윤주는 그의 또 다른 중심이었다. 그가 치호를 미워한데도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는 모든 게 멈출 터였다. 미움받는데는 익숙하다. 치호는 호의보다 저를 향한 서슬 퍼런 눈에 익숙했다. 인터넷으로 잡다한 정보상 역할을 하면서도 많이 받은 대우였다. 창준과 두 번째로 만난 날 병원에서 만난 그 의사 선생님의 얼굴. 대충 그 정도가 치호의 기본값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카페 한구석의 정물처럼 앉아있던 남자는 살아났고, 치호의 제안에 고민했으나 받아들였다. 게다가 그를 미워하지도 않았다. 

선생님은 창준을 믿었다. 그걸 이해할 수 없었던 시기를 지나 창준이 제 앞에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은 존중하지만 자신이 이해하는 건 다른 영역이었다. 하지만, 


“해볼게.”


억지로 웃으려는 어색한 표정은 마치 태어나 처음 웃는 사람처럼 삐걱거렸다. 치호는 그 얼굴을 보며 선생님이 왜 이 남자를 믿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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