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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HARU Jun 11. 2021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닌다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6시간, 방콕 카오산로드에서 밤 버스를 타고 8시간을 달려 이튿날 이른 새벽 춤폰 선착장에 도착했다. 페리를 타고 두어 시간 더 달리면 나의 섬에 다다른다. 두 나라를 잇는 비행시간보다 한 나라에서 작은 외딴섬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만,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꼬따오는 짧은 여행 일정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섬이 되었고, 그래서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들만 모일 수 있는 섬이 되었다. 


워낙 외딴곳이라 꼬따오를 모르는 태국인도 많다. 태국 남동부 어부들이 풍랑을 피해 잠시 쉬어가던 곳, 그리고 죄인의 유배지로도 쓰인 외딴섬 꼬따오에 여행자의 발길이 닿기 시작한 건 불과 20여 년 전인 1990년대 말. 여행과 탐험을 좋아하는 유러피언들이 가장 먼저 이 섬에 들어왔고 2000년대 넘어서야 꼬따오 이웃 섬 코사무이가 신혼여행지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일본, 한국, 중국인이 뒤를 이었다. 여전히 미국인, 영국인, 유러피언들은 자기 몸보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동남아시아 장기 여행 목적지에 꼬따오를 넣지만, 아시아인은 캐리어에 비치 드레스와 리조트룩을 챙겨 휴양을 위해 코사무이로 향한다. 이들에게 꼬따오는 코사무이 패키지여행에 하루 일정으로 끼어 있는 정도지만, 꼬따오는 대규모 관광지인 코사무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을 품은 보석 같은 섬이다. 


일본 이시가키섬에서의 체험 다이빙을 통해 바닷속 세상에 빠진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다이빙하고, 먹고, 자는 게 전부인 섬, 들어가는 여정이 그렇게 곤욕이라는 섬, ‘다이버의 성지’이자 ‘다이빙의 메카’라는 꼬따오를 목적지로 삼았다.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태국이라곤 방콕과 푸껫 여행이 전부였던 나는 꼬따오의 고립에 가까운 지리학적 위치와 그 섬을 채운 유러피언이 만들어 내는 커뮤니티의 분위기에 이끌렸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섬에 이미 여러 번 가본 듯한 느낌. 설명하기 어려운 호기심과 매력에 홀렸다. 도망칠 용기를 내자,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처음 마음먹기가 힘들지, 이후론 일사천리다. 꼬따오라는 섬이 나와 맞지 않으면 다시 돌아 나오면 그만이고, 또 다른 여정을 시작하면 되는 거였다.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며 도착한 섬,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해변으로 나섰다. 고가의 브랜드 로고가 보란 듯이 박힌 비치 드레스를 입는다면 이 섬의 모든 사람이 희한하다고 여기며 쳐다볼 분위기. 태양을 맞이하러 온 이곳엔 래시가드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허여멀겋게 선크림 범벅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변엔 팬시한 비치 체어도, 오색찬란한 파라솔도 없다. 한국인, 중국인을 비롯한 동양인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휴가를 보내면서도 끊임없이 남들에게 비치는 자신을 의식해야 하는 가련한 우리들. 이 섬은 내가 날아온 비행시간의 두 배는 더 걸렸을 유러피언이 대부분인데, 이들은 겉치레가 없다. 그저 여행 목적에 충실할 뿐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그저 발가벗고 태양과 바다 그대로를 온전히 자연스럽게 즐긴다. 꼬따오는 가식이 없는 섬이다.


꼬따오와 정반대 분위기를 가진 곳은 필리핀 보라카이 섬이었다. 나를 바닷속 세상에 눈뜨게 해 준 첫 안내자, 스쿠버 강사 벤자민이 일 년의 반을 보내는 곳. 일본에서 만났던 우리는 다음 해 보라카이에서 조우해 다이빙을 함께 했다. 선셋 무렵 해변에 나가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한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대부분 아시안이었다. 어떤 이는 모래사장에서 하이힐을 신고는 푹푹 빠지는 걸음에 당황했다. 해변 앞에 늘어선 고급 리조트를 배경으로 반대편 하늘에 펼쳐진 자연의 선셋 쇼를 두고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이한 패션쇼장이었다. 벤자민은 나에게 왜 한국, 중국, 일본인은 트로피컬 아일랜드에 와서 땀 뻘뻘 흘려 다 번질 메이크업을 하고 비싼 옷을 입고 꾸미느냐고 물었다. 도시에서 하던 겉치장을 안 하려고 이곳에 휴가를 온 거 아니냐고. 나는 답했다. 우리는 휴가를 온 게 아니라 이곳에 올 자격을 갖췄음을 증명하기 위해 온 거라고. 내가 “우리”라 표현한 이유는 나 역시 그런 무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중이기도 했다. 


다음 날 카이트 서핑을 하러 섬 반대편 해변으로 갔다. 보라카이 섬 원주민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서쪽 해변에 비해 개발이 덜 되고 낙후된 지역이었다. 섬 주인인 사람들이 선셋이 장관인 서쪽 해변을 섬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에게 빼앗기며 이곳으로 밀려난 것이다. 돈이 없어서였다. 멕시코 휴양지 칸쿤 해변도 마찬가지였다. 하룻밤에 백만 원이 훌쩍 넘는 값비싼 리조트가 해변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높은 벽을 쌓았다. 지척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지만 내가 그리도 좋아하는 바다를 보긴 힘들었다. 나 역시 돈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꼬따오는 다르다. 현지인과 여행자, 모두 한데 섞여 해가 질 무렵이면 해변에 나와 매직 아워를 즐기며 하루를 마감한다. 어린아이는 개와 뛰어놀고 젊은 연인은 선셋을 배경으로 바다 수영을 즐긴다.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아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작은 섬의 아름다운 해변과 선셋은 그래서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고 평화롭다.


나는 이 섬에서 소속이 없는 여자다. 명함이 없다는 건 경제적 불안정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나를 소개하는 수식어를 오롯이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자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 섬에선 아무도 나를 몰랐다. 누구에게도 나의 가치를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내 존재만으로 환영받고 존중받는 곳이다. 서로 이름만 부르니 서로 나이를 알 필요도, 상하 관계를 정리할 필요도, 호칭을 정리할 필요도, 텃세 부리며 힘자랑할 일도, 가식을 떨 이유도 없다. 누구도 술을 억지로 권하지 않는다. 각자 원하는 만큼 마시면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다 집에 가고 싶을 땐 언제든 눈치 안 보고 가면 된다. 이곳 사람들은 함께 나누는 시간만큼 서로의 프라이빗한 시간을 존중한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건 내가 원하면 언제든 다이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닷속을 떠다니다 뭍으로 올라와 작은 섬에서 잠시 쉬고, 다음 날이면 또 바닷속을 헤매다 작은 섬에서 쉬고. 하루에 서너 시간 이상은 바닷물이 내 몸을 감싸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며 내 몸이 바다가 되어 간다. 도시의 소음에서 해방되는 대신 온갖 새소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가 내 일상을 채운다. 건물이 낮아 어디서든 해와 달과 별, 구름을 즐길 수 있다. 서울에서처럼 빼곡히 들어선 고층 빌딩에 가려진 반쪽짜리 하늘을 보며 하늘의 구름 모양을 상상할 필요가 없다. 빛 공해가 없어 밤하늘에 가득한 별과 달을 보며 잠이 든다. 도시에 살 때 내가 느꼈던 것보다 자연은 훨씬 가까이 있다. 도시에서 오랜 시간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며 살았다. 자연과 멀리 살아 그리도 나는 음악과 영화에 집착하며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섬에 온 이후로 일부러 음악을 찾아 듣거나 시간을 죽이려 영화를 찾아보지 않는다. 내 일상은 바다와 하늘과 우거진 정글로 이미 충만했다. 환절기면 찾아오던 비염도, 스트레스로 달고 살던 편두통과 불면증, 아토피도 사라졌다. 그렇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삶이다.


한국에서 대학 입학은 곧 취업 준비로 이어진다. 대부분 사무실에 앉아 머리로 일하는 자기 모습을 상상한다. 나 역시 그랬다. 대학에 간다는 건 꼭두새벽 냄새나는 쓰레기를 치우는 미화원이 되지 않는다거나, 공사장 일용직이 되지 않을 거란 보증수표를 받는다는 의미였다. 사회의 가식과 역겨움이 깊숙이 배어있다. 나는 대학 졸업 후 홍대 클럽에서 최저 시급이나 노동 환경 따윈 가볍게 무시하는 환경에서 오래 일했다. 내 일생 통틀어 4대 보험과 퇴직금이 보장되는 회사에 다닌 건 메이저 패션지 <아레나 옴므 플러스>에서의 몇 년뿐이다. 세금 걷는 걸 좋아하는 정부에 나는 그리 맘에 들지 않는 시민이다. 시간이 지나 이제 다이빙으로 돈을 번다. 4대 보험, 퇴직금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아프기라도 해 다이빙을 못 가면 그만큼 수입도 없다. 몸을 움직인 만큼 대가를 받는 외국인 일용직 노동자로서 나는 노동의 가치와 신성함에 몸과 마음을 낮췄다. 가끔 꼬따오에 온 한국인이 다이빙 강사를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가 있다. ‘몸으로 하는 일’을 한국인은 유난히 경시한다. 역겹다. 내가 대학을 나오고 한국에서 나름 잘 나가는 잡지사 에디터였다는 걸 알면 그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그게 더 역겹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각각 하나의 섬이다. 섬처럼 따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때론 같이 모여 서로 기대고 쉬어가는 또 다른 섬을 만든다. 나는 이곳을 ‘도망자들의 섬’이라 부른다. 나처럼 자신이 속했던 사회에 신물 난 사람들이 도망쳐온 곳이다. 우리 모두 어떤 곳에서 각자 어떤 식으로든 ‘아웃사이더’였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 이 나라 출신이 아니고, 모두 제각각 인생의 또 다른 챕터를 찾아온 사람들이기에 기본적으로 조심스럽고 겸손한 태도를 지녔다. 온몸에 문신과 피어싱으로 가득한 육십 대 이탈리안 아저씨가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과 인생의 모험과 경험을 나눈다. 자신이 더 오래 살았다고 해서 더 많이 알고 옳다고 고집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풍경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은 맛있는 피자를 굽고, 멕시코에서 온 사람은 타코를 만들고, 프랑스에서 온 사람은 멋진 와인을 판다. 그래서 이 섬엔 맥도널드도, 피자헛도, 스타벅스도 없다. 먹고살기 바빠 남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없다는 핑계는 이곳에선 통하지 않는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기부금을 모아 유기 동물을 돕는 애니멀 클리닉을 후원하고, 꼬따오 구조대 활동을 돕는다. 가족, 친구, 연인, 사회, 세계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나는 이 섬의 커뮤니티를 통해 회복했다.


30년 훌쩍 넘게 한국에서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말을 신념처럼 따르며 안간힘을 쓰고 살았는데, 이곳에선 그 나쁜 버릇을 버리는 법을 배우며 살고 있다. 안 되는 게 있다. 안 되는 건 그냥 두는 게 맞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면 죄의식이 느껴지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나는, 하루를 비워 나에게 충만하게 썼다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창출한 거라 생각을 바꿨다. ‘안 될 거야’라는 말만 듣고 살아온 어린 시절, 피아노, 진학, 유학, 여행 등 모든 것의 ‘안 되는’ 이유는 돈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독버섯처럼 피어난 돈에 대한 복종심과 열등감이 내 삶에서 지분을 넓혀갔다. 이 섬에선 잘 사나 못 사나 티셔츠에 플리플랍 하나만으로 족하다. 섬을 통틀어 신호등 하나 없고, 스쿠터로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시속 40킬로미터라 페라리로 으스댈 수도 없어 부자가 좋아하는 섬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돈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나며 나는 과연 무엇으로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죽어라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끝없이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꼭 누굴 밟고 올라서지 않아도, 1등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삶, 나 자신 그대로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는 삶. 아, 그렇구나, 삶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구나. 


이 섬엔 각자의 나라에서 한때 잘 나가던 CEO에 엔지니어에 의사에 회계사에 비즈니스맨이었던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곳에선 모두 그저 하루하루 삶을 축복하고 기념하는 사람들 중 하나다. 이들의 삶의 태도에서 나는 배울 게 많았다. 이른 아침 일어나 바다에 빠져든다. 그리고 뭍으로 올라와 선셋을 보며 맥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게 일상이 되어간다는 행복과 설렘,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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