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u Jun 16. 2021

타국 외딴섬의 외국인 노동자


내가 떠난 한국은, 그리고 세상은 나 없이 잘만 돌아간다. 물론 이 세상은 나 없으면 안 되는 줄 착각하던 때도 있었다. 조직과 사회에서 내 역할은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걸 인정하긴 힘들었다. 인정하면 뒤처지지 않을까 불안해 위태롭게 붙잡고만 있었다. 놓는 건 한순간인데, 그 순간을 위한 담금질이 오래 걸렸다. 알고 있던 걸 막상 행동으로 옮기고 나니 당혹스럽다. 나 없이 잘만 돌아가는 세상이 얄밉기까지 하다. 괜한 짓을 했나 후회도 된다. 나는, 이제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나. 에라,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나 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니 세상에 빚진 사람 같던 삶의 태도에서부터 일단 벗어나 보자. 내가 사실은 별거 아닌 존재라는 것, 지금까지 늘 부정하고 외면하려고만 했던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내 안에 무겁게 버티고 있던 자존심을 벗어던지고서야 나는 가벼워졌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존재든 될 수 있다는 더 큰 자유를 의미했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자존감으로 충만해졌다. 


이 섬에서 명함이 없는 나는 생물학적 출신까지 숨길 순 없다. 나의 피부색과 눈동자, 머리카락이 말해주는 국적과 출신지. 해외에서 한국인의 포지셔닝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디쯤이다. 예전 푸껫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공항에서였다. 공항 활주로에 작은 화재가 났고, 그로 인해 푸껫 발 인천행 비행기는 기약 없이 지연됐다. 중국인들은 한데 모여 공항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며 떠들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깔고 앉고 누울 만한 종이 상자를 구하러 다녔다. 그리고 항공사 직원에게 수시로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하며 기민하게 대응했다. 이 광경이 한눈에 들어오니 재미있었다.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기 좋아하는 에디터 출신인 나는, 자신이 나고 자란 사회와 문화, 국민성이라는 건 참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화장실에 가려는데 가려진 복도 안쪽 공간에 일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조용히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 모습이었다. 그렇다. 한국인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디쯤이다. 이 섬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인들은 어디서든 가장 큰 그룹을 이뤄 목소리를 드높인다. 한국인은 커뮤니티 안에서도 서로 편을 갈라 끼리끼리 어울린다. 일본인들은 있는지 없는지도 표가 안 나는데, 가장 힘 있고 단단한 커뮤니티를 가장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한국에 지쳐 한국에서 도망쳐왔다고 하더라도 세상 어딜 가든 내가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내가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내가 태어나 자란 문화와 정서가 결국 그걸 드러낸다. 


의도치 않게 여러 가지 이유로 나는 이 섬에서 한국인 커뮤니티를 멀리하고 유러피안 커뮤니티에 속하게 되었다. 나의 갈색 눈과 검은 머리처럼 내가 가진 문화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크고 작은 스파크를 일으켰다. 항상 만나면 “밥 먹었어?”를 인사말로 묻는 한국 사회. 이걸 영어로 직역해 물으면 외국 친구들은 대부분 내가 데이트 신청하는 줄 안다. 밥을 굶던 가난한 시절에서 유래된 한국 사회의 “밥 먹었어?”라는 인사말을 이 친구들은 “밥 안 먹었으면 나랑 같이 밥 먹을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밥 먹었는지를 챙겨 묻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묻지 않아도 되는 나라들이다. 무엇이든 나눠 먹는 문화가 일상인 나는 “이거 먹어볼래?” 하고 식사 자리에서 몇 번 내 음식을 권했다가, 깜짝 놀라는 친구의 반응에 어리둥절했다. 이 친구들은 자기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내 음식, 남의 음식, 철저하다. 한 상에 둘러앉아 찌개 냄비 하나를 두고 여럿이 숟가락 담그는 식문화를 가지지 않은 친구들과 식사하는 게 나 역시 한동안 불편하고 조심스러웠다. 이들은 ‘쏜다’는 개념도 없다. 내 생일에 모두 모인 친구들은 내가 저녁값을 모두 치르려 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렸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들은 ‘더치페이’다. 이제 나는 이게 더 익숙하다. 


아무리 외딴 작은 섬이라 해도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다. 당연히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출신 국가의 권력으로 갑질 하는 막돼먹은 친구들도 이따금 마주한다. 내 완벽하지 않은 영어를 가지고 농담하는 영어권 친구들 때문에 초반엔 기가 죽어 말을 잘 안 했다. 사람들은 내가 부끄럼 많고 말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한국에서 말과 글을 가지고 놀던 사람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 잘못이 아니다. 모국어인 영어만으로 전 세계 어딜 가도 의사소통이 되는 나라,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를 건설한 탓에 영어를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한 나라, 그들에게 들리는 내 영어가 원어민 같지 않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긴 그들의 나라도 아닌, 나의 나라도 아닌 태국이며, 여기에서도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고 으스대는 건 총칼을 사랑하는 호전적인 나라의 후손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생각을 고쳐먹은 후론 내가 가끔 어색한 표현을 쓰거나 이상하게 발음하면 놀리는 친구들에게 “내 모국어는 한국어고, 영어는 제2외국어야. 내가 한국어를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잘하는지 알려줄 수 없어 안타깝다. 너희들이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할 수 있었다면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데” 하고 쏘아붙인다. 한편, 하루하루 영어만 쓰며 살다 보니 갑자기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어휘력이 줄어든 걸 느낀다. 그래도 미드를 그렇게 열심히 본 덕에 어학연수, 유학 한 번 안 가본 내가 이렇게 타국에서 영어로 다이빙 가르치며 먹고살고 있다. 


웨스턴 친구들과 일상을 함께 하니 하루에도 내 이름이 수십 번씩 불린다. 평생 내 이름이 타인에 의해 이렇게 많이 불린 적이 있나 싶다. 한국은 대화할 때도 이름을 잘 부르지 않는다. 특히 단둘이 대화할 땐, 더 그렇다. 웨스턴 친구들은 문장 끝마다 이름을 붙인다. 언니, 오빠, 선생님, 선배 같은 호칭 정리 없이 서로 이름만 부르다 보니 아이가 있는 엄마도 한국에선 ‘OO 엄마’로 불리는 게 더 잦지만, 서구권에선 여전히 엄마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름이 자주 불리는 게 사는 데 무척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에 있는, 이제는 대부분 아이 엄마가 된 또래 친구들은 제 이름보다 ‘OO 엄마’로 불린다. 한 번은 친구와 커피를 마시는데 자신의 이름이 없어진 것 같다며 흐느껴 울었다. 단지 이름 때문만이 아니었다. 육아로 인한 스트레스, 출산 휴가가 육아 휴직이 되고, 결국 퇴직이 되어버린 현실, 모든 걸 자신에게 떠맡기는 남편에 대한 안타까움 등 많은 감정과 회한과 두려움이 겹친 것이다. 이후로 나는 이 섬에서 만난 한국 엄마들에게도 ‘OO 엄마’ 대신 ‘OO 씨’ 하고, 의도적으로 그들이 가진 이름을 불렀다. 


순전히 다이빙이 좋아서, 한국을 떠나 들어온 타국의 이 아름다운 외딴 작은 섬에서 결국 나는 다이빙으로 먹고사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다. 한국이라는 국적과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지고 파란 눈에 금발 머리, 나보다 평균 체형이 훨씬 더 큰 친구들을 리드하며 영어로 다이빙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짐을 싸서 한국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했다.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모두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길 바란다. 아니,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권에선 태어나 자라면서 받는 모든 교육에 백인의 우월함이 알게 모르게 숨겨져 있다. 코스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교육생들의 의심 어린 눈초리가 쏟아진다. 동양인에 여자, 왜소한 체구, 쟤가 우리 강사라고? 말만 않지, 얼굴에 다들 쓰여있다.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한다. 심리적으로 위축되지만 ‘내가 생각해도 나는, 꽤 괜찮은 다이빙 강사다’ 주문을 외운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다이빙 코스 교육이 시작된다. 이론 수업, 수영장 교육, 바다 교육, 자신들이 직접 다이빙을 해보고 이게 얼마나 쉽지 않은 건지 알게 되면서, 그들의 눈빛이, 그리고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변한다. 친구들은 각각의 장단점을 빠르게 캐치하고 대응하며, 안전을 지키고 카리스마 있게 리드하는 나에게 존경을 표한다. 웨스턴 친구들은 이게 좋다. 아무리 고고하고 난 체하는 문화를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고 해도, 일단 상대방이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깔끔하게 인정한다. 재미있고 모순되게도, 한국어가 모국어인 내가 영어로 외국인들에게 다이빙을 가르친다고 할 때 ‘안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국인뿐이었다. 나 역시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영어가 모국어인 친구들의 응원과 도움, 그리고 ‘Why Not?’이라는 질문이 결국 이 모든 걸 가능케 했다. 그로 인해 나는 이 작고 아름다운 외딴섬에서 전 세계에서 모여드는 여행자들과 그들이 가져온 문화와 정서, 이상과 철학을 배우고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됐다. 


이 작고 외딴 외국 섬에서의 모든 시간과 경험은 ‘소수자’ ‘약자’에 대한 각성제다. 나는 한국에서 사는 내내 ‘다수자’ ‘강자’에 속하진 않아도 ‘소수자’ ‘약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오만하고 그릇된 생각이었다.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소수자’이자 ‘약자’다. 자신의 나라도 아닌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인종차별 폭력을 휘두르는 또 다른 외국인들을 통해 나는 역으로 겸손과 관용을 깨우쳤다. 자연스럽게 나는 동양인으로서 서구 문화에 갖고 있던 열등감에서 점차 벗어나게 됐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한국인으로서 내가 나고 자란 문화의 영향이다. 어릴 때부터 미국은 꿈의 나라요, 유럽은 우리보다 월등하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우리가 따라야 할 선진국이라 배웠다. 그래서인가, 미국과 유럽은 선망, 그 자체다. 반대로 동남아 국가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겐 무심과 차별과 혐오를 마음껏 퍼붓는다. 이 섬에서 타국의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오며 그동안 한국에서 나 역시 알게 모르게 교육받아 체득한 우월감과 열등감, 어리석은 고정관념을 많이 씻어냈다.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 영향을 주며 배우고 나아가는, 그저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4대 보험은커녕 유급 휴가도, 생리 휴가도 없는 다이빙 산업계에서 동양인 여자로 일 한다는 건 보기엔 멋져 보이지만 그만큼 희생하고 감내해야 할 것이 많다. 다이빙을 하는 만큼, 코스를 가르치는 만큼 수입이 생기기 때문에 아파서 하루 쉬면 그만큼 못 버는 거다. 아파도 참고 다이빙을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만 늘 그렇다. 웨스턴 친구들은 손가락에 조그만 상처만 나도 쉰다. 감기에 걸리거나 조금이라도 피곤하거나, 심지어 숙취에 시달릴 때도 쉬어버린다. 한국 사회의 조직이라면 자신을 희생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하고 은혜도 모르는 놈들이겠지만, 그 친구들에겐 아프거나, 불편하거나, 일할 기분이 아닐 때 쉬는 건 너무 당연한 인식이다. 나는 여전히 아파도 웬만큼 참을만하면 다이빙을 하는 편이다. 거창한 책임감이나 희생정신이라기보다는, 나와 함께 코스를 하던 교육생이 다음 날 덜컥 다른 낯선 강사와 함께하게 되면 느낄 당혹감 때문이다. 다이빙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하는 일이다 보니, 신경을 많이 쓰는 성격인 나는 교육생의 심리적 안정도 교육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다이빙 산업계에서 일하면 힘쓸 일이 많다. 탱크와 장비를 비롯해 무거운 짐을 많이 나른다. 여자니까, 체구가 작으니까, 연약하니까 도와주려는 동료 강사들이 많지만, 한두 번 도움을 받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내가 지금껏 봐온 멋진 여성 다이빙 프로페셔널은 남성과 동등하게 체력이 요구되는 힘든 일을 똑같이 한다. 나 역시 그렇다. 탱크를 많이 만지고 나르다 보면 팔다리와 복근에 절로 근육이 생기고, 손바닥은 굳은살과 물집으로 가득하다. 몸을 쓰는 일은 정직하다. 일의 흔적이 몸에 기록으로 남는다. 자연스럽게 내 몸을, 내 건강을, 내 체력을 살필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이 사라졌다. 일 년에 몸살감기 한두 번 말곤 크게 앓아본 적이 없다. 타이트한 속옷과 하이힐, 긴장과 스트레스로 가득했던 일상이 바다와 햇빛, 모래, 그리고 땀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는, 그 오랜 시간을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공간을 헤매며 방황했다. 나는 언제나 한결같이 내 자릴 못 찾고 서성이기만 했다. 어차피 인생이란 건 외롭다는 걸 알았고, 어차피 외로울 거 어디에서 외로울지 정도는 적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어야 좀 덜 억울하지 않나 싶었다. 이 섬에서 나는 더 이상 주목받고 잘 나가는 잡지사 에디터가 아니다. 이곳에서 다이빙 강사로서 내 자리 역시 언제든 대체 가능하지만, 적어도 내가 선택한 곳이니 후회는 없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나를 더욱 평화롭게 만든 건 더 이상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나는 나대로 괜찮다는 걸 이 섬에 와서야 깨달았다.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할 것은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가식과 겉치레 없는 온전한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 절대 쉽지 않다. 내가 자란 문화권에선 나 자신을 앞세우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희생이 부족한 이기심으로 치부되지만, 다른 문화권에선 너무 당연하다. 끊임없이 소모되고 닳아 없어지는 자신을 인지조차 못 한 채 거짓 미소를 띠며 스스로 갉아 먹고 사는 사람보다, 이기적이고 무례하다 손가락질받아도 진정 스스로 행복해 웃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예전에 일하던 다이브 센터 웨스턴팀에 한국에 돈 좀 있다는 아버지와 아들이 다이브마스터 트레이닝을 받으러 왔다. 아버지란 작자는 갓 스물을 넘긴 아들에게 다이빙 보트 위에서 웨스턴 친구들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걸 이용해 큰 소리로 으스대며 “쟤들 봐라, 거지 같은 것들. 모아둔 돈이 있냐, 뭐가 있냐. 너도 쟤들처럼 되고 싶어? 다이빙은 그냥 즐겨!” 떠들곤 했다. 그때처럼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운 적도 없었다. 그러면서 왜 이 섬에 수많은 한인 샵 놔두고 ‘거지 같은’ 우리에게 트레이닝 받으러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도를 한참 넘어선 사람들이었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나누는 부자의 대화가, 그 아들이 앞으로 살아갈 삶이, 그 아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아버지의 비뚤어진 마음이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지금쯤 그 아들은 한국 어딘가에서 약자와 소수자를 괴롭히면서도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 부자에겐 내가 하는 일이 끔찍하게 불안정한, 우습기까지 한 농담처럼 보였겠지만, 이제 나는 그들의 존재 자체를 농담처럼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크고 단단해졌다.


앞으로 한 달 후, 1년 후,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이 엄습해올 때가 있다. 정년까지 보장된 일자리도 아니고, 고정된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니요, 아픈 만큼 못 버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대가다. 곰곰이 예전의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잘 나가는 직장에 나쁘지 않은 연봉을 받던 그때 나는… 불안하지 않았나? 행복했나? 누군가는 불안정함이 싫어 공무원 시험을 보지만, 공무원이야말로 봉사와 희생정신이 없으면 양심적으로 스스로 하지 말아야 하는 직업이다. 물론 가치관의 차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자신이 원하는 걸 하면 된다. 나 역시 그랬다. 앞으로 한 달 후, 1년 후, 10년 후의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때가 있었다. 그래서 더 회사와 사회, 집단에 집착했다. 적어도 잘리진 말아야겠다, 무조건 버텨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국, 내 발등을 내가 찍었다. 내가 진짜 두려워했던 건 결국 권태의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오늘과 뻔히 예상되는 내일이었다. 그보다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미래가 나았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삶이 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불안정’을 대신할 ‘자유’라는 적합한 단어를 내 삶에 썼다. 그리고 그 단어에 대한 확신은 세상 그 누구도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이다. 그리고 책임도 내가 진다.







이전 04화 뱃속에 나비가 날아다닌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