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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May 18. 2021

도망칠 용기

다니던 잡지사 편집장에게 사표를 건넸다. 인디 잡지에서 일하던 나를 메이저 패션지로 직접 스카우트했던, 인디 정신과 스트리트 정신으로 똘똘 뭉친 나를 ‘거리의 아이’라 부르던 분이다. 그래서 불쑥 내민 사표에도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잡는다고 들을 네가 아닌 걸 알지만, 그냥 궁금해서. 그만두고 뭐 하게?” “다이빙하려고요.” 간단명료한 대화였다. 편집장은 여전히 한국에서 나를 응원하고 있다. 


직장 생활을 할 땐 꼬박꼬박 통장에 월급이 들어왔다. 정부는 성실하게 세금을 알아서 떼어갔다. 살면서 내가 가장 안정적으로 돈을 번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아무리 큰 회사라도 잡지사 에디터 월급은 박봉이다. 세상 모든 직업군의 연봉이 올라도 글 쓰는 일에 대한 가치는 절대 안 오를 거라, 기자들끼리 모여 푸념 비슷한 농담을 하곤 했다. 잠자는 시간과 출퇴근 시간을 뺀 하루의 나머지 시간 모두를 회사에 바치는 것에 비해 내 시간의 가치를 매기는 연봉은 너무 짰다. 아니, 시간이라는 개념에 가치를 매기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 내 이름과 시간을 조직의 이익 창출 목적을 위해 최대한 불살라야 한다. 그에 대한 가치는 돈으로 매길 수 없기도 하거니와 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숫자 몇 개로 내 가치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우리 모두, 그걸 알면서도 회사에 다닌다. 


회사 다니는 내내 나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으려 여기저기 코를 박고 킁킁댔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나는 어딜 향해, 어떻게 가고 있는 거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답도 없는 질문을 수도 없이 떠올렸다. 유명 패션지 에디터라는 직업 특성상 사람을 많이 만나 명함을 주고받는 일이 태반이다. 그 명함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인디 매거진 이름이 찍혀있을 땐 콧방귀도 안 뀌던 사람들이 잡지사 이름이 바뀌자 화색을 띠며 나를 ‘기자님, 기자님’ 하고 모시기 시작했다. 기분이 묘했다. 다들 나 빼고 이렇게 살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강남 아파트에 살면서 맥라렌을 끌고 싶어 했던 거야? 그걸 모를 정도로 순진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피부로 느낀 적도 없다. 내 이름보다 잘난 회사 이름이 찍힌 명함 덕을 보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동료 에디터처럼 어떻게든 자리보전하며 ‘짧고 굵게’가 아닌 ‘길고 가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이 상했고, 반항심만 커졌다.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나에게서 명함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나라는 사람의 본질적인 명함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치장하는 모든 수식어를 빼고 내 이름 세 글자만으로,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나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인가. 나는 온전히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루 이틀 한 고민도 아닌데, 점점 조급해졌다. 이십 대엔 방황도 폼이고 멋인데, 삼십 대엔 주책이고 헛소리로 치부된다. 아무도 나를 밀어붙이지 않는데, 괜히 혼자 마음이 급해졌다. 이 정도 나이면 뭐든 하나 결론을 내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압도되고 있었다. 이 자체만으로 부담이요 스트레스인데 나는 샤랄라 한 낙관주의자도 아니었다. 잡지사 에디터로 항상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잘 섞여 일을 진행해야 하니 언제나 영업 미소는 자동 장전하고 촬영이나 인터뷰 현장에서 긍정의 기운을 쏟아내려 노력했다. 그러다 방전된 배터리 마냥 털털 거리며 겨우 집으로 돌아가 몸을 뉘었다. 다음 날 다시 침대에서 빠져나와 반복되는 하루. 자본주의의 꽃, 잡지사 피처 에디터로서 사명을 다해 사람들의 소비를 최대한 부추긴다. 편집장이 지어준 별명처럼 ‘거리의 아이’인 나는 늘 그게 마음에 부대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브랜드 행사에 가면 나는 그렇게 외로웠다. 차라리 홍대 구석진 라이브 공연장에 유일한 관객으로 서 있는 게 덜 외로웠다. 화려한 서울의 불빛에 내 빛은 없었다. 지금까진 어찌어찌 해왔지만, 앞으로도 이곳에서, 계속 이렇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인터뷰를 전문으로 하는 에디터로 공감 능력은 커리어에 큰 득이 됐다. 반면 공감을 잘하고 예민한 나는 한 공간에 열 명이면 열 명, 제각각의 감정과 기운을 모두 느낀다. 세상 모든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동시에 세상 모든 게 나를 향해 날아드는 화살이다. 피곤하고 괴로운 일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잠시만이라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말하자면 나는 겁을 먹은 것이다. ‘어른’ ‘사회’ ‘책임’ 남들도 모두 힘들게 거치는 관문에, 다들 티 안 내고 잘살고 있는데, 괜히 나만 유난인 것 같아 머쓱하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괴로운지 외로운지 티도 못 내고 살았다. 견디는 듯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건 나에게 “너 또한 견뎌라” 하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았다. 견디지 않으면, 나는 이 사회가 바라는 생산적인 구성원에 들지 못 할 거란 두려움이 컸다.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삶에 관여하고 오지랖 부리며 강요까지 하는, 선 넘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야말로 언제까지 그런 사람들을 버티며 살 수 있을지 가늠이 안 됐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만든 희대의 거짓말, ‘열심히 하면 성공하는 사회’. 여전히 우리가 다음 세대에도 세뇌하고 있는 아주 그럴듯하고 달콤한 거짓말. 내가 경험한 세상은 나를 말 그대로 ‘소비자’로 본다. 내 소중한 인생과 시간을 노동을 통해 돈으로 맞바꿔 더 열심히 소비하길 바란다. 내 삶 깊숙이, 모든 곳에 스며든 광고 속에 진심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도 내 삶의 가치나 진정한 내 감정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포털이 이끄는 여론과 막장 연예계 가십, 온갖 정치, 사회 뉴스에 휘둘려 점점 눈과 귀가 멀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충실하고 성실한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특히 해마다 돌아오는, 차갑고 건조하고 무표정한 서울의 겨울은 정말 가혹했다. 무거운 코트는 내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눌렀다. 아토피에 기관지가 안 좋은 나는 늘 혼자서 ‘겨울 없는 나라로 떠나고 싶다’ 중얼거리곤 했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호기심과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잡지사 피처 에디터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울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그리고 서울에도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애처롭기만 했다. 괴롭히는 사람이 없는데도 괴롭고, 독촉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조급하고, 싸움 거는 사람이 없는데도 늘 싸우는 기분이 들게 하는 기묘한 도시, 서울. 에디터 일을 하며 만난 소위 ‘난다 긴다’ 하는 화려한 사람들 역시 정작 만나보면 행복하지 않았다. 전국 방방곡곡을 쏘다니며 각종 음악 페스티벌에 라이브 공연에 영화제를 취재하러 다녔지만, 늘 작은 상자 안에 갇혀 같은 곳을 뱅뱅 도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꾸민 가상현실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지만, 단 한 번도 누구를 위한 게임인지, 또 왜 그래야 하는지 의문을 품고 질문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혼자서 투덜거리기만 하는 소심하고 충실한 ‘소비자’였다. 


억울했다. 나는 아직 인생 반도 안 살았는데, 사회가 인간의 가장 평균적인 삶을 빅데이터로 만들어 평균을 내고 나에게 적합한 사회적 역할과 기대치를 요구했다. ‘평균’과 ‘절대적’이라는 단어는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평균 시력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각이라는 감각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런 개념은 오직 눈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만 말이 된다.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인생에 다른 이들의 평균과 절대치를 들이미는 게 불쾌했다. 다만 이 불쾌함을 누구에게 따져 물어야 할지 모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도망치기로 했다. 수많은 사람과 나눠야 하는 공간과 시간에서 나는 끝내 내 자리를 찾지 못했다. 삼십 대 중반,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지금, 여기, 내 자리가 없다면, 어디엔가는 있지 않을까. 도망친 그곳이 무섭고 외롭지 않겠냐, 걱정하는 친구도 많았다. 내가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수많은 익숙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로운 것이다. 사람들은 내 주위에 있는 것이지, 진정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진정 나를 모른다. 사실 나도 나를 모른다. 그럴 바엔 여기가 아니어도 괜찮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내가 찾고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안정감’이라는 최면에 걸려 그걸 위해 무엇을 얼마나 희생하는지도 모른 채 공허하게 살 바에야 불안정하고, 미래를 알 수 없고, 외롭고, 두려운 어딘가로 도망쳐보는 것도, 그 시도 자체만으로 가치 있는 게 아닐까. 회사 인사부 직원이 무미건조하게 숫자로 매기는 내 시간의 가치보다 낫지 않을까. 인스타그램에서 내 취향에 맞는 사람들과 브랜드를 팔로우해 온라인 타임라인을 꾸미는 대신 내가 함께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을, 커뮤니티를 내 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단 하나, 나를 등 떠밀 핑계가 필요했다. 그때 바다가 내게로 왔다. 고작 30분 경험한 생애 첫 바닷속 경험이 30년을 훌쩍 넘긴 내 삶의 방향을 틀었다. 내가 도망쳐 잃을 것이 있나 생각해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습도가 40퍼센트인 나라에서 80퍼센트인 나라로 간다고 해서 내 삶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올 거라는 큰 기대도 없었다. 모든 건 낯설고 쉽지 않을 것이다. 그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온전히 스스로 자유와 행복의 순간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그 감정을 만져보고, 그 질감을 느끼고 싶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사회와 시스템에 갇혀 끝없는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를 오가는 횟수를 줄이고 싶었다. 조금 더 나를 보살피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도망칠 용기를 내자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는데 결심만으로도 내 삶에 미세한 진동이 생기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었다. 


선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바뀐다.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선 곳을, 풍경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살아지는 게 아닌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름과 바다를 좋아하는 나는 태국의 작은 외딴섬 꼬따오로 떠나기로 했다. 섬을 통틀어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 그곳에서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무턱대고 행복을 찾으러 떠난 건 아니다. 행복해야 한다는 세뇌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무와 습관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나를 ‘82년생 김지영’ 중 하나로 개념화해버렸지만, 나는 더 이상 사회가 바라듯 불행한 채로 안 그런 척 웃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어른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최대한 그러고 싶다. 하지만 반드시 어른이 되어야 한다면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지, 자기 삶에 대한 스탠스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적당히 나쁜 짓, 치사한 짓 하며, 산다는 게 다 그렇지, 핑계를 대며 살 것인가, 좀 모자라도 스스로 옳다 믿는 신념과 정의를 지키며 따뜻하고 올곧게 살 것인가. 그리고 결정했다면, 나아가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스스로 꽤 많은 걸, 또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마크 트웨인은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이 아닌, 자신이 잘 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라고 했다. 나는 다행히 아는 것도, 확신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바닷속으로 도망치기로 했다. 여름만 있는 나라, 소박한 사람들이 나누며 사는 작은 섬, 따뜻한 바닷속. 바다라는 자연에 빌붙어 살 거라 어떻게 밥벌이해야 할지도 분명치 않았다. 행복한 척하지 않고,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진정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내 삶에서 그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내 삶과 내 시간의 가치를 스스로 매겨보기로 했다. 화려한 명함 없이 오직 내 이름 석 자만으로. 도망칠 용기를 내고서야 그 실험은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 나는 준비가 됐다. 모든 것에 마음을 열고, 모든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 설사 이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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