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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HARU May 15. 2021

나의 위도를 찾아서


서른 넘어 늦깎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생애 처음 ‘강남’으로 출근했다. 화려한 동네는 정작 그곳을 누비는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의 화려함에 지지 않으려 비싼 자동차와 명품으로 자존심을 부린다. 위성도시에 살던 나는 하루에 두 번씩 한강을 넘나들며 출퇴근으로만 서너 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좋아하는 글쓰기 일을 했고, 글을 쓰기 위해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삶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서 다른 이의 삶과 시대의 화두, 트렌드는 잘도 꿰뚫어 봤다. 


하지만 정작, 내 삶은 들여다보지 못했다. 항상 목이 말랐다. 잡지사 에디터로 인정받을수록, 내 글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내 삶은 더 뻔해졌다. 몇 년 후 내 삶이 충분히 예상 가능했다. 이러다 결혼해 애 낳고 대출받아 집을 사야겠지. 그리고 남은 시간, 조금씩 대출금을 갚으며 일탈 없는 성실한 삶을 살아가겠지. 누군가는 그런 삶을 안정이라 여기겠지만, 나는 그걸 권태로 인식했다. 실패와 불안정을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나는 그렇다고 삶의 안정과도 친해질 수 없는 형질의 사람이었다. 권태는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잘 나아가고, 그러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서서히 나를 잠식한다. 점점 더 내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사라져 갔다. 그렇게 나는 점점 무기력하고, 게을러지고, 멍해지기 시작했다. 


내 삶의 대부분은 열등감을 이겨내려 아등바등하는 시간이었다. 잡지사 에디터로 삶의 이야기가 풍부한 사람들을 숱하게 찾아다닌 이유는 결국, 스스로 이야기가 풍부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자신의 이야기가 부족한 사람들은 허언과 허풍이 심하다. 없는 걸 있는 척 꾸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대부분 자존감이 부족하고 자존심이 세다. 대한민국 화려한 패션계와 엔터테인먼트 업계 사람들과 가까이 일하던 나는, 그걸 버티질 못했다. 적어도 나에겐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정도의 안목이 있었다. 이제, 스스로 내 삶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때라 생각했다. 서울에서 나는, 순간을 겨우 이어 붙여 가며 하루하루 위태롭게 버티며 살고 있었다. 패션지에서 일하지만, 명품이나 브랜드에 관심도 없었고, 인간관계도 별로였고, 마음 둘 데도, 준 곳도 없었다. 어차피 이리 순간을 버티고 버티며 살아가야 한다면, 이왕이면 여기보단 다른 곳이 낫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이 내 삶을 가장 안정적인 상태라고 말하고 인정하고 부러워하던 그때, 나는 혼자 길을 잃었다. 나는 본래 방황이 전문이다. 안정적인 삶이 지속될 때보다 방황할 때 내 삶은 모순되게도 더욱 활기를 띤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무엇이든 옳다. 나란 인간에 대한 탐색, 나란 사람과의 대화가 필요한 때가 됐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외면해왔던 일이다. 이제는 꼭 해야 할 일이다. 


그때 처음 바다를 만났다. 아니, 바닷속을 만났다. 잡지사 출장으로 떠난 해외 리조트 출장 여행에서의 체험 다이빙이었다. 해변에서 폼 잡고 사진만 찍어봤지, 바닷속에 내 몸 전체가 오랜 시간 잠긴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수면 아래로 내 몸이 잠기는 순간, 세상의 온갖 소음이 내 머릿속 잡생각과 함께 사라졌다. 그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운 세상은 처음이었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세상의 소음에 힘들어하고 있었는지, 한편으론 안 그런 척, 그래야 강하고 멋진 거다, 괜찮다, 하며 버티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나에겐 이 고요와 평화가 절실했다. 그 칠흑 같은 고요 속에 오직 나의 숨소리만 들렸다. 내 호흡 소리에 이토록 온전히 온 감각을 집중해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살아있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 바닷속 세상을 만나고, 그 바다에 기대어 사는 다이빙 강사의 삶을 엿보고, 열대 섬 밤하늘에 빛나는 선명한 별과 달을 마음에 담아 서울로 돌아온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도시에 돌아온 이후, 하늘만 쳐다보며 다녔지만, 빌딩 숲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이제야 어느 곳에 눈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깨달았는데, 눈이 닿는 곳엔 화려한 건물과 불빛, 그것에 지지 않으려 더욱더 화려해지려 애쓰는 사람들뿐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에도 내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이리 다르다. 오랜 시간 서걱거리는 마음으로 수많은 이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글을 썼지만, 내 관심은 온통 바닷속이었다. 그리고 바닷속에서 최대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을 마침내 스스로에게로 옮겨야 하는 때가 온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아니 될지 모를 일이다.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로, 여행자가 아닌 로컬로 살 수 있는 곳. 내가 좋아하는 바닷속에 매일 들어갈 수 있고, 아토피 피부에 완벽한 습도와 온도가 있는 곳. 더 이상 습관처럼 자기소개서에 ‘명랑, 쾌활’이라 쓰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곳. 삶의 쓸쓸함과 그늘을 없는 듯 숨기고 존재조차 하지 않는 듯 무시하지 않는 곳. 길을 걷다가도 훅 치고 들어오는 자격지심이나 ‘내가 저들에 비해 잘 못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조바심 없이 나만의 속도로 재미있게 살 수 있는 곳. 늘어가는 내 나이테가 사는 동네 이름이나 차, 가방, 옷으로 평가되지 않는 곳. 경제적 성장에 집착하기보다 인격의 성장에 더 시간을 쓰며 타인과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곳. 덜 벌고, 덜 쓰고, 덜 일하고, 덜 경쟁하고, 덜 가르치고, 덜 배우는 곳. 그래서 덜 존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곳. 


그렇게 나는 태국 동남부 바다 한가운데에 뚝 떨어져 있는 작디작은 섬, 꼬따오에 왔다. 이 섬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이 섬에 온전히 스며들기 위해서. 나에게 꼭 맞는 위도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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