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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HARU Jul 19. 2021

외딴섬에서 사랑을 하면

고백부터 하자면 나는 사랑을 주고, 또 받는 것에 고약할 정도로 서툴다. 세상 무서운 줄, 사람 무서운 줄 모르던 이십 대엔 아주 ‘사랑의 고수’가 나셨더랬다. 연애 고민이 있는 친구들은 모두 나를 찾았고, 나는 뭐 대단한 거라도 아는 양 떠들어댔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섹스 앤 더 시티>가 아니었다. 어릴 적 우리는 모두 사랑에 서툴렀고, 서로 인지하지 못한 채 숱한 상처를 주고받았다. 여러 번 이별을 겪으며 배우는 게 사랑이라는데 나에겐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게 더 어려워지기만 했다. 아무것도 모를 땐 차라리 누군가를 만나고 사귀다 헤어지는 게 쉬웠다. 정신없이 누군가와 끝없이 부딪히고 상처를 주고받는 시간을 지나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인지조차 못한 채 누군가에게 준 상처가 내가 받은 상처만큼이나 크다는 걸 깨달았다. 


나 빼고 다들 잘만 사랑하고 사는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다시 나 혼자다. 그러면 나는 문제의 원인을 찾는답시고 나라는 사람의 내면을 기웃거린다. 어릴 적 큰 사랑을 못 받아서인가, 성격이 너무 모나서인가,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인가, 예쁘지 않아서인가, 말투가 문제인가, 옷 입는 게 문제인가, 화장이 별로인가, 별의별 게 다 문제 같다. 결국 본전도 못 찾고 가까스로 자기 비하와 기만의 늪에서 헤매다 빠져나오면, 또다시 사람에 견고한 벽을 쌓는다. 나의 불안정한, 쉽사리 요동치다가도 쉽사리 고요해지는 변덕스러움을 스스로 믿지 못해서다.


그렇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나 자신을 믿지 못해서다. 상대의 변하는 마음이야 감정이니 당연하다는 걸 몇 번의 연애를 통해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주었다 되가져갈 신뢰와 사랑은 당장 오늘 저녁이 될지 내일 아침이 될지, 나조차 자신할 수 없다. 사람들의 결혼서약이 때론 몸서리치게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평생을 함께 할 거라 자신하며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맹세를 하는 거지? 그런 확신은 대체 어떤 감정과 마음의 상태인 걸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 같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기 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믿지 않아서다. ‘지금’ 좋아서 함께 하다 내일, 모레, 살다 보면 더 좋아질 수도 있다. 그럼 그 사람과 생의 끝을 함께 하게 되겠지. 하지만 이제 고작 인생 이삼십 년 살았는데, 앞으로 살아갈 오육십 년을 “오직 이 사람만 사랑하겠다” 맹세할 수 있는 확신의 마음이 대체 어떤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순간도 이제 보니 사랑이 아니었다. 첫사랑으로 십 년 가까이 난리굿을 치렀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와 내가 진정 함께 사랑이라는 걸 했던 시간은 채 일 년도 안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확신이 안 선다. 집착이든 질투든, 나 자신을 투영시킨 게임이나 경쟁이든, 어쨌든 사랑은 아니었다는 게 점점 분명해진다. 그리움도 그렇다. 그 시간, 그 장소, 그 마음을 가졌던 그때의 나와 그를 그리워했던 것이지, 지금 다시 그를 만난다 해도 우리는 절대 그때와 같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마저도 그리움이라 하지 않겠다. 기억, 혹은 추억이 적절하겠다. 그렇다고 사랑을 잘 가꾸며 지속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거나 못났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모든 관계에서 내 탓을 하는 건 결국 나를 갉아먹을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중엔 이성애자도 있고 동성애자도 있고, 양성애자도 있고, 무성애자도 있다. 내가 이 세상의 한 사람 ‘더 원’ 혹은 ‘소울메이트’를 ‘남자 친구’나 ‘남편’이란 타이틀로 만날 거란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갖는 측은지심과 공감, 애정, 관심, 지지, 연대, 이런 것들이 나에겐 사랑이다. 


사랑에 서툴렀을 땐 누군가를 만나면 늘 ‘평강 공주’가 되었다. 온달이 빛나도록 조용히 뒷바라지를 했다. ‘순정’ ‘순종’ ‘순결’ 같은 단어들로 채워진 현모양처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다. 같은 이유로 그렇지 않은 여자들을 같은 여자이면서도 손가락질하곤 했다.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다행히 나쁜 남자를 만나 학대당하거나 이용되진 않았지만, ‘사랑’이란 이름으로 많은 걸 스스로 용인했다. 내 욕망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내 일 똑 부러지게 하면서 온달의 일까지 돕는 여자 친구 역할은 어렵지 않았으나, 점점 지워지는 내 이름 앞에 ‘OO 여자 친구’가 붙기 시작하면서 나는 이제 이런 건 그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민국 서울, 그중에서도 트렌디하고 핫하고 쿨한 사람들만 모인 패션지 업계에서 온갖 화려한 남자들을 다 만났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면서 더욱더 연애에서 멀어졌다. 각종 인터뷰와 화보 촬영, 브랜드 파티, 행사 등을 수업으로 겪으며 그들의 화려함에 가려진 연약하고 기괴한 면을 보게 됐다. 나는 그들과 연애를 하는 대신 친구가 되었다. 그 편이 나에겐 더 쉽고 편했고, 안정적이었다. 불안정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만나는 것은 굳이 ‘사랑’이나 ‘관계’ 일 필요가 없다. 나는 여전히 사람이라는 ‘종’과 그 종이 만들어내는 사회를 관찰하고 배우는 중이다. 


태국 작은 외딴섬에 옮겨 사는 우리들은 ‘아일랜드 릴레이션십’이라는 단어를 쓴다. 전 세계에서 자신이 나고 자란 곳을 떠난 사람들이 이 작은 섬에 모여 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속해있던 커뮤니티에서 ‘아웃사이더’였고, 저마다 상처와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두 외롭다. 그래서 이 섬에선 사람을 만나기 쉽다. 한편, 같은 이유로 사람을 만나기 더 어렵기도 하다. 대부분 이 섬에서 몇 주, 혹은 몇 달만 머물렀다 가기에 모든 것은 암묵적으로 ‘일시적인’ 관계다. 한 달 후 이 섬을 떠날 사람과 사랑에 빠지면 고달프다. 한편, 그걸 오히려 즐기는 사람도 있다. 모든 건 개인의 자유와 판단, 책임감으로 이뤄진다. 이 섬에서 오래 살아온 로컬들은 그런 이유로 잠시 머물렀다 가는 외부인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의 벽을 둔다. 모두 친절하고 젠틀하지만, 그 이면엔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으려는 배려와 회피가 작용한다. 그래서 이 섬에서 나는 더 자유롭다. 내 외모는 남자의 눈에 들기 위함이 아니며, 내가 가는 파티는 남자를 낚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다이빙 강사로 일하는 바닷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호르몬이 넘쳐나는 전 세계 각국의 젊은 남녀가 모인 대형 다이브 센터에서 일하다 보니 <가십걸>이 따로 없다. 확실히 웨스턴 여자 친구들이 자신의 매력을, 그리고 어떻게 어필할지도 잘 안다. 한국에서라면 ‘여자가… 헤프게… 쯧쯧쯧…’ 하는 소리를 수없이 듣겠지만, 이곳에선 그렇지 않다. 일시적이든 지속적이든, 하룻밤이든 수십 년이든, 상대가 누구든, 이 섬의 모든 사랑은 아름답다. 이 작은 섬에선 모든 것이 충돌한다. 서로 다른 인종, 성별, 문화 등이 부딪히고 파편을 튀기며 불꽃을 낸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 작디작은 섬에서 사귀다 헤어지면, 워낙 작은 커뮤니티라 섬을 떠나지 않고는 고등학교에서 남자 친구를 사귀다 헤어진 것처럼 서로 끊임없이 마주쳐야 한다. 이 섬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떠나는 이도, 상처를 간직한 채 남는 이도 있다.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는 이도 많다.


한 사람이 나에게 올 때 그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온다는 말이 있듯 나는 ‘관계’에 지나치게 신중하다. 본성 자체가 ‘엔조이’나 ‘원 나잇 스탠드’가 불가능하다. 가뜩이나 외로운 인간이 친밀한 관계 속에서도 외로운 것만큼 더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나는 지레 기대하고, 짐작하고, 그래서 일찌감치 실망한다. 만나는 남자에게 언제나 경쟁심과 자격지심을 느끼거나, 반대로 혐오를 느끼며 끝난다. 이것은 결국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에서 모든 관계를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사랑을 하기엔 자격미달이라 치부했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섬 같은 시간을 가졌다. 인간은 모두 제각각 떨어진 섬이다. 물이 빠지면 잠시 연결되었다가 물이 차면 또다시 제각각 섬이 된다. 


섬에 사는 내가 나만의 섬 같은 세계를 구축한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한결 자유로워졌다. 태어나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내 모습을 감추거나 속이거나 꾸며왔다. 그래서 사랑은 나에게 언제나 힘들고 불편하고 지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결코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진정한 사랑은, 그리고 진정한 관계는 서로를 자유롭게 하고 빛나게 하는 것이라 믿기로 했다. 내가 사랑에 속았다 해서 사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I Deserve better.” 한동안 이 섬에서 사귀던 친구와 헤어지며 한 말이다. 이 섬에서는 그 어떤 연애 관계에서도 이제, 더 이상 나를 희생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우아한 진심과 응원과 애정을 받을 만한 가치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가 내 가치를 알아주길 기다리고 보상해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나를 사랑하고 보살피기로 한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는 그 어떤 핑계를 댈 필요도 없이 담백하게 끝내기로 한다. 나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과 사람의 충돌과 불꽃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 작고 아름다운 섬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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