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ru Oct 09. 2021

나는 섬이다


아주 작은 외딴섬에서, 그것도 ‘내 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에서 살다 보면, ‘나’라는 사람의 적나라한 본능이 드러난다. 낯선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 순간적으로 나오는 말과 행동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많은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도시 살 땐 적당히 스스로 포장하는 게 가능하다. 화장으로 얼굴과 표정을 숨기고, 하이힐로 실루엣을 속이고, 브랜드 옷과 가방으로 치장해 ‘나는 지금 행복하다’라고 절규하지만, 정작 내 안의 진짜 나는 어떤지 들여다보지 못한다. 그렇게 나뿐 아닌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럴듯한 가면을 하나씩 쓰고 산다. 거대한 사회에 형성된 암묵적 동의하에 나도, 다른 이도, 우리 모두 가면을 쓰고 적당히 포장하고, 척하며 산다. 하이힐로 비틀어지는 발가락이 보이지 않듯, 하루하루 살아남듯 버티고 견디는 삶 속에서 깊어지는 상처는 누구도 돌보지 않는다. 


내가 그런 삶에 극도의 허무함을 느낀 건 상업 패션지로 직을 옮기면서부터다. 수많은 명품 브랜드에서 출시되는 신제품을 가장 먼저 접하고, 국내외 유명 셀러브리티나 아티스트를 수도 없이 만나다 보면, 내가 입고 있는 옷과 신발, 가방을 훑어보게 된다. 그제야 나는 아빠가 어느 순간, “앞으로 절대 차를 갖지 않겠다”며 자차를 팔아버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가끔은 서너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 다니는 이유를 깨닫게 됐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무슨 미련이 있어 버리질 못하고 붙잡고 있냐”고 하던 아빠를 이해하게 됐다. 누가 봐도 나는, 패션지 에디터 같지 않았다. 저렴한 온라인 쇼핑몰 편한 바지 몇 벌에 BYC 티셔츠를 얹어 다니기 일쑤였고, 독립 잡지에서 일할 때부터 인터뷰로 알고 지낸 친구들이 만든 소규모 스트리트 브랜드 옷을 걸쳤다. 하이힐에서 내려와 빨간색 반스만 밑창이 헤지도록 신고 다녔다. 내가 바닷속 세상에 발을 들인 이후, 육지의 삶에 본격적으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였다. 


무엇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건지 쓸데없는 건지, 다이빙을 하면서, 그리고 이 작은 외딴섬에 살면서 배운다. 오늘 내 배를 채우는 음식이 어디에서 오는지, 내가 배출한 쓰레기와 오물, 플라스틱이 어디로 가는지, 이 작은 섬에선 모든 과정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맥도널드와 스타벅스, 버거킹이 없는 작은 외딴 섬 꼬따오에선 내가 먹는 음식과 식재료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도시에선 내가 버리는 쓰레기를 수거함에 넣거나 골목에 내놓으면 다음날 새벽같이 환경미화원이 수거해간다. 하지만 이 섬에선 내가 버린 쓰레기를 제대로 처치하지 않으면 영영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조류가 바뀌면 망망대해를 떠다니던 수많은 인간의 배출물이 이 작은 섬 해안가로 밀려온다. 우리는 그걸 일주일에 몇 번이고 청소하는데, 정작 이 모든 배출물의 주인공인 지구 어딘가에 사는 또 다른 인간은 이 사실을 알기나 할까 모르겠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사라졌다, 하고 진즉에 잊었겠지. 바다가 품고 있는 인간의 배출물과 오염물을 직접 보고 깨닫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세상 사람 모두 한 번쯤은 다이빙을 해봤으면 좋겠다. 


세상에 진정한 ‘친환경’ 제품은 없다. 플라스틱 포장지 상품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대형 마트에서 계산할 때 플라스틱 백을 제공 안 한다고 해서 괜찮아질 리 없다. 제조, 유통, 진열, 판매, 그걸 구매해 집안 식탁까지 가져가는 인간의 활동 모두, 엄청난 탄소를 배출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 자체는 어떤가. 커피, 고기, 와인, 과일, 각종 공산품이 가난한 나라의 노동 착취로 만들어진다. 우리가 식탁에서 고상한 척하는 사이 비하인드 씬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갖기란 쉽지 않다. 이 정도 호사와 사치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그만큼 열심히 일했기에 이 정도는 해도 된다고, 매월 몸과 마음이 혹사되는 마감이 끝나면 스스로에 주는 선물이라며 불필요한 소비를 스스로 합리화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작은 섬에선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매일 같이 혹사되는 사회의 부속품 중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가 바닷속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풍경과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의 미소로 채워진다. 더 이상 나는 내 삶을 희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희생이 없으니 자연스레 삶에 대한 피해 의식이 사라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삶에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다이빙이 좋아 전 세계 곳곳에서 여기까지 다들 파도처럼 떠밀려온 사람들. 이곳은 ‘파라다이스’인 동시에 ‘피터팬의 섬’이기도 하다. 하여, 이곳에서 살려면 수많은 피터팬과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예민함과 소심함, 그리고 나약함은 이따금씩 이 섬의 피터팬과 작은 충돌을 일으킨다. 어쩌다 보니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작고 외딴섬까지 떠내려 오게 됐다지만, 그저 다이빙이 좋아서,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고 바닷속에 있는 시간이 좋아 온 곳이라지만, 이곳에서 역시 나는 사람들과 섞여 살 수밖에 없다. 마음 같아선 바닷속 고래처럼 평생을 물속에서 살고 싶으나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스쿠버 장비를 빌려 잠시 그 꿈을 이룬다. 바닷속 시간이 아무리 황홀하고 꿈같아도 수십 분이고 수 시간이다. 물속에 머물다 언제고 뭍으로 올라와야 하는 내 운명을 받아들이고, 물 밖 피터팬 세상인 ‘네버랜드’에도 잘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내내 이방인으로 지내왔기에 해외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는 것엔 익숙하다. 영어로 다이빙하며 먹고살다 보니, 가끔은 내가 한국어로 우아하게 표현했던 감정을 미처 토해내지 못하고 목 끝에서 스스로 거를 때가 있다. 내가 영어로 다이빙을 배우고, 프로페셔널이 되어 영어로 다이빙을 가르치기로 결심한 건 언어가 가진 권력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지구라는 별에 사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영어를 쓰는 건 아니지만, 해외로 다이빙 여행을 다닐만한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쓴다. 세계 질서를 컨트롤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영어를 쓰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정보에 소외된다. 불공평하고 불편한 사실이지만, 글과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기도 하다. 언어가 가난하면 감정 또한 가난하다. 영어론 한국어만큼 내 감정을 완벽히 표현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어떨 땐 같은 이유로, 그게 또 자유롭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친구들은 그 문화만이 가진 늬앙스나 제스추어를 세밀하게 읽는 데에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때문에 나는, 자유자재로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지 선택할 수 있다. 전직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무엇이든 말과 글로만 표현하는 데에 익숙했던 나는, 이 섬에서 배운다. 세상에는 말과 글 말고도 무궁무진한 소통의 방법이 있음을.


한국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소원해진다. 그들이 세계와 나의 세계의 공통점이 사라져 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의 세계를 ‘파라다이스’라 단정 짓고, 나 역시 그들의 세계를 ‘가식과 자기학대로 가득한 세상’이라 단정 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고군분투는 거기나 여기나 형식과 방법만 다를 뿐 여전하다. 내가 도시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권태’였다. 권태에서 벗어나려 도시의 나는 끊임없이 쓰고, 듣고, 떠들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뭔가 더 새로운 것, 뭔가 더 멋진 것, 뭔가 더 특이한 것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섬에서 끊임없이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수년 째 다이빙해오고 있지만, 난생처음으로 여태 권태감을 느끼지 않았다. 가슴 뛰는 첫 다이빙이 희미해지고 설레던 첫 다이빙 교육이 기억에서 사라져 가지만, 여전히 바닷속은 내 생명과 부활의 근원이다. 오늘을 살고, 또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미다. 


무엇 하나에도 꾸준하지 못하고 항상 흔들리고 부대끼는 게 도시에서 살다 보니 어느새 자격지심이 되었다. 수십 년 직장 생활을 해온 아빠, 엄마가 매일 같이 현관문을 나서면서 몰래 내쉬었을 한숨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도대체 왜 나는 그렇게 성실하고 참을성 있게 희생하며 살 수 없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스스로 물었다. 


도시에 살 때 나는 어떻게든 멋지고 거대해지려 했다. 금메달 같은 거 하나는 목에 걸어야 내 삶이 어디에 내놔도 괜찮은 삶인 거라 생각했다. 대출 잔뜩 끼고 얻은 집 한 채나 차 한대일 수도 있겠다. 하루에도 수시간을 바닷속에서 하릴없이 배회하는 나는 이제 더 이상 행복해지려, 혹은 스스로 세상에 가치 있는 사람이라 증명하려 애쓰지 않는다. 바다라는 거대한 우주에 먼지 같은 존재인 나를 경험한 이후부턴 특별해지려 애쓰지 않아도 나는 이미 우주의 일부로 특별한 존재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행복해지려는 강박은 오히려 진정한 행복을 느낄 찰나마저 빼앗는다. 행복해지지 않을 권리 또한 행복할 권리만큼 중요하다. 행복해질 필요가 없으면, 사람들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섬에 사는 지금, 나처럼. 도시를 가득 채운 자격지심과 무기력함에서 벗어나 자존의 섬으로 떠난 여자, 그래서 결국 내가 이 섬에서 배운 건 “나는 행복하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아”였다. 


도시에서 화려한 패션지 에디터로 살 땐 내가 뭐라도 된 듯 착각한 적도 있었다. 반대로 내 비평 한 줄로 아티스트가 울고 웃는 걸 보며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겁 낸 적도 있었다. 내가 대체 뭐라고, 이 사람은 내 어떤 면을 보고 이렇게 큰 신뢰와 지지를 보낼까. 에디터를 꿈꾼다는 친구들이 나를 잔뜩 추켜세우기도 했다. 내 마음속 숨겨진 자격지심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뮤지션과 배우를 비롯한 수많은 아티스트를 만나며, 나는 무언가 멋진 걸 창조해내는 그들을 부럽고 섬기는 마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내 존재는 ‘필수’가 아닌 ‘보조’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스스로 아티스트가 될 용기도 없으면서 평생 그들의 결과물을 평가하며 아는 척, 고상한 척, 낯 두껍게 살 자신이 없었다. 


이 섬에서 나는 벌거벗고 사는 느낌이다. 나는 이 바다와 지구와 우주의 일부요, 이 세상 누구 하나 나보다 잘 나거나 못나지 않았다. 인종, 성별, 종교, 나이, 성적 취향을 떠나 모든 인간의 존재가 나에겐 같다. 내가 가진 신발은 플리플랍 하나가 전부요, 그 마저도 없으면 맨발이다. 몇 벌 안 되는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는 항상 젖어있고, 헝클어진 내 머리는 바다 짠내 가득이다. 태양에 그을린 얼굴색을 화장으로 희게 바꿀 필요도 없고, 화려한 드레스로 나를 꾸미지 않아도 된다. 이 섬에 사는 모두가 나와 같은 걸 원해 흘러들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살던 한국의 도시를 바꾸지 못했지만, 결국 내가 살고 싶은 방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찾았고, 또 이곳에서 살기로 선택했다.  


이 섬에서 배를 타고 버스를 타고 몇 시간 지나면 닿는 태국의 도시 역시 나에겐 여전히 생경하다. 차들이 도로에 가득하고 쇼핑몰과 글로벌 프랜차이즈 투성이인 공간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는 나는 영락없이 엄한 곳에 불시착한 피터팬이다. 이 세상은 나 없이 잘만 돌아간다. 나 없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가는데, 왜 그토록 애쓰며 살았나. 외롭다. 하지만 그래서 나는, 자유롭다. 진정한 자유는 진정한 외로움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두려웠던 순간, 난생처음 용기 내 발을 디딘 이 섬에서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한 내가 만난 건, 광활한 바다와 우주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그러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뀐다. 결국, 외로움이 또 다른 외로움을 위로한다. “결핍이 대상을 파괴하면서 제 결핍을 재확인하는 길은 욕망의 길이고, 결핍이 다른 결핍을 어루만지면서 제 결핍마저 넘어서는 길은 사랑의 길이다”라는 신형철(<몰락의 에티카>)의 말을 좋아한다. 나는 이 섬에서 사랑을 배운다. 깊은 바닷속에 몇 시간이고 들어갔다 나온다고 해서 내가 그곳에 자랑할 만한 큰 업적을 남기고 나오는 게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도 몇 번이고 내가 별 거 아닌 존재라는 걸 바닷속에서 느끼고 나오길 반복하면서, 나는 오늘도 삶을 낯설게 성찰한다. ‘천천히 깨달아가는 자는 통달한 자의 비늘에 베이지 않는다’는 칸트의 말처럼, 나는 오늘도 나 자신과 내 숨소리만 있는 그곳에서 삶을 배운다. 바다와 육지 그 사이 어딘가,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다.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나를 더 이상 스스로 비난하지 않기로 한다. 스스로에 좀 더 관대해지기로 한다. 그러면 다음엔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관대해질 수 있겠지. 그렇게 나는 점점, 섬이 되어간다. 나는 그런 지금의 내가 꽤 마음에 든다.






이전 10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