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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Apr 03. 2024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나만의 위도를 찾아서, ‘하루의 섬’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아일랜더 여러분. ‘하루의 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섬지기, ‘하루’예요.      


처음 만나는 분들을 위해 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이십 대는 홍대 길거리에서, 삼십 대의 반은 늦깎이 잡지 에디터로, 또 나머지 반은 태국의 작은 외딴섬 바닷속에서 보낸, 방황이 전문인 작가이자 여행가, 프로페셔널 다이버입니다. 얼마 전까진 해외에서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게 다이빙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바다에 기대어 밥을 벌어먹었어요. 그동안 제 삶의 고백이 사람들에게 거울로 비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써 내려갔던 에세이가 브런치 특별상에 선정된 행운으로, 작년 여름의 끝자락엔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라는 에세이를 정식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각각 따로 떨어진 섬이란 생각을 해요. 이따금 근사한 보트를 타고 이웃 섬에 놀러 가 화려한 파티를 즐기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낡은 뗏목을 타고 나갔다 갑작스럽게 만난 풍랑으로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떨 땐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건실한 다리가 섬과 섬 사이에 생기기도 하죠. 하지만 결국엔 모두 제각각 섬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이는 제 섬이 없어 남의 섬을 빼앗기도 하고, 얹혀 지내기도 하죠. 또 어떤 이는 섬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않고는 너른 바다를 떠다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섬과 섬 사이가 잠시 연결되는 그 순간, 오로지 당신과 내가 연결되는 그 순간을 위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또다시 바다로 나아갑니다. 또다시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단 두려움을 안고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이 아름다운 반복의 여정이 모이고 모여 삶이 되니까요.       

    

풍랑이 잦아든 날이면 그저 달큼한 코코넛 하나 따 먹으며 붉게 물든 수평선을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는, 나에게 꼭 맞는 온도와 습도와 바람, 냄새를 가진, 나만의 위도에 꼭 맞는 나만의 섬을,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찾아내는 과정도 삶, 그 자체니까요.            


망망대해를 떠다니다 비로소 닿은, 지도 어디에도 없는 무명의 섬, 누구도 재단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재촉하지 않는 곳. 제 목소리를 따라오세요. 이 섬에서 당신은 안전합니다.  

  

ⓒ 하루의 섬


 





파라다이스에서 우울하면 약도 없는데  


‘파라다이스 우울증(Depression in Paradise)’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외부에서 보기에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상황, 예를 들어 겉보기에 화려하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우울증이나 불안 장애, 강박 장애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는 걸 말해요. 미국에서 은퇴 후 플로리다 해안가에 화려한 별장을 지어 사는 사람들이 실제 ‘파라다이스 우울증’을 많이 앓고 있죠. 특히 요즘 일찍 큰돈을 벌어 성공한 디지털 인플루언서들이 푸켓이나 발리, 칸쿤 같은 휴양지에 살며 겪고 있는 중상이기도 합니다. 태국의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섬, 꼬따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저도 경험했고요.       

 

한편, ‘파라다이스’에 살며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파라다이스’ 밖으로 스스로 내몰아 고통에 빠진 사람들도 많아요.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같은 플랫폼을 통해 타인의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는 삶을 동경하며 조바심 내는 사람들도 많죠.      


‘파라다이스’는 특정 조건이나 성취에 의해 행복이 보장된다는 걸 암시하지만, 태국의 지상낙원이라 불리던 곳에서 여러 해를 보냈던 제 경험으로 비춰볼 때 ‘파라다이스’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더군요. 오히려 ‘파라다이스’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조차 모든 것이 괜찮다는 자기 최면에 빠지게 되거나, 혹은 ‘파라다이스’에 있기 때문에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삶이 더 버거워지기도 해요. 제가 꼬따오에서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를 쓴 이유이기도 합니다. ‘파라다이스’에 살며 제가 얻은 삶의 깨달음은 ‘내가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였거든요.      


물론 ‘파라다이스’에서 지낸 수많은 나날이 행복했어요. 하지만 모든 날들이 반짝이지만은 않았죠. 애증의 도시 서울에 살며 뼛속까지 만성적으로 자리 잡은 불안과 자기 검열은 섬에서도 잊을만하면 고개를 들었고, 내가 선택한 삶이니 더 잘 해내야겠다는 생각에 또 다른 형태의 번아웃에 시달렸어요. ‘파라다이스’에도 인종차별과 성차별, 온갖 불평등이 만연했고,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 사회생활과 정치의 터는 국제적으로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회색빛 빌딩 숲에서 에메랄드빛 해변으로 배경만 바뀌었을 뿐 근본적으로 같은 모순을 다른 형태로 겪는구나, 하는 허탈감에 괜한 오기까지 생기더군요.      


이유도 없이 계기도 없이 모든 게 무너져 내린 듯한 날이었습니다. 섬에서 보낸 수많은 시간에 대한 물질적 결과를 스스로 채근하며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성적표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결국, 좋은 성과를 내는 데 실패했다는 자책과 함께 우울과 불면, 불안을 거쳐 자기혐오에 시달렸죠. 그렇게 무기력해지던 저는 점점 체념하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절망이 저를 삼키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호흡이 가빠져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검은 천장이 내려앉고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던 저는 당장이라도 발코니로 달려 나가 뛰어내릴 것만 같은 충동에 사로잡혔어요. 태어나 처음 겪은 공황 장애 증상이었어요.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손에 잡히는 대로 가까운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Help me.” 허겁지겁 달려온 친구는 자신의 집으로 저를 데려갔어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우리는 아주 길고 무거운 밤을 보냈지만, 그 친구는 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고, 저 또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어요. 가끔은 아무런 설명조차 필요 없을 때가 있잖아요.


저는 그 섬에서 천국과 지옥, 모두를 경험했어요.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푹 안겨 살 수 있는 ‘파라다이스’도 한순간에 지옥이 되는 건 역시 공간을 채우는 사람이죠. 욕망이 그득한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하거나, 일한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거나,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는 건 괜찮았습니다. 정작 저를 극한의 불안과 공포로 몰고 갔던 건 이 흔들림은 삶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끝이 없을 거란 아득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만큼 스스로 무력하고 무기력해질 때가 없었죠. 같은 이유로 누구는 삶을 포기하기도, 반대로 절실히 삶에 뛰어들기도 하지요. 저는 이미 ‘파라다이스’에서 스스로 삶을 버린 친구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기에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며 정신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폭풍우에 뒤집어진 시커먼 망망대해에 맨몸으로 버티는 심정이었어요. 춥고 무섭고 서러웠습니다.       


이후 몇 달간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멕시코로 떠났어요. 이미 가본 곳이기도 했고,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제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만한 일자리를 제안받기도 했거든요. 오랫동안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상하죠. 멕시코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는데 마음이 전혀 동하지 않는 거예요. ‘이상하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거였는데?’      


멕시코에 도착해서도 매일매일이 고통이었어요. 사람들이 ‘파라다이스’라 부르는 그곳에서 저는 혼자 마음속 동굴을 파고는 빛 한 줌도 없는 곳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무도 듣지 않는 절규에 말라가고 있었어요.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결국 저는 지금까지 살며 늘 그랬듯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제 온몸과 마음, 영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거든요.      


멕시코로 떠나는 것 자체가 큰 결정이었기에 멕시코에 간지 3주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서도 저는 불안감에 서성였어요. 내가 지금, 제대로 된 결정을 하고 있나, 나는 스스로 얼마나 신뢰하는가. 결정을 내렸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결정을 내리고도 스스로 믿고 그대로 행동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고, 이후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 수 있는지, 제 인생의 또 다른 큰 파도를 넘어야 하는 시간이었죠. 그 파도를 넘는다 해도 이후 밀려오는 여운을 오롯이 견뎌야 했어요. 아, 쉽지 않은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걸 직접 경험하며 얻는 시간의 결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결국 삶을 더 단단하게, 현명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실패나 좌절은 언제나 아프지만, 저는 여전히 경험주의를 지지합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


제 삶이 방황의 경험으로 가득한 이유는 스스로와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섬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른 섬에 닿으려 무던히 애를 쓴 거죠.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호기롭게 작은 뗏목을 타고 거친 조류를 거슬러 다른 섬에 닿으려 떠나는 모험을 좋아했어요. 그러다 어설프게 철이 들기 시작할 때 즈음, 저는 지레 겁을 먹고 세상 어느 섬에도 닿지 않는 망망대해로 도망쳤죠. 한국에서 서른 넘어 뒤늦게 정착한 4대 보험이 보장되는 첫 직장에서 도망쳐 오랜 시간 저는, 아예 바닷속으로 뛰어들어 숨어버렸어요. 말 그대로 다이버가 된 거죠.      


그 이후로 내내 저는 고래가 되고 싶었어요. 이 행성의 2/3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는,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관대하며 자유로운 존재, 고래요. 누군가는 저를 보고 ‘용기 있다’ 말하지만 제가 바닷속에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늘리고 뭍에 있는 시간을 줄이려고 했던 건 ‘두려움’이자 ‘자기 방어’였어요. 어쩌면 그래서 다른 의미로의 ‘도망’ 일 수도 있겠네요.      


겁도 없이 작은 뗏목을 타고 섬을 나섰다가 폭풍우에 대차게 거절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방황하다 찾아든 숲을 한껏 움츠러든 어깨에 소심해진 발걸음으로 거닐었어요. 물속에서보다 물 밖에서 숨쉬기가 더 어렵고 버거운 건 왜일까요. 여전히 스스로 선택한 삶에 거부당했다는 패배감과 배신감에 휩싸여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 한동안은 또 방황했어요. 성공한 작가가 되려면 거절에 익숙해져야 한다는데, 저는 삶으로부터의 거절에 여전히 번번이 휘청거려요.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삶을 쓰는 작가이지만, 이 모든 실패와 좌절, 거절과 낙담, 절망과 우울을 근사한 이야깃거리를 위해 일부러 고통을 겪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한동안 저는 나만의 섬을 돌보는 데에 집중했어요. 폭풍우에 부서진 오두막을 고치고, 강풍에 쓰러진 야자수도 일으키고, 망망대해 미지의 무언가를 쫓느라 정작 제대로 돌볼 틈이 없었던 나의 섬을 말이죠. 그러면서 오랫동안 틀어졌던 엄마와의 관계를 다시 가꾸고, 엄마와 아빠의 늙어가는 모습을 함께 하며 그동안 못 챙긴 생일과 기념일,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이 지금 저에겐 파라다이스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으로 돌아와 쉬는 시간을 좀 보내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왜 그리 온몸과 마음이 멕시코를 거부했는지.      


숲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내내 귓가에 맴돌던 노래가 있어요. 바로 멕시코의 지옥 같은 3주 내내 들었던 모나 라페르타(Mon Laferte)의 ‘Tu Falta De Querer’였죠. 여러분도 한번 꼭 들어보세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이든, 일이든, 열정이든 무언가를 잃는다는 한 서린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스페인어를 전혀 못 하는 저도 노래의 감정에 압도돼 그녀와 함께 울컥해 눈물을 터뜨렸어요.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밤 비행기 안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내려다본 세상의 불빛이 꽤 괜찮아 보이는 거예요. 창자가 뒤틀릴 것 같은 방황과 고통 속에서도 모든 것이 모순되게도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어요. 그래서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죠.      



ⓒ 하루의 섬


Mon Laferte ‘Tu Falta De Querer’




그 모든 삶의 경험과 실패와 고통, 기쁨,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저는 지금 아주 평안해요. 깊은 해저 바닥으로 침잠한 고래의 사체처럼 단단한 바닥에 닿아 어둠만이, 고요만이 가득한 곳에서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를 반복하다 보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스스로 읊조리게 되더군요.          









마음과 영혼이 가난할 땐 수영을 해요     


‘실패’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의기소침진 상태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스마트폰에 파일을 옮겨두고 미루고 미루다 못 보던 <엘리멘탈>을 봤어요. ‘불’로 상징되는 소수민족은 늘 외부인과 이방인으로 치부되고 알게 모르게 살면서 체득된 규정에 스스로 맞추며 ‘물’의 세계와 섞이지 않으려 하죠. 어쩌면 저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 조상과 환경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그렇게 저란 사람의 바탕이 되는 걸 부정하고 바꾸려고만 했던 것 같아요. ‘실패’라는 말 자체도 스스로 규정짓고 스스로 새긴 이름표이자 주홍글씨이지, 사실 이 세상 그 누구도 저에게 크게 신경 안 쓰거든요. 우리는 모두 각각의 섬이니까요.      



영화 <엘리멘탈> ⓒ 월트디즈니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엔 이곳에서 어떻게 또다시 살아남아야 하나 걱정부터 앞섰어요. 여전히 한국 사람들은 ‘돈, 돈, 돈’을 외치고, 제 유튜브 계정 알고리즘이 한국으로 활성화되며 추천 콘텐츠에 ‘월 천 버는 방법’ 타이틀이 줄을 서더군요. 아직까지도 MBTI 테스트를 안 해본 저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의 계정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10년 전 한국을 떠나던 때와 지금의 저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 


일단 저는 스스로 이쁜 구석도 못난 구석도 모두 가여이 어여삐 여기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리고 제 섬을 ‘월 천 벌기’ ‘갭 투자’ 말고, ‘자존’과 ‘본질’로 채우는데 집중하기로 했어요. 오랜 시간 망망대해를 떠 다니다 닿았던 작고 아름다운 외딴섬에서 배운 생존 방식으로 저는 지금 이 대한민국이라는 섬에서도 살아남을 작정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정말 ‘실패’라는 건 없네요. 이 섬, 저 섬 여행을 다니던 시간과 경험이 있었기에 저는 비로소 나만의 위도에 꼭 맞는 섬을 짓게 되었으니까요.      


다시 한번, 하루의 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자신만의 위도를 찾아 섬을 짓길 바라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이 섬, 저 섬 기웃거려 보는 거예요. 그 시간을 절대 아까워하지 마세요. 그렇게 자신만의 위도에 맞는 섬을 찾는 거예요. 천천히, 급할 게 없어요. 이 섬이 아니면 어때요.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섬이 이 바다엔 더 많고, 그리로 가볼 기회가 생겼는걸요.      


모든 건 상대적이에요. ‘미라클 모닝’이라며 새벽 3시에 기상하는 용기도 있지만, 잠들지 않은 용기도 있어요. 싸울 용기가 있다면, 도망칠 용기도 있죠. 세상은 하루를 조각내 계획을 세워 알차게 살라 하지만, 하루를 너른 여백으로 두른 사람들의 용기도 있어요. 한국 사회는 다름을 존중해야 해요.     

 

단, 자신만의 섬에 고립되지 마세요. 자발적으로 외부, 문명 세계와 단절이 가능하지만 가끔은 배를 타고 이웃 섬에 들러 안부를 살피거나 수영을 할 줄 알아야 해요. 여기서 수영이란, 인문, 교양, 문화, 글쓰기, 사색, 명상, 토론 같은 영혼의 교육을 말해요. 섬에 든다는 것 자체가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는 의미겠지만, ‘나는 섬이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이해와 공부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삶으로부터 거절당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본인 스스로에 부끄럽고 창피해 못 견딜 만큼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스스로 그걸 ‘실패’라 규정짓는 순간, 그때부터 나의 지옥은 시작됩니다.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지죠. 저 또한 오랜 섬 생활을 정리하고 호기롭게 떠난 지구 반대편에서 무너진 경험은 바다인 줄 알고 신나게 놀던 물고기가 여태 있던 곳이 아쿠아리움이라는 걸 깨달은 것처럼, 결국 삶의 진정한 자유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실망감과 자책, 좌절에 익사 직전이었죠.     


이럴 때면 사라진 줄 알았던 자기혐오가 고개를 쳐들고 저를 공격해요. 우리는 왜 이리 스스로에게 이리도 가혹할까요. 하지만 이것도 몇 번 해봤다고, 저는 마음과 영혼이 가난해질 때면 수영을 해요. 작년 ‘파라다이스’에서 공황 장애를 겪은 이후 꾸준히 공부하고 훈련했던 명상과 호흡법, 운동을 하며 스스로 돌봐요. 저를 살린 방법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이 다양한 수영법을 나누고 싶어요.           








우아함과 고통은 비례하니까요  


혹시 스쿼트하면서 울어본 적 있나요? 나를 생각하는 나 자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떻게든 나아지려 노력하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애틋해서, 나의 생존과 보호 본능이 하도 기특해서, 나의 아름다운 영혼이 가여워서. 그리하여 저는 누군가의 관대함과 친절, 관심, 칭찬을 바라는 대신 그 모든 걸 스스로 주기로 합니다. 우리는 타인에겐 잘 하면서 정작 자신에겐 그러지 못해요.


수년간의 ‘파라다이스’ 생활을 끝내고 ‘숲으로 간 고래’가 된 저에겐 지금, 티셔츠 3장과 팬츠 한 벌, 신발 한 켤레가 있어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저는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저에겐 온몸과 마음으로 겪어낸 경험이 있어요. TOEIC은 만점인데 ‘하이, 파인, 쌩큐, 앤유?’가 의사소통이 전부인 연봉 높은 직장인보다 영어도 잘해요. 몸도 건강해요. 무엇보다 스스로 몸의 변화를 재빠르게 알아챌 수 있는 삶의 여백이 생겼어요. 아닌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정의감과 용기도 있어요. 가진 게 없기에 적어도 주식이나 부동산, 감세 때문에 사회의 약자를 모른 채 하거나 진보와 진전에 반기를 들지 않는, 얍삽한 어른이 되지 않았어요. 욕망에서 최대한 멀어진 삶을 삶다 보니 진정 삶에서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 깨달았어요. 한국의 수십억짜리 아파트에 살면서도 층간 소음으로 서로를 죽도록 증오하는 서울보다 작은 외딴 시골섬 판잣집에서 더 행복했던 사람들과 지냈던 행복한 경험이 있고요, 언제든 ‘아이 엠 낫 오케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도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에겐 목소리가 있어요. 철학적인 아이러니 중 하나는 우리는 정작 자신의 목소리를 잘 모른다는 건데요. 이 세상엔 발성기관에서 나는 소리와 자신의 마음의 소리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요. 다른 이의 말을 빌리지 않고도 경험을 통해 제 생각을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목소리가 있다면, 그걸로 다 된 거 아닐까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나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답했어요. 저는 그저 한 시대, 한 세대, 경제적 지표에 이용되다 말 뭉뚱그려진 숫자 안에 포함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88만 원 세대’ ‘잉여세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번째 세대’ ‘딩크족’ ‘82년생 김지영’ 같은 사회에서 편리하게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분수에 맞게 살라는 믿음을 확고히 하는 온갖 키워드와 카테고리의 감옥에 갇히고 싶지 않았어요.      


그동안 나만의 이야기를 가지려 수많은 경험을 했는데, 마침내 찾은 나만의 목소리를 어떻게 쓰면 될지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죠. 이제 때가 왔어요. 저는 평생 어딘가를 기웃거리고 방황하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던 사람이었는데, 이 모든 게 결국 나만의 위도에 맞는 섬을 위한 긴 여정이었던 거죠. 제가 어디에 있든 마음이 지옥이면 천국도 지옥이 되고, 마음이 천국이면 감옥 안에 갇혀도 천국이라는 걸, 이것도 떠나보지 않았다면 미처 알지 못했을 거란 걸 깨닫고 나서야 저는 스스로 마음 안에 섬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 풍부한 삶의 경험을 나만의 위도에 꼭 맞는 섬에 앉아서, 잠시 이렇게 제 섬에 들른 이웃 섬 주인인 여러분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이의 고통을, 행복을, 삶 자체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공감하고 존중하고 바라봐 주는 것. 그게 우리 모두에게 지금, 필요한 것 같아요. 우리는 서로를 지나치게 평가하고 재단하고 상관해요. 스스로 섬을 만들어 가끔은 모든 이의 무단침입을 막는 것도 좋아요.      


한 인생 선배에게 “나이 먹으면 사는 게 덜 힘드냐”라고 물었더니, “안 그런 척하는 능력만 는다”라고 답하데요. 그러니 마음껏 티 내세요. 힘들면 힘들다고,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도 지르고 투정도 부리고 짜증도 내세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리고 다시 시작하세요.      


우리 존재의 목적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입니다. 무슨 일을 하고,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라,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마음의 상태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니까요. 나의 삶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나의 선택이에요. 지금의 내 모습은 과거의 내가 선택한 모습이에요. 이 말은 곧, 미래의 내 모습 또한 지금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저는 불안 대신 평온을, 극단 대신 균형을, 자만 대신 겸손을, 자존심 대신 자존감을, 시기와 질투 대신 친절과 공감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인디밴드 라이프 앤 타임의 ‘호랑이’ 가사처럼 우아함과 고통은 비례합니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고통은 결국 우아한 기념품으로 삶의 한켠에 남을 거예요. 어쨌든, 삶은 계속되니 우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요. 



라이프 앤 타임 ‘호랑이’









여전히 방황하고 흔들리고 여리고 예민하고 상처가 많아 고단한 우리. 그래서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공감도 잘해 세상에 선한 보탬이 되는 당신의 영혼은 그래서 더 아름답습니다. 당신만의 위도에 꼭 맞는 섬에 닿으면 저를 꼭 초대해 주세요.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섬이지만, 하나의 큰 바다 안에 함께입니다.      


나만의 위도를 찾아 떠나는 여정, ‘하루의 섬’의 첫 번째 이야기를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여러분의 경험이나 고민을 나눠도 좋고, 다음에 다루면 좋을 이야기 주제에 대한 제안도 좋아요.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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