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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u Apr 10. 2024

저는 가정 폭력 피해자입니다

또 다른 가해자가 되지 않겠다는, 그리고 폭력의 되물림을 멈추겠다는 다짐


나만의 위도를 찾아서, ‘하루의 섬’ 두 번째 이야기.     


안녕하세요, 아일랜더 여러분! ‘하루의 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섬지기, ‘하루’예요.    

  

처음 만나는 분들을 위해 제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이십 대는 홍대 길거리에서, 삼십 대의 반은 늦깎이 잡지 에디터로, 또 나머지 반은 태국의 작은 외딴섬 바닷속에서 보낸, 방황이 전문인 작가이자 여행가, 프로페셔널 다이버입니다. 얼마 전까진 해외에서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게 다이빙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바다에 기대어 밥을 벌어먹었어요. 그동안 제 삶의 고백이 사람들에게 거울로 비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써 내려갔던 에세이가 브런치 특별상에 선정된 행운으로, 작년 여름의 끝자락엔 <서울에서 도망칠 용기>라는 에세이를 정식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각각 따로 떨어진 섬이란 생각을 해요. 이따금 근사한 보트를 타고 이웃 섬에 놀러 가 화려한 파티를 즐기기도 하고, 또 어떨 땐 낡은 뗏목을 타고 나갔다 갑작스럽게 만난 풍랑으로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또 어떨 땐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은 건실한 다리가 섬과 섬 사이에 생기기도 하죠. 하지만 결국엔 모두 제각각 섬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이는 제 섬이 없어 남의 섬을 빼앗기도 하고, 얹혀 지내기도 하죠. 또 어떤 이는 섬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않고는 너른 바다를 떠다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섬과 섬 사이가 잠시 연결되는 그 순간, 오로지 당신과 내가 연결되는 그 순간을 위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또다시 바다로 나아갑니다. 또다시 상처투성이가 되어 돌아올지도 모른단 두려움을 안고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갑니다. 이 아름다운 반복의 여정이 모이고 모여 삶이 되니까요.           

풍랑이 잦아든 날이면 그저 달큼한 코코넛 하나 따 먹으며 붉게 물든 수평선을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는, 나에게 꼭 맞는 온도와 습도와 바람, 냄새를 가진, 나만의 위도에 꼭 맞는 나만의 섬을, 나만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찾아내는 과정도 삶, 그 자체니까요.            


망망대해를 떠다니다 비로소 닿은지도 어디에도 없는 무명의 섬누구도 재단하지 않고판단하지 않고재촉하지 않는 곳제 목소리를 따라오세요이 섬에서 당신은 안전합니다.       






                   

나는 내 안의 엄마를 죽여야 했다

‘아이 킬드 마이 마더’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는 19세의 자비에 돌란이 감독의 데뷔작이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자아에 깨어나는 아들이 겪는 엄마에 대한 복잡한 감정, 사랑과 증오 사이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죠. 한편, ‘엄마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반어적인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 안의 엄마를 죽여야 했다’는 영화 속 대사는 동시에 의미 있는 대화의 시작점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 <아이 킬드 마이 마더>


지구에 태어나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가족 관계의 장애와 그 관계 속에서 경험하는 깊은 감정과 내적 갈등을 다룬 이 영화는 제62회 칸영화제에 초청받아 세 개의 트로피를 거머쥐며, 자비에 돌란이라는 천재적 감독의 등장을 알렸습니다. 이후, 한국 개봉 당시 영화 홍보 작업과 GV에 제가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자비에 돌란의 다섯 번째 연출작 <마미>는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저는 10년 가까이 해외를 떠돌았습니다. 어떻게든 집과 가족, 한국으로부터 떨어지고 싶었죠. 시간이 흘러, 제 인생의 한 챕터를 끝맺기 전, 저는 오랜 시간을 보낸 태국의 작은 외딴섬에서 길고 느린 작별을 하고 있었습니다. 쉽지 않았어요. 불안과 무기력, 우울에 시달리다 지금, 여기의 내 인생은 어쩌다 오게 되었을까, 하는 묵은 먼지가 쌓인 질문에 빨려 들기 시작했습니다.      


“힘들면 집에 와서 쉬었다 가.” 깊고 깊은 바다를 건너 도착한 엄마의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봤어요. 그러고도 반년이 넘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뭉개고 있었던 건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의미가 결코 제 마음의 치유를 보장하지 않을 거라는 의심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시달리는 불안과 우울과 고통보다 엄마로부터 또다시 받을 상처가 더 클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공간을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들이 공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저는 태어남과 동시에 알았습니다. 아빠는 술을 마시면 난폭해졌습니다. 평소에도 폭언과 무관심, 무책임으로 일관하던 사람이었지만, 술을 마시면 더했습니다. 그런 날이면 당연히 엄마와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웃으며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험악한 말싸움으로 번지더니 물리적인 폭력이 더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아직도 반지하 방에서 얼마 있지도 않은 온갖 살림살이를 집어던져가며 서로에게 저주를 퍼붓던 엄마와 아빠의 경멸 가득한 얼굴이 생생합니다. 엄마의 목을 짓누르던 아빠의 팔꿈치에 퉁퉁 부은 눈을 하고는 겨우 고개만 돌려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마치 오늘 아침 본 것 같죠. 그때의 온도와 습도, 냄새, 널브러진 물건들, 그 집의 모든 것을 기억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스스로의 무능력함을 자책하던 저는 채 열 살이 안 된 초등학생이었습니다.     


비만 오면 물이 넘치던 반지하 방에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며 목 터지게 울던 이유는 집이 떠내려갈까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아빠의 경제적 무능과 자신의 팔자를 탓하는 엄마의 푸념이 시퍼런 싸움으로 번져 누구도 이기지 못할 무의미한 판정승으로 끝나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네 살인가, 다섯 살 때인가. 엄마는 아빠와 크게 싸우고는 울다 지쳐 잠든 저를 깨워 한밤중 어디론가 저를 데려갔습니다. 고모네 집이란 걸 처음엔 몰랐습니다. 엄마가 저를 맡기려는 걸 고모가 거절하자 하는 수없이 저를 데리고 나와 길가에 서서는 한숨을 내쉬던 엄마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날씨가 무척 추워 엄마의 입에서 하얀 김이 크게 나왔거든요. 엄마의 공허한 눈빛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나는 언제든 버려질 수 있는 존재구나.’   

  

엄마가 가끔 싸준 도시락엔 곰팡이가 피어 뚜껑을 열었다 닫은 적이 일쑤였고, 운동회 날이면 김밥집에서 산 김밥을 가지고 늘 다른 가족의 돗자리에 어정쩡하게 엉덩이 반만 걸치고 먹곤 했습니다. 졸업식엔 여지없이 싸움이 일어나 엄마, 아빠가 동시에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죠. 가족 누구의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함께 보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 집은 늘 가난했습니다. 딱 하나 있는 자식이 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맞벌이를 했는데도 우리 집은 신기하게도 늘 돈 때문에 싸웠죠. 인터넷도, 케이블 TV도, OTT도 없던 시절, 자정이 되면 모든 정규방송이 끝나고 컬러바가 화면에 뜨면서 ‘삐-’ 소리가 나왔는데, 시커먼 사람 머리가 이따금 창문 뒤로 지나다니는 무서운 반지하 방에서 저는 그 소리라도 들으면 나을까, 이불에 얼굴을 잔뜩 묻고 ‘나는 이미 버려졌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정리벽이 생긴 건. 자기 전엔 별로 크지도 않은 집안을 수 차례 돌아다니며 문은 잠갔는지, 가스 밸브는 닫았는지, 다음 날 숙제는 다 했는지, 준비물은 챙겼는지 스스로 확인했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들인 버릇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엄마는 그마저도 “제 아빠를 닮아서” 불만이었습니다. 엄마보다 아빠를 닮은 제 외모와 성격은 언제나 아빠에 대한 엄마의 복수심을 자극할 뿐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저는, 살아남으려고, 스스로 보호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무엇을 해도 지지받지 못하던 열 살 여자아이는 ‘내가 못나 엄마에게 외면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피해망상과 자책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엄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건강하지 않게 독립적인 아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10년 정도 산 어린아이의 인생 경험에 비추어 머리를 짜낸 끝에 다다른 결론은 엄마의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제가 태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애초에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었나’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두 자릿수로 나이가 바뀌면서 저는 늘 친구들과 있는 걸 좋아했습니다. 애정결핍이었지요. 또, 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이기도 했어요. 엄마의 마음에 들고 싶어 안달이던 마음은 친구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에 들어서며 엄마와 아빠는 여전히 싸웠지만, 저 역시 엄마, 아빠와 싸우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엄마는 저를 보고 “어쩜 그리 네 아빠를 닮아서”라는 말을 무심코 내뱉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저는 상처를 받지요. 상처 가득한 어린 시절의 저에게 엄마가 진심 어린 사과 한 번 해달라고, 내가 바라는 건 그거 하나뿐이라고 해도 엄마는 다들 그러고 살았다며, 그냥 잊고 살라고 하죠. 육십이 넘은 엄마도 이따금 자기 어릴 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서운하게 한 걸 말하면서도요. 사람이 참 야속하죠. 제 상처는 못 잊어도 남의 상처는 쉽게 금방 잊습니다.      


제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안타까운 건 폭력의 피해자인 엄마가 그걸 명분 삼아 어린 저에게 결국, 가해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에요. 엄마 말처럼 다들 그러고 사는데, 왜 그 어린 딸 하나, 가슴으로 따뜻하게 품는 대신 감정의 쓰레기통처럼 대해야만 했는지. 그저 안타까워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었을지 모를,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그래서 저는 제 안의 엄마를 죽여야 했어요. ‘엄마 때문이야’라는 피해의식을 제 인생에서 지우려고 했죠. 엄마의 공허한 눈을 알아봤던 초등학생 딸이 이제 장년이 되어 그때의 엄마가 지독한 우울감과 무기력함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걸, 같은 여자로서 너무 어리고 서툰 엄마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는 인간이 태어나 처음 겪는, 근본적인 관계예요. 이 복잡한 관계는 사랑과 증오, 존경과 반항, 의존과 독립의 감정이 혼재된 ‘애증의 관계’이기도 하죠. 엄마, 아빠와의 관계로부터 제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답을 얻을 수 있죠. 또 그래야 앞으로 제가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 있고요.      


저는 어렸을 때 항상 그 답을 찾아다녔어요. 하지만 엄마, 아빠는 협조적이지 못했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가 더 깊은 법이고, 또 가장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많은 감정적 충돌이 생기다 보니, 특히 저처럼 자아와 의지가 강하고 독립적일수록 충돌의 확률과 강도는 더 높아질 뿐이었어요.      


어린 시절 폭력을 경험한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겪은 트라우마는 심각했어요. 어린 시절, 모든 관계의 근본이자 출발인 엄마, 아빠는 제가 가장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했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로부터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타인을 신뢰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어요. 사춘기에 접어들며 친구들과 한창 어울리던 시기엔 ‘나 같은 거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지’ 하며 자기 파괴적인 성향까지 드러냈죠. 어쩌면 ‘나 좀 봐주세요’ 같은 정서적 상처의 표현이었을지도 몰라요.      


무엇보다 제가 고통받았던 건 낮은 자존감이었어요. 항상 저는 스스로 가치 없는 존재라 생각하고 스스로 재단하고 통제하며 처벌을 내렸죠. ‘내 결국 이럴 줄 알았지’ ‘나란 애가 그렇지 뭐’ 하면서 끊임없는 자기 비하적인 생각과 감정에 싸여 있었어요. 친구들 대부분이 저를 지나칠 정도로 겸손하다 말하지만, 사실이에요. 저는 서울과 한국, 가족을 떠나기 전까지 늘 스스로 저주를 퍼부었어요.      


사람들이 제 내면의 저주를 눈치채지 못했던 건 제가 자신의 감정을 마비시키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감정을 건강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무뎌지는 자기 방어를 지속해 온 거죠. 그래서 저는 늘 명랑하고 건강한 사회구성원의 똑같이 생긴 가면을 쓰고 얼굴에 쥐가 나도록 웃다가 집에 돌아오면 지쳐 쓰러지곤 했어요. 어디에 가서도 제가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어요. 스스로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이라는 고백은 엄두도 못 냈죠. 그 즉시, 저는 사회에서 따돌려질 테니까요.   

   

저는 여전히 강압적인 몸짓과 표정, 말투를 보이는 사람들 앞에선 얼어붙어요.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안절부절을 못하며 힘들어하죠. 엄마는 항상 제가 예민하고 유난스러워 그런 거라 면박을 줬지만, 인간의 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바닷속에서 다이빙하며 깨달았어요. 제가 일종의 PTSD(포스트 트라우마틱 스트레스 장애)를 갖고 있었다는 걸.      


이 사적인 폭력의 역사를 이제야, 마침내 여러분에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건 결코 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겪은 끔찍한 폭력이 더 이상 제 삶을 지배하지 않을 거란 확신과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보고 듣고 자란 그 끔찍한 폭력성이 제 안에 잠재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있어요.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든 폭력을 가하진 않을까, 스스로 잠재의식까지 의심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끝없이 되풀이되는 이 폭력의 사이클을 끊어버리고 싶거든요.      


대체 모두가 불행한 이 결혼을 애초에 왜 했는가, 라는 질문을 아빠에게 한 적이 있어요. 결혼은 아빠에게 지긋지긋한 집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명분이었죠. 아빠는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걸핏하면 만취해 골목이 떠나가도록 요란하게 싸웠다던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어렸을 적 기억만 떠올려도 짐작이 되죠.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라요. 한국의 가부장적인 사회와 군대 트라우마도 영향이 있었겠죠. 하지만 그 모든 폭력의 가해자들을 뒤로하고, 아빠는 비겁하게도 자신보다 훨씬 약한 아내와 딸을 피해자로 삼아 폭력을 대물림하는 걸 선택했어요.      


하지만 더 나쁜 건 아빠가 배우고 노력하며 성장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경향성과 예측을 거스를 수 있는 의지가 있는 동물이잖아요.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은 배울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아빠와 같은 불우한 환경의 사람들은 모두 자식에게 똑같은 폭력을 대물림한다는 말인데, 그러면 이 세상이 너무 비참해지잖아요. 물론, 과거의 경험이 현재와 미래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새로운 관계와 경험을 통해서 치유와 성장을 위해 아빠는 노력해야 했어요. 가장의 역할은 바라지도 않고, 적어도 한 가족의 구성원이라면, 그래야 했어요.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저는 어찌어찌 가면을 쓰고 안간힘을 쓰며 상처 하나 없는 척 숨기고 살던 서울의 삶에서 도망치기로 했어요. 그런 제 모습이 가식적이고 역겨워 스스로 봐줄 수가 없게 된 거죠. 엄마로부터, 아빠로부터, 그리고 제가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던 삶으로부터 한참 멀어져서야 돌아보니,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그제야 제 가엾은 삶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우선 받아들여야 했어요. 구김살 하나 없는 맑고 쾌활한, 태어날 때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단단하게 굳어진, 그 해맑고 근본적인 믿음과 사랑, 행복을 가진 사람이, 저는 결코 될 수 없다고, 그리고 더 이상 그렇게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 대신 저는 자격지심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온갖 상처로 범벅인 사람이라는 걸 아프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거기서부터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맹목적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나게 됐어요. 제가 태어나 자라며 인식한 돈의 개념은 폭력의 행사를 막기 위한 임시방편뿐일 거란 걸 몰랐죠. 어렸을 땐 엄마와 아빠 사이에 오가던 경멸과 혐오로 가득한 싸움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엄마, 아빠처럼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다시 생각해요. 그때, 엄마, 아빠에게 돈이 있었다고 우리가 행복했을까?     


그렇게 발가벗겨진 제 모습을 마주하고 나니 얼마나 가엽던지요. 지금까지 버텨준 스스로가 얼마나 장하고 찡하던지요. 경멸의 언어와 물리적 폭력으로 가득했던 섬에서 도망쳐 나만의 섬에 다다랐을 때 저는, 그 섬을 아름다운 꽃들과 다정한 숲, 평안의 바다로 채우기로 결심했어요. 그곳에서의 화려한 메이크업을 벗겨낸 제 모습을 온전히 스스로 사랑해야겠다, 깨달았죠. 누구에게 사랑받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믿고 지지해야 한다는 걸 배웠습니다.      


ⓒ 하루의 섬


폭력은 아주 작은 곳, 가정으로부터 시작해 사회로 번져가요. 맹목적이고 극단적인 차별과 혐오로 가득한 이 세상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겪은 폭력의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폭력의 피해자였던 사람들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약자와 소수의 편에 서서 연대하는 대신 오히려 가해자가 되려고 노력하죠. 그래야 스스로 안전하다 느끼니까요. 결국,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알아채지 못한 채 모든 종류의 폭력은 대물림됩니다.      


이 고통을 내면화하고 끝도 없이 나를 갉아먹는 자기 파괴적인 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이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키거나 다른 긍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저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심지어 엄마, 아빠라 해도 더 이상 저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저는 사랑받기에 마땅한 사람이고, 제 인생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가치 있으니까요.      


폭력의 되물림의 사이클을 끊어내기 위한 여정 중 저를 살린 건 문학과 영화, 음악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늘 저는 글을 썼고, 스스로 내면을 객관화시켜 들여다보고 관찰했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폭력을 쓰는 아빠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저에게 대화와 설득, 논리력,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배우게 했죠. 제가 겪은 현상과 사건, 사고들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소화시키는 데 글쓰기는 큰 도움이 되었고, 때론 치유의 과정이 되었어요. 그 덕분에 공감력도 높아졌고요. 그 공감력 덕분에 잡지사 에디터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같이 울고 웃을 수 있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소중하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프리다 칼로, 고흐와 뭉크와 같은 화가들을 비롯해 커트 코베인과 에미넴, 메리 J 블라이즈까지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그들의 트라우마 가득한 경험과 고통을 승화한 작품들이 언제나 제 곁에 있었죠.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는 가정 폭력으로 고통받았던 갤러거 형제들이 세계적인 록 밴드가 되어 무대 위에서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 깔고 노래하던 태도에 고무된 저에게 인생의 주제가가 되었습니다. 서른 넘어 늦깎이 잡지 에디터가 되어서 서울에서 도망치기 전까지, “노엘 갤러거 인터뷰하는 날이 내 기자 생활 마지막이 될 거야” 하고 말하고 다녔죠. 그런데 웬 걸요.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 잡지사 퇴사 전 마지막 인터뷰이가 바로 노엘 갤러거였어요. 말 그대로 ‘마이크 드롭’ 하고 나왔습니다.      


Oasis 'Don't look back in anger'


존 레논은 또 어떻고요.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가족 간의 복잡한 관례로 인해 정서적으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그런 경험을 음악과 가사에 깊이 있는 감성과 사회적 메시지로 담아냈죠. 그는 작품을 통해 스스로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고 위로했어요. 자신이 경험한 폭력을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로 승화시킨다는 건 참 아름답다는 걸 새삼 느껴요.      


<빌리 엘리어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문라이트> 등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도 저는 혼자가 아니란 걸 알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과 깊은 정서적 연결고리를 맺고,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며, 개인적인 고통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사회적 인식 변화에까지 기여하는 예술은 제게 엄마, 아빠가 되어주었죠.      


영화 <문라이트>



제가 겪은 고통을 들여다보며 다른 이가 겪는 고통에 공감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지, 제가 그 안에서 작게나마 행동할 수 있는 건 없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은 상처를 알아보고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하니까요. 우리는 모두 멀쩡히 길을 걷다가도, 비가 많이 오는 날에도,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다가도 예상치 못한 순간,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타인의 무참한 공격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더 비참하고 처참한 피해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로 합니다. 파괴적인 성향과 폭력성에 저항할 때 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방식을 모방하거나 그 부정적인 특성을 내면화하지 않도록, 괴물과의 싸움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성찰하고 경계하기로 합니다. 이제야 가까스로 폭력의 피해자임을 드러낸 것도 큰 용기이지만, 그 경험으로 인해 상처받았다는 명분으로 그 폭력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혹은 다른 형태로 재현하지 않으려는 노력 또한 게을리하지 않기로 합니다.      


끔찍한 폭력의 경험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제대로 인식하고 똑바로 들여다보는 훈련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통스러우니 피하고 미루게 되지요. 하지만 자기감정을 제대로 인식하고 표현하는 건강한 방법을 찾기 위해선 제 감정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스스로 행동 패턴을 더 잘 이해하고 관리할 수 있으니까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서포트 그룹에 참여하거나 신뢰할 수 있는 친구나 가족의 지지를 받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긍정적인 롤 모델을 찾아 그들로부터 배우고 영감을 받는 것도 좋고요. 사람과의 관계는 사람으로 치유한다고, 타인과의 긍정적인 관계는 치유 과정에서 큰 힘이 되거든요. 제가 고통스러운 경험과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처럼 상처 많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으니까요.      


오래전부터 시작한 명상과 요가도 꾸준히 하고 있어요. 저에게 마음이 힘들다고 찾아오는 친구들에게도 기본적으로 추천하는 방법입니다. 스스로에 고요의 시간과 공간을 허락하고, 스스로 숨을 고르고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바쁘다는 이유로 스스로에 가장 인색한 현대 사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거든요.



                     




모든 혁명은 내 작고 남루한 침대에서 시작한다

자비에 돌란의 영화 <마미>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양팔로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고 빛을 향해 뛰쳐나갑니다. 영화 내내 인스타그램 1:1 화면 비율을 고집하던 돌란이 이 순간, 1.85:1로 변하죠. <데미안>의 알이 깨지는 순간과 같습니다. 알은 외부의 힘으로 깨지면 ‘끝’이지만, 내부의 힘으로 깨지면 ‘시작’을 말합니다. 각성한 자의 눈빛만큼 생기롭고 아름다운 건 없죠. 자신이 누군지 깨닫고,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입니다.      


영화 <마미>


저는 스스로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꽤 뒤늦게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삶을 스스로 긍정하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아니, 평생 모르고 살다 죽는 이들도 있으니 이제라도 깨달은 것에 고마워해야 할까요. 여전히 엄마와 아빠의 첫인사이자 유일한 대화는 “밥 먹었어?”뿐이지만, 저는 어린 시절의 어리고 서툴고 각성하지 못했던 엄마와 아빠를 용서하기로 합니다. 엄마, 아빠를 증오한다고 해서 외롭고 아팠던 제 유년 시절의 기억은 절대 치유되지 않으니까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자존심을 세우려 일부러 제게 상처가 될 말만 고르고 골라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애처롭고 안쓰럽지만, 이제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엄마와 아빠로부터 정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그 대신 저는 제 운명을 사랑하고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는, 니체의 ‘아모르파티(Amor Fati)’로 방패를 만들려 합니다. 저는 저만의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고, 발성기관에서 나는 제 목소리와 마음의 소리를 일치시켜 가고 있어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엄마, 아빠보다 더 나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폭력의 되물림은 멈춰야 하니까요. 


저는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는,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당신도 그렇습니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심수봉 ‘백만 송이 장미’ 中에서







여전히 방황하고 흔들리고 여리고 예민하고 상처가 많아 고단한 우리그래서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공감도 잘해 세상에 선한 보탬이 되는 당신의 영혼은 그래서 더 아름답습니다당신만의 위도에 꼭 맞는 섬에 닿으면 저를 꼭 초대해 주세요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섬이지만하나의 큰 바다 안에 함께입니다.      

     

나만의 위도를 찾아 떠나는 여정, ‘하루의 섬’의 두 번째 이야기를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피드백은 언제든 환영입니다. 여러분의 경험이나 고민을 나눠도 좋고, 다음에 다루면 좋을 이야기 주제에 대한 제안도 좋아요. 다음 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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