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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Jun 28. 2024

내 삶에서 ‘생존기’라는 꼬리표를 떼기로 했다

‘삶은 축복’이라는 아주 거창하면서도 아주 단순한 진실.

      

오뉴월이 되면 숲속 정원은 화려해진다 ⓒ 조하나


오뉴월이 되면 숲속 정원은 화려해진다. 벌써 여러 해를 살아온 집 앞 오디나무는 지난겨울 과감한 가지치기를 해준 덕에 올해 시꺼멓고 탐실한 열매를 더 많이 맺었다. 진주알처럼 뽀얀 빛깔을 뽐내는 물앵두는 붉은색 앵두만 알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고, 역시 붉은색 앵두와는 닮은 듯 또 달라 헛갈리던 나에게 앵두보다 말랑하고 기다란 보리수는 “네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작년에 데려온 블루베리 나무들도 탐스러운 보랏빛 자태의 과실을 내놓았다.      



숲속의 새들과 나누어 먹을 만큼 모든 것이 풍족하다 ⓒ 조하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빨갛고 하얗고 검은 열매들을 한 손 가득 딴다. 숲속의 새들과 나누어 먹을 만큼 모든 것이 풍족하다. 욕심부리지 않고 내가 먹을 만큼 과실을 따오고 나면 참새가 짹짹거리며 나머지로 수다스러운 아침 배를 채우고, 바람이 불면 후드득 땅에 수북이 떨어진 오디는 동네 강아지들과 숲속 고라니들의 몫이다. 오디에 검붉게 물든 손으로 열매를 대충 물에 씻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고 있으면 입안에서 터지는 새콤하고 달큼한 맛에 숲속의 싱그러운 초여름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추운 겨울을 또 한 번 이겨내고 옥신각신하는 해와 달을 수백 번 기다리며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마시고 터뜨린 열매들의 축제다. 그 열매의 탄생에 아무 보탬이 없었던 내가 결과적으로 이런 호사를 누린다.      



그 열매의 탄생에 아무 보탬이 없었던 내가 결과적으로 이런 호사를 누린다 ⓒ 조하나








숲속에 뜨고 지는 해는 회색빛 고층 빌딩들의 방해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매일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가 지면 기다렸다는 듯 뜨는 달도 매번 모양을 바꿔가며 밤의 여왕의 매력을 뽐낸다. 숲속에선 아무도 꽃이 늦게 핀다고 불평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오기 때문이다. 숲속의 모든 구성원이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반복되어 온 억겁의 순환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해는 뜨고 지며 낮과 밤, 24시간을 주관한다. 달의 위치 변화는 지구의 조수간만의 차로 형상화되고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 작동하는 중력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달은 잉태를 관장하는 여성의 월경주기를 만든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달을 품는다’라는 표현에는 바로 이런 시선이 담겼다. 해와 달의 끊임없는 영속적인 대화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의 주기와 자연의 리듬이 창조되었다.   

   



해가 지면 기다렸다는 듯 뜨는 달도 매번 모양을 바꿔가며 밤의 여왕의 매력을 뽐낸다 ⓒ 조하나



인간의 인지 기능이 계절의 리듬에 따라 달라진다는 학술 연구가 있다. 리에주시립대학교 연구진의 청년 인기 기능 연구 논문에 따르면 실험에 참가한 청년들의 집중력은 6월 중순쯤 하지에 최고치를, 12월 중순쯤 최저치를 나타내고, 기억력은 9월 중순쯤인 추분에 정점을, 3월 중순쯤 춘분에 최소치를 나타냈다. 인간은 숨을 내쉬고 나서 다음 숨을 들이키며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삶을 지속하며 자연의 순환을 반영한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리듬을 품고 있다.      


시간생리학은 우리 안에 내재한 시계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피곤을 느낄 때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현재 몸에 에너지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알아차리는 방법을 일상에 적용하는 것이다.      


리듬이 동요하면 인간의 몸은 그 즉시 알아차린다. 계속해서 몸이 보내는 경고의 신호를 무시하면 만성질환을 앓게 되고 이를 악화시킨다. 그중에서도 특히 수면주기의 이상은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으로 직결된다. 25년에 걸쳐 8천 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제때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등의 다양한 정신질환으로 고통받았다.   



우리 안에 내재한 시계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따르며 살아야 한다 ⓒ 조하나









얼마 전 요리하다 뜨거운 물에 피부가 깊게 데인 화상을 입었다. 해와 달이 일곱 번 바뀌는 일주일 동안 피부의 표면은 내내 수포로 뒤덮여 천천히 조금씩 ‘회복’했다. 그리고 다음에 돌아온 일주일 동안 피부 속에서 새살이 차오르는 ‘재생’의 과정이 이어졌다. 2주 간의 치유 과정을 지켜보며 나는 마치 자연이 치르는 경건한 의식의 목격자가 된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른들이 건네던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참이었다. 다만 그 말은 시간의 절대적 권력을 뜻하는 게 아닌, 해와 달이 뜨고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순환이 얼마나 관대한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른들이 건네던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참이었다 ⓒ 조하나




누구의 삶에든 사고와 사건은 일어난다. 문제는 바로 그다음, 회복과 재생의 치유 과정이다. 어떤 생명도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춥고 외로운 겨울,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속에서 움트는 생명의 에너지가 끝내 봄을 만드는 것처럼 인생에도 겨울의 미학이 있어야 봄의 생명력과 여름의 다채로움과 가을의 추억을 선물로 알아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을 품은 인간은 늘 생산적일 수 없고, 늘 생기로울 수 없으며, 늘 앞으로만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치로 받아들이고,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며 밤에 깨어있음으로 쟁취한 물질에 취해 교만해져선 안 된다. 겨울의 미학은 때론 멈출 줄 알고, 때론 뒷걸음질 치는 자신을 책망하지 말고, 때론 천천히 가는 자신을 채근하지 말라는 자연의 따뜻한 위로다.     


언젠가부터 나는 ‘생존기’처럼 살았다. 자연스러운 리듬을 통제하며 사는 삶에 대한 명분, 아니 핑곗거리가 필요했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언가로부터 살아남는 삶만이 의미가 있다고 믿었다. 자연스러운 리듬을 거스르다 못해 통제하려는 도시에서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마침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니 ‘생존기’라는 수식어에 가려졌던 진짜 삶이 보였다. 그러자 ‘삶은 축복’이라는 아주 거창하면서도 아주 단순한 진실이 다가왔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에 현혹되지 않고 햇빛의 주기에 맞춰 잠에 들고 깨어나며 나의 모든 감정들을 숲에 걸어놓고 바람에 흘러가는 걸 지켜본다. 썰물과 밀물처럼 들숨과 날숨을 이어가며 나만의 리듬을 찾아 자연의 뜻에 내맡기며 살면, 다른 사람의 리듬을 알아채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매일매일 하루를 기념하고 축복하며 산다.              

                      



나의 모든 감정들을 숲에 걸어놓고 바람에 흘러가는 걸 지켜본다 ⓒ 조하나
매일매일 하루를 기념하고 축복하며 산다 ⓒ 조하나





Washed Out 'It All Feels Right'




*참고자료: 미셸 르 방 키앵 <자연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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