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온몸이 수면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던 바로 그 순간, 태어나 지금껏 내 주변을 맴돌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먹먹한 공간감을 껴안은 미세한 진동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처음엔 시린 듯한 서늘함이었으나 점점 나의 체온에 맞게 데워진 물이 내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치의 여백 없이 에워쌌다.
태어나 처음 만나는 경험이었지만 낯설지 않았고, 나의 출처 없는 두려움을 나긋하게 어루만지며 괜찮다, 괜찮다, 이곳이 태초에 내가 있었던 곳이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치 엄마의 뱃속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아득하게 부유하는 듯한 감각을 경험했다. 누군가 일부러 음소거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일시에 사라진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시끄럽게 살아왔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 눈은 감을 수나 있지만, 귀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때도 언제나 미세한 소리까지 듣고 있는, 항상 활동 중인 감각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단 한 번도 소음에 노출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도시의 온갖 소음을 나도 모르게 온몸으로 흡수하며 살았다. 오래된 다세대 주택에서는 어느 집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올라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는지, 어느 집이 부부싸움을 하는지, 어느 집이 한밤 중 화장실에 가는지, 어느 집이 야식을 시켜 먹는지 등등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을 소리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둘 중 하나다. 소리에 극도로 예민해지거나 아니면 반대로 무뎌지거나. 나는 전자였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채 노출된 세상의 소음 속에서 내가 즐긴 건 음악뿐이었다. 소음을 막기 위해 이어폰을 꽂아 또 다른 소음을 만들었다. 소음으로 소음을 막은 셈이다. 그래서 음악과 음악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더 예민하게 들을 수 있었고, 음악을 전문으로 다루는 기자가 될 수 있었나 보다. 하지만 나는 도시가 끊임없이 뿜어내는 소음에 무뎌지지 못한 대가를 만성 불면증과 편두통으로 치러야 했다.
결국 장기적으로 매일 같이 겪는 소음은 더 이상 소음이 아닌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소음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나중엔 오히려 그 소음이 없으면 어쩔 줄 몰라 불안해졌다. 아주 가끔 침묵을 맞닥뜨리기라도 하면 그게 너무 어색해 보지도 않는 TV를 크게 틀어놓고 일부러 소음을 만드는 나를 보며 나는 도시에 최적화된 사람이라는 자조 섞인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평생 그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 도시의 소음으로 조기 사망자가 급증하고 치매를 앞당긴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2013년, 독일에서 과학자들이 하루에 2시간씩 모든 소리가 차단된 장소에 실험용 쥐를 넣고 실험했더니 대조군과 비교해 ‘침묵의 방’에 놓였던 쥐들의 해마에 새로운 세포가 더 많이 발달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도심 아파트 이웃 간의 층간소음 갈등이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다. 시끄럽다며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린 아래층 때문에 결국 아이를 유산했다는 위층집 산모의 남편은 뉴스에 나와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에 사는데 층간소음으로 아이를 잃었다”라며 자조와 회한을 토해낸다.
어느 날 바다의 수면 아래로 내 몸이 푹 잠기는 순간, 나는 알아챘다. 도시의 소음에 시달리고 시달리다 결국엔 그것에 사로잡혀 스스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체념의 최면에 걸렸던 나를. 육지를 벗어나 바닷속으로 들어갈 때 잠잠해진 건 세상의 소음뿐 아니라 내 머릿속 온갖 불안과 두려움, 우울이 머리채를 부여잡고 서로 으르렁거리던 전쟁의 소음이었단 걸. 세상의 물리적인 소음에 정신이 팔려 내 머릿속 스스로 만든 소음조차 모르고 살아왔다는 걸. 그리고 다짐했다. 다시는 이 소음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지 않겠다고.
사실 바닷속은 한치의 침묵도 허용되지 않는 아주 시끄러운 곳이다. 육지의 소음이 사라진 그곳은 물고기들이 산호를 뜯어먹는 소리, 산호가 내는 소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바닷속에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내가 스쿠버 장비로 호흡하는 숨소리도 들린다.
숲속 세상 역시 시끄럽다. 새벽녘부터 부지런히 안부를 묻는 온갖 산새와 풀벌레는 해가 지고 넘어가도 지칠 줄 모르고 부지런히 수다를 떤다. 비라도 올라치면 합창단부터 꾸리는 개구리에, 숲속 구석까지 메아리치는 뻐꾸기에, 얼굴은 안 보이고 소리만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숲속의 구성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나는 숲속의 바람 소리를 제일 좋아한다. 바람은 원래 소리가 없다. 형태가 없는 바람이 나무와 풀, 꽃을 스치며 간접적으로 내는 소리를 우리는 ‘바람 소리’라고 부를 뿐이다. 잎이 풍성한 나무들로 빽빽한 숲속에 바람 한 줄기가 들어가면 ‘쏴아- 쏴아-’ 하는 파도 소리로 변한다. 바람이 파도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가 숲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가만히 온몸에 닿는 바람을 느끼며 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는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 바람은 숲속으로 진즉 몸을 숨겨 ‘우웅- 우웅-’ 하며 동굴 소리처럼 운다. ‘빗소리’도 마찬가지다. 온 세상의 만물에 몸을 부딪혀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빗소리가 요란해지면 바람 소리는 제자리를 내어준다.
온 세상의 만물에 몸을 부딪혀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빗소리가 요란해지면 바람 소리는 제자리를 내어준다 ⓒ 조하나
도시를 떠나기 이전의 나는 내면의 태산 같은 침묵을 만나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소음인지도 모르고 익숙해져 버린 소음이 정작 사라지면 그 공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빈 공간은 어떻게든 채우고 메꿔야 한다는 강박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두려워 삶의 어떠한 침묵도 여백도 허락지 못하며 빡빡하고 가난한 영혼으로 살았다.
도시를 떠나기 이전의 나는 내면의 태산 같은 침묵을 만나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 조하나
바닷속과 숲속 세상에서는 더 이상 귀를 막지 않아도 된다. 그러자 자연이 아닌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소음의 빈자리에 침묵이 생겼다. 처음엔 그 거대한 침묵이 어색해 애꿎은 머릿속 소음을 키웠다. 나는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에 마음을 쏟느라 단 한시도 현재를 제대로 붙잡아 본 적이 없었다.
바닷속과 숲속 세상으로 들어가자, 귀를 막지 않아도 세상의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 조하나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난 후 머릿속 소음을 줄이고 나니 마침내 ‘무(無)’의 소리가 남았다. 소리가 아닌 독특한 울림과 떨림으로 느껴지는 침묵의 결이다. 침묵과 친해지고 나면 침묵과 여백, 인내의 가치를 얻어 경청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다가가지 말고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 감각이 나를 침범하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 말이다. 그렇게 나만의 ‘소리의 정원’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며, 나는 숲속에서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찾고, 인생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스스로 존재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