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 미디어를 끊으니 찾아온 삶의 변화.
나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트위터 서비스가 세상에 등장할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써온 ‘헤비 유저’였다. 잡지사 에디터 일을 하면서 각종 문화예술계 소식을 전했고, 아티스트 인터뷰를 준비할 땐 팬들이 궁금한 질문도 받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다이빙을 할 땐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바닷속 풍경, 전 세계 여행자들을 만나며 겪은 문화 차와 다양한 삶의 가치관을 나눴다. 요즘은 인터내셔널 다이빙 센터에서도 강사를 고용할 때 활발한 소셜 미디어 운영을 고용 조건의 필수로 내세운다.
온 세상은 팔로워 숫자로 서로의 가치를 판단하고 정의하게 되었다.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어떤 집에 살고, 어떤 차를 타는지 장황한 설명 대신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영상만 올리면 된다. 요리하는 장면 뒤로 보이는 화려한 주방과 행복하게 집안을 뛰어다니는 강아지 뒤로 보이는 아파트 평수와 인테리어가 모두 계산된 컨텐츠에 속한다. 심지어 어떤 종의 개를 키우며 어떤 사료를 먹이고 어떤 하네스를 쓰는지도 소셜 미디어의 세상에선 계정 주인, 즉 사람의 등급을 나눈다.
‘스스로를 브랜딩 하라’라는 세계적인 마케팅 구호에 나는 애초부터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팔로워가 늘어나는 만큼 나는 점점 더 ‘좋아요’에 연연하게 됐다. 자신을 끊임없이 상품화해 ‘좋아요’ 수로 가치 판단을 하는 도파민에 중독된 것이다. 소셜 미디어에 떠다니는 수많은 컨텐츠들은 ‘동기부여’라는 명분으로 늘 나를 다그쳤다. 필요도 없지만 누군가에겐 있다는 이유로 주문하고 쓰지 않는 물건들이 쌓여갔다. 소셜 미디어의 생산적인 컨텐츠는 곧 돈을 많이 버는 컨텐츠라는 집단적 세뇌에 나 역시 빨려 들어 소비에 중독됐다.
소셜 미디어엔 제 인생을 어쩌지도 못하면서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사람을 정해 열등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또 자신보다 낮은 등급의 사람을 정해 애꿎은 화를 풀었다. 그렇게 스스로 고문하며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거울 안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스스로 찍은 사진과 영상 속의 모습을 삶의 기준으로 삼아버린 우리는 24시간 365일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게 됐다. 잠시라도 일상의 여백과 고요가 찾아오면 그 불안함과 공허함을 어쩌지 못해 우리는 끝없이 소셜 미디어 세상 속으로 도피한다.
소셜 미디어 세상에서는 모두 행복해 보인다. 아니 행복한 척을 해서라도 그 행복을 팔아 ‘좋아요’를 얻고 관심을 받고 돈을 번다. 스스로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게 모두가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고, 또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가끔은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에 숨이 막힌다.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불행하다는 건 아닌데 우리는 그 의미에 대해 깊게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행복에의 집착에 중독된 사람들의 이면은 때론 자기혐오와 자기 파괴로 드러난다. 서로 누가 행복하게 ‘보이는가’ 하는, 누구도 먼저 권하지 않은 게임 속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서로를 소비하고, 서로를 뜯어먹으며 배를 채우지만, 그 허기는 영영 채워지지 않는다.
첨단 기술 발전과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길을 잃은 나를 발견했다. 친구들을 만나도 궁금한 게 없었다. 우리의 대화는 대부분 “인스타에서 봤는데…” “인스타에 올린 거 못 봤어?”로 가득했다. 내 이름보다 소셜 미디어 계정 닉네임이 먼저 떠오르기 시작하고, 숲으로 들어온 뒤에도 자연스럽게 나는 이 숲속 생활을 어떻게 컨텐츠화 할까 고민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숲속에서 한동안 나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다 문득 스스로 기꺼이 ‘트루먼 쇼’ 속으로 들어가려는 내 모습을 객관화하며 스스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화면을 의미 없이 스크롤하면 금세 해가 산을 넘어가고 있었고, ‘OO안에 OO 하는 법’ ‘OO안에 OO 버는 법’ 등 수백 개의 영상들을 봐도 막상 하루의 끝자락 내 머릿속과 마음속에 남는 건 공허함뿐이었다.
거창하게 ‘디지털 디톡스’라고 할 것도 없이
나는 한순간에 즉흥적으로 그동안 가입해 운영해 왔던
모든 소셜 미디어 계정을 삭제했다.
이대로 계속 가면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눈뜨면 제일 먼저 했던 소셜 미디어 타임라인 체크도 없고, 확실치 않은 정보로 도배된 출처 없는 짧은 뉴스 영상도 볼 일이 없으니 일단 하루의 시작이 상쾌했다. 처음엔 너무 많아진 시간에 당황했지만 그동안 내가 그 많은 시간을 소셜 미디어에 쏟아붓고 있었다는 역설이기도 했다. 온라인 공간에서 ‘소통, 소통’ 하던 1만 명 가까운 인스타그램 친구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진정한 ‘소통’을 하는 친구는 얼굴을 직접 보고 눈을 마주치고 결이 맞는 대화를 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더 강해졌다.
의미 없는 스크롤링 속에 이 세상에 오직 나만 그 물건이 없는 것 같은 소외감을 들게 들었던 호들갑스러운 광고들이 사라지자 쓸데없는 인터넷 쇼핑과 소비지출도 현저히 줄었다.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의 삶과 나의 삶을 비교하며 빠져드는 불안과 조바심, 불안감도 많이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마침내 남이 아닌 나를 돌보고 스스로에 온전히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됐다.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빠르고 화려한 자극에 끊임없이 노출되며 면역이 생긴 나는 보다 빠르고 자극적인 감각에 중독됐다. 지루하고 단순하게 사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소셜 미디어를 끊은 금단 현상으로 답답하고 초조하고 불안해질 때마다 눈을 감고 깊게 호흡하며 명상을 했다. 생각해 보니 SBS도 개국 전이라 TV 채널이 MBC와 KBS, 단 2개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마저 자정이면 방송을 멈춰 컬러바와 ‘삐-’하는 소리만 나왔고, 본방송을 놓치면 영원히 못 보는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허나 지금 나는 볼 게 너무 많아 고민인 넷플릭스를 몇 시간째 스크롤만 하다 결국 아무것도 못 보고 만다. 다음에, 언제든, 원하는 걸 볼 수 있는 풍요로움은 자유롭기도 하지만 귀가 뚫어지게 기다리다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나오면 녹음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던 간절함은 이제 그리운 낭만이 되어버렸다.
누가 더 화려한지, 생산적인지, 화제성을 띠는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소셜 미디어의 경쟁에 더 이상 동참하지 않기로 한 건 나는 누군가의 ‘좋아요’가 없이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채울 넉넉한 공간과 여백은 남들과의 비교를 멈추고 나서야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에게 관심이 없고,
모든 걸 빨리 지나쳐 버린다.
비밀이 사라진 시대, 너도 나도 ‘트루먼 쇼’의 주인공을 자처하며 자신을 팔아 돈을 벌고, 또 그게 대단한 일인 양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는 나 스스로의 팬이 되어 온전히 나로 살기로 했다. 나를 설명할 필요도, 증명할 필요도 없이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안정감으로 인생에서 내가 진정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정성을 쏟으며 사는 것, 다른 사람이 ‘좋아요’ 해주지 않아도 나의 삶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겐 중요하다.
아름다운 건 누가 알아봐 주길 바라지 않는다. 돈을 벌지 못해도 손익 계산을 따졌을 때 플러스가 아니어도 이 세상엔 효율성으로만 정의하고 판단할 수 없는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나는 이왕이면 그런 것들에 더 가까운 삶을 살고 싶다. 자연의 오묘한 지휘로 해마다 탈바꿈하는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시골 생활의 반 이상은 잡초 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삶은 큰 나무 하나에 집중하면서 그 사이 자라난 온갖 마음의 잡초를 뽑아 없애는 과정이다. 나무와 꽃에 물을 줄지, 잡초에 물을 줄지는 마음의 정원사인 내가 직접 결정한다. 삶의 매 순간에 빠져들어 축복하고 기념하고 새삼스럽게 받아들이며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중이다. 세상의 어떤 단절은 축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