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잠 못 드는 밤엔 밤의 숨결을 느낀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밤은 언제나 온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바쁘고 치열한 한낮을 보낸 도시인들은 그렇게 보내버린 빛이 아쉬워 밤새 그 빛을 가두고 품었다. 도시 어딜 가나 밤은 빛을 품었고 그래서 나에겐 온전히 어둠을 받아들이고 학습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잡지사 출장으로 떠난 일본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시가키섬에서 취재 일정을 마치고 거나하게 취한 동료 기자들 틈을 빠져나와 숙소를 뒤로 하고 혼자 바닷가를 걸었다. 친환경을 추구하며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한 마을의 바닷가에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한 밤의 어둠을 맞았다. 낯설고 두렵기까지 한 어둠 속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 눈을 들어 올려다본 하늘엔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들이 조금씩 어둠을 채워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우주라는 거대하고 무한한 공간에 별들과 나만 존재하는 듯한 처음 느껴본 감정에 압도되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 거대한 감정은 나에게 ‘너 따위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니 겸손해라’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유일에서 유일한 네 존재를 축복하고 기념하라’라고 말했다.
그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나는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어딜 가든 하늘만 쳐다봤다. 지하철이 잠깐 지상으로 나와 당산철교를 지날 때도, 바쁜 취재 일정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할 때도, 지하 깊숙이 자리한 스튜디오에서 화보를 촬영하고 인터뷰할 때도 하늘 타령을 했다. 야박하게도 서울은 내가 하늘을 더 바랄수록 틈을 내주지 않았다. 해가 지고도 빼곡한 건물들 사이로 난 조그만 틈으로 비집어 본 밤하늘은 누가 더 화려한가 경쟁하듯 내뿜은 도시의 인공 빛에 여전히 낮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년이 지나고 서울을 떠나온 섬을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이 3층을 넘지 않는 낮고 겸손한 스카이라인을 가진 태국의 작은 외딴섬에 다다라서야 나는 원 없이 검고 탁 트인 밤하늘을 매일 바라볼 수 있었다. 아니, 밤뿐 아니라 매일 다른 표정으로 밤을 준비하는 자연의 태도를 배웠다. 하루 종일 생명의 에너지에 대해 쉬지 않고 설명을 늘어놓은 태양이 잘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섬사람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하던 일을 멈추고 해변으로 나와 해를 보내고 달과 별을 맞을 준비를 했다.
태양은 내일 또 뜰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하던 일을 잇겠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터였다. 우리는 진심으로 하루를 축복했다. 도시 사람들은 돈도 안 되는 시간 낭비라 타박할지도 모를 낮이 가고 밤이 오는 순간을 우리는 마치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치르듯 맞이했다. 매일 밤, 그리고 밤이 오는 모습의 색과 형태가 달랐다. 그런 매일의 의식이 나의 습관과 일상이 될 무렵, 나는 도시로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했다.
깊은 숲속으로 들어온 뒤에도, 나는 매일 밤을 경건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고대한다. 어둠이 깔린 밤은 해가 지고 나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평등이다. 햇빛 아래 서로 값을 매기며 제멋대로 나뉘던 가치도 모두 사라진다.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의 희곡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처럼.
나는 두 눈의 민감도를 한껏 줄이는 대신 청각과 촉각과 후각을 쫑긋거리며 어둠을 맞이한다. 태양의 열기가 연기처럼 희미하게 사라지며 미련을 부릴 때 축축한 수증기 가득한 공기가 코끝에 닿고, 낮 동안 살아남기 위해 숨죽였던 숲속의 생명들이 목이라도 잠기지 않았는지 테스트를 시작한다.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태양과 인공의 빛이 사라진 숲속에 산들은 푸릇한 자취를 감추고 자신을 한껏 낮추며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철저한 배경으로 존재한다. 드디어 밤의 주인공인 별과 달이 무대에 서고, 나는 밤하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닿으려 까치발을 하고 깊고도 긴 호흡을 해본다. 들숨 한 번, 그리고 날숨 한 번. 밤의 숨결을 느낀다. 다시 천천히 깊게, 들숨 한 번, 그리고 날숨 한 번. 그 한숨에 내 몸에 파도가 일렁이고, 나는 바다가 된다.
세상이 밝을 동안 억지로 구겨 넣었던 불안이 어둠을 틈타 비집고 나올 때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이제 두렵지 않다. 모든 감정은 결국 지나간다는 걸 잠 못 드는 숱한 밤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슬픔을 밀어내고 무시하면 기쁨을 경험할 능력도 잃게 되니 마음껏 슬퍼하고 마음껏 불안해하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압도되는 감정을 맞닥뜨렸을 땐 그 감정과 춤을 추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변하지 않는 이상 모든 잘못된 길과, 잠시 멈춰진 길과, 온갖 돌아가는 길과, 지름길이 결국 모두 내 삶의 여정이다.
인생에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내 선택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 안에는 반응을 선택할 자유와 능력이 있다. 바닷속의 삶도, 숲속에서의 삶도 도시의 삶과는 다르게 내가 한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럼 나는 내 삶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반응 안에는 성장과 행복이 있다. 나는 밤하늘의 어둠과 별빛에서 배운 지혜로 스스로에 더 관대해졌다.
지금 내 모습은 그동안 보내온 수많은 낮과 밤의 모든 선택의 결정체다. 예전의 내가 언제나 바라고 암시했던 것들이다. 과거를 바꿀 순 없어도 현실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을 바꾸면 미래가 바뀐다. 인생사용 설명서 따윈 세상에 없다. 내가 내 인생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연출이자 배우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데 쏟아붓던 에너지로 밤을 기다렸다. 유성우가 쏟아지는 밤, 마음속 수만 개의 생각을 밤하늘에 떨어지는 별들처럼 그저 바라보고 흘려보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오늘 밤을 잘 보내야 내일이 행복해진다고, 온 숲이 말하고 있었다.
내가 곧 바다요, 별이요, 우주라는 사실이 다시금 다가왔다. 우주에는 1천억 개가 넘는 은하계가 존재하며, 인간의 뇌에는 1천억 개의 뉴런이 있다. 나는 우주의 일부이고, 우주 또한 나의 일부이다. 우주의 무한하고 거대한 힘에 압도되어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거대한 우주를 향해 나 있는 커다란 밤의 창문을 열고, 나의 근본을 흔드는 질문을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