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보름달이 뜨고 나서 며칠 후 처서가 찾아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잔인하게 끓어오르던 숲속의 여름은 처서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물러가고 있다.
숲속의 여름은 처서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천천히 물러가고 있다. ⓒ 조하나
뜨거운 청춘이 그렇듯 한여름 안에 있을 땐 잘 모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열기로 아득하면서도 언제 갑자기 소유권을 주장하며 나타날지 모를 다음 계절에 불안해 떤다. 그러다 지치기도 하고, 울분에 가득 차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지만, 결국 여름은 언제나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끝나 버린다.
결국 여름은 언제나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끝나 버린다. ⓒ 조하나
정확히 처소 바로 다음 날, 여름 내내 밤새 돌던 선풍기를 껐다. 아직도 미련이 뚝뚝 흐르는 여름의 뜨겁고 습기 어린 바람 사이사이, 미세하게 온도를 달리하는 바람이 섞여 불어오는 걸 눈치챘다. 여름 내내 쨍쨍한 햇빛에 숲의 색깔은 선명한 초록빛에 노란 물감을 살짝 탄 듯 채도가 낮아졌고, 달은 더 낮게, 그리고 붉게 뜨며, 초저녁부터 우는 풀벌레의 소리가 바뀌었다. 벼들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떨어뜨리기 시작하고, 화려했던 여름꽃들은 노화하는 얼굴을 보이기 싫어 버티고 버티다 끝내 열매를 맺으며 시들어 떨어진다. 하늘은 더 파래지고, 높아지고, 공격적이며 불평불만 가득했던 햇빛은 가볍고 보송보송하게 기분이 바뀌었다. 여름과 가을이 섞여 부는 바람은 냄새와 밀도, 세기, 방향 모두 매일매일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한여름의 죄악을 씻겨낼 가을바람이 분다.
벼들은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며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 조하나
나는 무지개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저 멀리 하늘 위로 휘영청 떠오른 무지개에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 부리나케 달렸다. 무지개를 좇느라 풍경을 놓치지 말라는, 나보다 인생을 훨씬 더 많이 살아본 친구의 조언은 들리지 않았다. 물론 우리 모두 알았다. 그때는 모르고 지금은 아는 것들로 이끄는 그 모든 건 자연의 시간이었음을.
공작 단풍이 가장 빨리 물들어간다. ⓒ 조하나
봉선화를 손끝에 물들이고 사랑을 기다리는 계절 ⓒ 조하나
배롱꽃은 여름을 장식하는 화려한 아가씨 ⓒ 조하나
긴 시간 동안 내가 이 여름의 축제를 즐길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만 하느라 바빴다는 걸, 스스로 자격을 의심하는 순간, 모든 행복은 달아나 버린다는 걸 숲에서 배운다. 모든 것엔 때가 있고, 나에게도 드디어 그때가 왔다. 나는 더 이상 무지개를 좇지 않지만, 여전히 무지개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으며 그 길로 난 풍경을 즐기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행복을 의심하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면 나머지는 자연이 알아서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영원히 피는 꽃은 없다. 수치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죄책감을 가질 것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왜 무지개를 손에 잡지 못했냐며 더 이상 책망하지 않는다.
자연의 자리를 빼앗는 데 내 이름을 사인하는 대신 자연에 자리를 내주라고, 그것이 오직 인간만이 살길이라고, 숲이 말한다. 나는 지난여름, 숲속의 오디와 앵두를 배불리 먹었고 텃밭의 옥수수와 오이, 가지, 토마토, 상추를 원 없이 따다 먹었다. 이제 가을이 오면, 흐드러진 코스모스 길을 걷고 또 걸으며 우아하게 익어가는 무화과를 따 먹고 추수를 기다리는 모든 완벽한 자연의 것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이다.
뒷마당안 무화과가 영글어간다 ⓒ 조하나
가는 계절과 오는 계절이 겹치는 교집합을 온전히 알아채고 즐길 수 있음에, 그런 사람이 되어감에 손을 모아 감사한다. 여전히 떠나보내는 모든 건 아쉽고 서글프지만, 풍요로운 자연의 절정을 맞이할 가을이 다음 계절이라는 건 설레고 기다려지는 일이다. 숲속에서 그저, 가는 것을 잘 배웅하고, 오는 것을 잘 마중 나가는 삶의 고귀함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