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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방할 결심

내란우두머리가 합법적으로 탈옥했다.

by 조하나 Mar 1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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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석 달째, 대한민국의 내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025년 3월 8일, 힘겹게 체포, 구속 기소된 내란 수괴 피의자 윤석열이 52일 만에, 그것도 대한민국 법원과 검찰의 합법적 비호를 받으며 석방됐다. 윤석열의 석방은 단순한 법적 사건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신뢰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이 모든 사회적 비용과 책임은 결국 국민의 몫으로 남았다. 

     



대한민국 엘리트 법조 카르텔의 윤석열을 석방할 결심 

    

피의자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내란우두머리’ 혐의로 2025년 1월 구속 기소되었다.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은 2025년 3월 7일,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담당 판사는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전례가 없었던 ‘구속 기간 시간 단위 계산법’이라는 파격적인 논리를 적용했다. 법원은 구속 기간을 ‘날’이 아닌 ‘시간’ 단위로 계산해야 하며, 체포 시점부터 체포적부심 심사 기간, 구속 전 피의자 심문 기간까지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억지스러운 논리를 적용하여 검찰의 공소 제기가 구속 기간 만료 시점보다 9시간 늦었다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다. 이는 명백히 피의자 윤석열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권한 남용이자, 법적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무책임한 판단이다.  

    

판사는 과거 집필에 참여한 주석서에서조차 구속 기간 연장을 ‘날’로 계산한다고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을 번복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판사는 법적 정의를 수호해야 할 책무를 저버리고, 엘리트 카르텔의 이익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마치 소설 <죄와 벌>에서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는 악당처럼 엘리트 카르텔은 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쟁취하는 데 능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하건만, 엘리트 카르텔의 세상에서는 법마저도 그들의 장난감처럼 휘둘러진다. 

    

이러한 법원의 판단에 심우정 검찰총장은 법원의 석방 결정에 즉시 항고를 포기하는 전례 없는 결정을 내렸다. 검찰의 내란특별수사본부를 비롯한 검찰 내부에서는 법원의 ‘시간 단위 계산법’에 명백한 위헌 소지가 있으며, 즉시 항고를 통해 상급 법원에서 충분히 다퉈볼 만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심 총장은 “항고하면 위헌 판결이 날 가능성이 크다”는 개인적인 판단만으로 즉시 항고를 포기했다. 이는 검찰총장으로서 마땅히 행사해야 할 권한을 포기한 것일 뿐만 아니라, 검찰 조직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 무책임한 권한 남용이다.     

 

심 총장은 법원의 부당한 판단에 굴복하고, 엘리트 카르텔의 ‘풀어줄 결심’에 순응했다. 그는 “소신에 따른 결정”이라고 강변했지만, 시민들은 그의 결정에서 ‘소신’이 아닌 ‘엘리트 카르텔에 대한 맹종’과 ‘책임 회피’만을 느꼈다. 결국, 검찰총장마저 법적 정의를 수호해야 할 책임을 저버리고, 조직의 안위와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엘리트 관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엘리트 카르텔은 서로 얽히고설켜 부패를 은폐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만 몰두한다. 정의에는 눈 감고, 권력과 야합하는 엘리트 관료들의 모습은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헌정 사상 초유의 ‘시간 단위 구속 기간 계산법’과 검찰의 항고 포기라는 비상식적인 결정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은 결국 자유의 몸이 되었다. 지지자들은 환호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사법 시스템에 대한 깊은 불신과 분노를 느꼈다. 특히 법원의 석연치 않은 결정과 검찰의 무책임한 항고 포기는 엘리트 카르텔의 ‘풀어줄 결심’이 조직적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작동한 결과라는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무너진 사법 정의, 그 상실감은  우리의 가슴에 깊은 멍으로 남았다.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의 민낯

     

피의자 윤석열은 석방 직후 일부러 구치소에서 걸어 나왔다. 으리으리하고 비까 번쩍한 경호처와 총을 든 군의 호위를 받으며 권력을 과시하는 그의 모습은 변함없이 오만하고,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웠다. 구속 취소 결정이 마치 무죄선고라도 되는 듯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지지자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12.3 내란 사태와 1.19 서울서부지법 폭동 사태 관련 피의자들 역시 자신처럼 석방되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펼쳤다. 구치소에서 그동안 성경을 읽었다는 발언을 통해 자신의 극렬지지 기반인 기독교 세력을 결집하려는 정치적 의도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은 종교적 권위를 빌어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국민들을 여전히 혼란에 빠뜨리고 분열시킨다.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은 12.3 내란 사태와 체포 및 구속, 그리고 석방 과정에서 드러난 모든 문제점에 대해 석 달이 지나도록 단 한마디의 사과나 책임 인정도 하지 않았다. 국민들이 겪는 경제적 타격과 심적 고통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과 부인, 지지자들만을 챙기는 무책임의 극치를 보인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헌법과 법률을 수호하고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헌정 질서를 훼손하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대한민국 엘리트 카르텔의 수장이자, 그들의 오만과 무책임, 권력 남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물인 윤석열은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그들만의 정의’를 맹신하며, 국민들의 고통과 절망에는 눈 감은 채 오직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몰두하고 있다. 



          

엘리트 카르텔 공화국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는 최상목 경제부총리는 헌법재판소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위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관 임명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명확히 판결했다. 그런데도 최 권한대행은 “국무위원들과 논의해 보겠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헌법재판관 임명을 미루고 있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무시하고, 헌법 질서를 훼손하는 심각한 권한 남용이자,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무책임한 행태다. 


최 권한대행 역시 법 위에 군림하며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그들만의 정의’를 추구하는 엘리트 관료 카르텔의 일원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그는 국가와 헌법 수호라는 숭고한 책무는 망각한 채 오직 자신과 엘리트 카르텔의 안위만을 걱정하며 권한을 남용하고 있다. 엘리트 카르텔에게 헌법과 정의는  그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장식품에 불과하다.

      

이처럼 윤석열 석방과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는 대한민국 사회 엘리트 관료 카르텔의 무책임, 권한 남용, 그리고 국민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옹호하며,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의 안위는 그들의 관심 밖이다. 이러한 엘리트 관료 카르텔의 횡포는 대한민국 사회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드는 심각한 위협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그들만의 정의

      

대한민국 검찰은 평생을 검사로 살아온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이 일으킨 12.3 내란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을 받고 있다. 여러 가지 정황 증거가 차도도 넘치는 상황에서 비화폰 기록을 갖고 있는 대통령실 경호처 차장 김성훈에 대한 경찰의 영장을 세 번이나 반려하며 검찰은 내란 관련 증거를 직접 통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검찰이 대통령실 경호처 압수 수색 영장을 발부해야 한다는 수사심의회의 결과가 나오기가 무섭게 법원에서 한 달 이상 묵히고 있던 윤석열의 구속 취소 결정이 발표됐다. 이 모든 상황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로써 검찰은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을 작정하고 풀어줄 결심을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또한 대한민국의 엘리트 카르텔의 작동 방식과 심각한 폐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대다수의 국민들은 검찰과 법원의 결정 과정을 보며 깊은 괴리감을 느낀다. ‘어떻게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사회에 살면서 저렇게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결정을 내리고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엘리트 카르텔 집단은 일반 국민과는 완전히 다른 ‘그들이 사는 세상’에 존재하고, 그들만의 ‘정의’를 추구한다. 또한 12.3 내란 사태를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 사회 엘리트 관료 집단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동시에 권한을 마음껏 남용하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체면을 차리느라 들키지 않으려 쉬쉬하는 노력이라도 했다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지금, 그들은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엘리트 카르텔 이론은 사회 주요 기관이 소수 특권 엘리트 집단에 의해 장악되고, 그들의 공고한 이익을 우선시하며 작동하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카르텔은 확증편향과 나르시시즘과 같은 심리적 기제와 더불어 사회 계층화와 사회적 거리에 의해 더욱 공고화된다.      


확증편향은 엘리트 카르텔 내부에서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옹호하고, 반대되는 정보나 비판은 무시하는 경향을 강화한다. 나르시시즘은 이들 엘리트 집단에게 특권 의식을 심어주고, 자신들의 판단은 항상 옳고 정의롭다고 믿게 만든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 거리는 엘리트 집단과 일반 국민 사이의 소통 부재와 공감 능력 결여를 심화시킨다. 


엘리트들은 자신들만의 좁은 네트워크 안에서만 소통하며, 일반 국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세상’에 갇힌다. 결국, 이들은 일반 국민의 상식과 정의, 그리고 사회 현실과는 괴리된, 자신들만의 ‘정의’를 만들어 내고, 그 ‘정의’에 따라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더라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엘리트 카르텔은 폐쇄적인 시스템 안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절대화하고, 외부의 비판을 철저히 차단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들의 세상은 마치 거대한 에코 챔버처럼 자신들의 목소리만이 증폭될 뿐 진실과 정의의 외침엔 귀를 막는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더 위험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Habitus)’와 ‘사회적 장(Field)’ 이론을 통해 이러한 현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아비투스는 개인이 속한 사회 계층과 환경에 의해 내면화된 사고방식, 행동 양식, 취향 등을 의미한다. 엘리트 집단은 특권적인 사회 환경 속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아비투스를 형성한다. 이들의 아비투스는 일반 국민과는 다른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정의’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포함한다. 

     

사회적 장은 특정한 규칙과 권력이 작동하는 사회적 공간을 의미한다. 법조계라는 사회적 장에서 검사와 판사들은 자신들만의 규칙과 논리, 그리고 ‘정의’를 내면화하며, 이는 일반 사회의 상식과는 괴리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와 사회적 장의 상호작용 속에서 불평등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엘리트 카르텔은 자신들의 아비투스와 사회적 장의 논리를 통해 ‘그들만의 정의’를 구축하고, 자신들의 특권을 공고히 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세상은 견고한 ‘계급의 탑’과 같아서 일반 국민들은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크 트웨인은 ‘당신이 모르는 것으로 인해 당신이 곤경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확실히 안다고 여기는 것이 당신을 위기에 빠뜨린다’라고 말했다. 엘리트 카르텔의 확증편향, 나르시시즘, 그리고 사회적 거리는 바로 이 경고를 현실로 만든다. 그들은 자신들이 ‘확실히 안다’고 믿는 좁은 세상 속 ‘정의’에 갇혀 사회 전체를 혼란과 절망으로 몰아넣는 결정을 ‘합리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의 석방은 바로 이러한 엘리트 카르텔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판사와 검사, 그리고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고위 엘리트 관료들의 무책임과 권한 남용이 어떻게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만인에 평등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법

 

엘리트 카르텔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만의 정의’를 내세워 법적 형평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것이다. 법은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지만, 엘리트 카르텔은 자신들의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법 위에 군림하려 한다. 이번 윤석열의 석방 결정은 명백히 이러한 특권 의식과 불공정성을 드러낸다. 


내란죄라는 중대한 혐의를 받는 엘리트 권력자는 형식적인 절차 논리를 통해 쉽게 풀려나는 반면, 힘없는 일반 시민들은 사소한 법규 위반에도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 이러한 이중잣대는 법치주의의 근간을 훼손하고, 국민들의 법에 대한 신뢰를 뿌리째 흔든다. 국민들은 더 이상 법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엘리트 카르텔의 특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는 깊은 불신감을 느끼게 된다. 법은 정의의 ‘저울’이어야 하건만 지금 대한민국의 법은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불공정하고 불합리하다.      


피의자 윤석열의 석방 결정 이후, 다른 형사 피의자들이 ‘구속 기한 초과’를 이유로 유사한 석방 요구를 쏟아내는 현상은 사법 시스템 붕괴의 전조다. 대검찰청이 일선 검찰청에 구속 기간을 ‘날’ 단위로 계산하라는 업무 지침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윤석열 대통령에게만 특별히 적용한 ‘시간 단위 계산법’은 여전히 논란의 불씨로 남아 있다. 법 집행에 대한 불신은 사회 질서 유지 자체를 위협하며, 사회 전체를 혼란과 무질서의 심연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그들만의 정의가 아닌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를 위하여

     

엘리트 카르텔, 확증편향, 나르시시즘, 사회적 거리, 그리고 ‘그들만의 정의’는 사회 시스템 전체를 병들게 하고, 사회적 비용을 눈덩이처럼 불려 나간다.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은 대한민국을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갔다. 현재 대한민국은 컨트롤 타워가 없는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으며, 경제는 파탄 직전으로 치닫고, 사회 시스템은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고, 국민들의 절망감은 극에 달하는 총체적 위기 상황이다. 거기에 엘리트 카르텔에 대한 깊은 불신, ‘그들만의 정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사회 시스템 붕괴에 대한 절망감까지 더해져 우리 사회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엘리트 카르텔의 ‘그들만의 정의’가 아닌, ‘우리 모두의 정의’가 통하는 사회, 상식과 공정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내란수괴 피의자 윤석열은 우리에게 이 과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절박한 메시지의 반증이다. 한때 평화와 번영을 누리다가 엘리트 카르텔 권력의 부패와 무책임한 권력 남용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수많은 나라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지켜보았다. 모든 권력과 특혜를 누리는 건 엘리트 카르텔이지만, 나라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드는 것 또한 그들이다. 언제나 그랬듯 뒷수습은 늘 국민들의 몫이다.  

    

윤석열 대통령 석방 직후, 분노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 또다시 시위를 시작했다. 절망과 분노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민주 시민은 꺾이지 않는다. 법의 정의가 무너졌을 때,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힘이라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역사를 통해 증명해 왔다. 광장으로 나선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은 엘리트 카르텔의 ‘그들만의 세상’에 균열을 내고, ‘우리 모두의 정의’를 향한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 광장에는 “윤석열 탄핵”, “법치주의 회복”, “엘리트 카르텔 해체” 등의 구호가 울려 퍼지고 있다. 시민들은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텐트를 설치하고 밤샘 농성을 이어가며, 엘리트 카르텔의 무책임과 권력 남용에 대한 강력한 항의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야당 국회의원들 또한 삭발과 단식 등 극단적인 저항 방식으로 헌법재판소에 대통령 탄핵 심판을 촉구하고 있다.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진심과 헌신이다. 정치권의 책임 있는 행동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결합되면서 윤석열 탄핵 운동은 더욱 강력한 동력을 얻고 있다.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운 세상 속에서도, 정의를 향한 촛불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무너진 법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결국 국민들의 정의감과 연대의식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캠핑의 민족’, ‘야박의 민족’ 아닌가. 우리에겐 밤샘 공부와 철야 작업을 밥 먹듯이 해온 한국인의 끈질긴 근성이 있다. 차가운 아스팔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밤샘 농성을 벌이는 시민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우리 모두의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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