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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낡은 책상 위의 흔적들

1부. 내 방 안의 작은 우주, 고독과 사유의 공간

by 조하나


오래된 나무 책상이 있습니다. 아마 당신의 방 한구석에도, 혹은 기억 속 어딘가에도 비슷한 책상 하나쯤 자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반질반질 손때가 묻은 표면 위에는 세월이 새겨놓은 무늬들이 가득하지요. 누군가 무심코 그어 놓은 깊은 흠집, 필압을 이기지 못하고 희미하게 팬 연필 자국, 어쩌다 흘린 잉크가 스며든 얼룩, 수없이 팔꿈치를 대고 있었을 모서리의 둥글게 닳은 흔적까지.


이 흔적들은 그저 시간이 흘러 생긴 상처만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지문이며, 누군가가 바로 이 책상 앞에서 생각하고, 쓰고, 지우고, 때로는 엎드려 잠들기도 했던 무수한 순간들의 기록입니다. 책상은 말이 없지만, 그 위에 새겨진 흔적들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지요. 한때 이곳에 머물렀던 삶의 무게와 온기를 말입니다.


이 시간의 흔적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득 여러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왜 이런 낡은 것들 앞에서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걸까요? 이 희미한 자국들이 불러일으키는 아련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기억이란 과연 무엇이며, 시간은 이처럼 사물 위에, 그리고 우리의 마음 위에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가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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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기억의 의미에 천착했던 철학자들의 지혜를 잠시 빌려와도 좋겠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는 기억이야말로 '나'를 어제의 나와 동일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핵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책상 위에 희미하게 남은 낙서 자국을 보며 까까머리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바로 그 기억의 연결고리 덕분에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흔적들은 단순한 과거의 표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의 '정체성(Personal Identity)'을 붙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닻과 같은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기억의 예기치 못한, 거의 마법과 같은 힘에 주목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소설에서처럼, 우리가 책상의 거친 표면을 무심코 쓰다듬거나 오래된 나무 냄새를 맡는 아주 사소한 순간, 마치 숨겨진 문이 열리듯 잊고 있던 과거의 시간과 감정이 통째로 되살아나 현재의 의미를 뒤흔들기도 합니다. 이런 '비자발적 기억'은 우리에게 과거란 단순히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현재의 나를 이루는 풍요로운 토양임을, 그리고 일상의 미미한 감각 속에 삶의 진실이 언뜻 숨어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지요.


결국 책상 위의 흔적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삶의 깊이를 더하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광대하고 비밀스러운 방으로 들어가는 열쇠인지도 모릅니다. 그 방에는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랑과 후회의 기록들이 빼곡히 담겨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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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선을 돌려, 책상 앞에서 이루어지는 또 다른 행위, '쓰고 지우는' 과정에 주목해 볼까요? 연필로 무언가를 적었다가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써 내려가는 일. 컴퓨터 화면 위에서 문장을 고치고 단락을 옮기는 일. 이 평범해 보이는 행위 속에는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삶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방식이 그대로 담겨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야기를 통해 자아를 이해한다고 본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œur)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로 '이야기하기(Narrative)'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하고 연결하며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라는 존재의 서사를 만들어간다는 거지요.


책상 앞에 앉아 우리가 하는 일이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어떤 경험은 강조하고 어떤 기억은 잠시 묻어두며, 때로는 과거의 해석을 바꾸어 다시 쓰기도 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나'라는 이야기의 저자이자 편집자가 됩니다. 지우개 자국이나 수정액 흔적이 남은 원고지처럼, 우리의 삶 역시 완벽하게 매끄럽지만은 않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다시 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입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 속 주인공들이 아픈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결국 그 기억마저 자신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과정처럼, 삶의 모든 흔적들이 모여 비로소 온전한 '나'의 서사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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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서사를 써 내려가기 위해, 혹은 책상 앞에서 어떤 일이든 꾸준히 해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많은 이들이 '성실함'을 꼽을 겁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 나아가는 태도. 우리는 성실함을 미덕으로 배우고, 스스로에게 또 타인에게 그것을 기대하지요. 책상 위에 깊게 팬 자국이나 닳아버린 모서리는 어쩌면 그 치열했던 성실함의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정해야 합니다. 성실함이라는 빛나는 동전의 뒷면에는 어김없이 '권태'라는 그림자가 따라온다는 사실을요. 매일 반복되는 일과,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작업, 멍하니 화면만 바라보며 의미 없는 스크롤을 반복하는 시간, 혹은 하얀 백지 앞에서 한 글자도 떠올리지 못하는 막막함.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환경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권태감에 빠져들곤 합니다.


인간 실존의 불안을 깊이 탐구했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인간이 느끼는 불행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권태, 즉 '방 안에 고요히 머물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권태를 견디지 못해 끊임없이 외부의 오락거리나 자극(파스칼은 이를 '기분 전환(Diversion)'이라 불렀지요)을 찾아 헤매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죠.


어쩌면 권태는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는 삶의 본질적인 조건일지도 모릅니다. '불안'과 '결단'의 문제를 파고든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권태를 '악의 근원'이라 부르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실존적 결단을 내리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즉, 지독한 권태감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더 이상 나에게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강력한 신호일 수 있으며, 이 불편한 느낌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나설 동력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책상 앞에서 지루함에 몸부림칠 때, 우리는 파스칼의 말처럼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있겠지만, 키르케고르의 제안처럼 그 권태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며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낡은 책상 위에 새겨진 시간과 기억의 흔적들은, 그 앞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글쓰기와 지우기, 성실함과 권태라는 양가적인 감정들은 모두 삶이라는 복잡하고도 풍요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는 과정의 일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흔적들 앞에서, 그 감정들 앞에서 멈추어 서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책상은 평범한 가구를 넘어, 당신만의 철학이 시작되는 특별한 공간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당신의 낡은 책상은, 당신이 그 위에 써 내려갈 다음 문장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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