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아파트 창틀, 그 가장자리에 수년의 시간이 눌러앉은 듯 희뿌연 먼지가 띠를 이루고 있습니다. 빛이 특정 각도로 스며들 때면, 그 먼지층은 마치 간유리처럼 바깥세상을 부드럽게 산란시키며 일상의 풍경을 한 폭의 인상파 그림처럼 흐릿하게 변주시키곤 하지요. 정면의 낡은 빌라 벽에 아무렇게나 매달린 에어컨 실외기, 그 위를 유유히 걸어가는 길고양이 한 마리, 전깃줄에 잠시 앉았다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 이 모든 것이 때로는 지나치게 선명한 현실이기보다, 창이라는 불투명한 필터를 거쳐 들어오는 한 장면의 추상화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창문은 단순히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를 넘어,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첫 번째 굴절률을 결정하는 프리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햇살도 창문의 두께와 청결도에 따라 다른 온도로 느껴지듯이 말이지요.
이렇게 같은 창밖 풍경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되곤 해요. 기분 좋은 날 창밖을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고 희망차 보이지만,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똑같은 풍경도 왠지 쓸쓸하고 낯설게 느껴지곤 합니다. 마치 우리가 어떤 색깔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 세상 풍경이 달라 보이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이나 생각이 일종의 ‘마음의 색안경’ 역할을 하는 거지요.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조건> (1993)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그의 그림에서 창문 앞에 놓인 그림과 창밖의 실제 풍경을 겹쳐 보이거나 어긋나게 배치하곤 했는데요, 이는 마치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이 진짜 풍경일까요, 아니면 당신 마음이 그린 그림일까요?’ 하고 묻는 듯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만들지요. 이는 오래전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괴롭힌다”라고 말한 것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창문이라는 네모난 틀은 그 자체로 이미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의 범위를 정해줍니다. 창문 크기만큼의 풍경만 우리 눈에 들어오고, 그 너머의 세상은 가려져 있으니까요.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도 비슷합니다. 우리 각자는 알게 모르게 자신만의 ‘생각의 틀’ 또는 ‘마음의 창문’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 틀은 우리가 자라온 환경, 우리가 겪었던 경험, 우리가 중요하다고 배운 가치들로 만들어지곤 해요. 그래서 어떤 일에 대해서는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오해하기도 하는 거지요. 마치 어떤 창문은 넓고 투명해서 바깥이 훤히 보이지만, 어떤 창문은 작거나 색유리로 되어 있어 풍경이 왜곡되어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마음의 창문’은 우리가 세상을 질서 있게 이해하도록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를 좁은 생각에 가두거나 편견을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 한번 ‘저 사람은 별로야’ 하는 마음의 창, 즉 선입견이 생기면, 그 사람이 좋은 행동을 해도 잘 보이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려 할 때가 있지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은 종종 창가에 홀로 앉아 바깥을 바라보거나, 창밖에서 방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요, 그들은 창을 통해 어딘가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생각이나 감정이라는 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창문은 그들에게 세상과의 연결고리인 동시에, 넘기 힘든 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거지요. 하지만 바로 그 벽 앞에서조차, 어떤 태도로 창밖을 마주할지 선택하는 마지막 자유는 우리 안에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나만의 틀을 알아차리고, 좀 더 넓고 맑은 창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가장 먼저, ‘아, 나에게도 이런 마음의 창문이 있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유일하거나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신,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볼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 거지요. 마치 창문에 낀 먼지를 닦아내듯, 우리의 생각 속 편견들을 닦아내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스토아 철학자들이 외부 환경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다스리려 했던 수행과도 같습니다.
히치콕의 영화 <이창>을 보면, 다리가 부러져 집에 갇힌 주인공이 창문을 통해 건너편 아파트 이웃들의 삶을 엿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창문이라는 제한된 틀을 통해 본 단편적인 모습들을 가지고 이웃들에 대한 온갖 추측과 이야기를 만들어내지요. 때로는 예리한 관찰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험한 오해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자신만의 프레임에 갇혀 세상을 판단하는지, 그리고 그 프레임 너머의 진실을 보기 위해 얼마나 열린 마음과 조심스러운 태도가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나만의 창’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고정된 생각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관점을 배우고 세상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하려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할 겁니다. 그것은 때로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 신선한 바깥공기를 들이마시듯 새로운 지식과 경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용기일 수도 있고, 때로는 더러워진 창문을 깨끗이 닦아내듯 나의 선입견이나 잘못된 믿음을 반성하고 수정하는 겸손함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외부 세계는 바꿀 수 없을지라도 그 세계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의 평정은 스스로 찾을 수 있다는 지혜로운 철학자들의 오랜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치 여러 각도에 창이 난 집처럼, 다양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풍경의 입체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지요.
창밖의 풍경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어떤 마음의 창으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이야기를 건넬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의 창은 어떤 빛깔과 모양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나요? 그 창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에서부터, 우리 삶의 철학은 또 다른 풍경을 향해 열릴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