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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보이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1부. 콘크리트 정글, 보이지 않는 감옥

by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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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 수많은 욕망들일 것이다. 더 넓은 집, 더 좋은 차, 더 비싸 보이는 옷, 더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 그러나 그 빼곡한 욕망의 목록은 과연 순수하게 우리 내면의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일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주입되고 치밀하게 학습된 결과물일까. 나는 종종 후자일 가능성에 대해, 그리고 그 시스템의 정교함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한때 나는 그 컨베이어 벨트의 가장 앞자리에서, 가장 반짝이는 상품들을 보기 좋게 진열하고 사람들의 손에 쥐여주는 역할을 맡았었다. 소위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대형 패션 잡지사의 에디터. 그곳은 마치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기묘한 생명체와 같았다. 한쪽에서는 패션팀이 각종 명품 브랜드와 유명 연예인들을 분주히 연결시키며 회사의 주된 수입원인 막대한 광고 수익을 창출했다. 이 세계에서 상품의 본질적 가치나 그것을 만든 장인의 혼 같은 것은 종종 논외의 문제, 혹은 고루한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품을 홍보하고 마케팅하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붓느냐였고, 그 예산의 크기가 곧 상품의 가치를 결정지었다. 인간의 욕망은 본래 손에 잡히지 않는 것, 비싸고 희소하며 고급스러운 것에 더욱 강렬하게 자극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명품 브랜드들은 화보 촬영에 참여하는 연예인들에게 A급부터 D급까지 공공연히 등급을 매겨 차등 대우를 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상품의 액세서리쯤으로 전락시키는, 더없이 ‘고급스러운’ 방식으로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의 민낯이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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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쪽에는, 내가 속했던 피처팀이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재능과 열정은 넘치지만 아직 세상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인디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음악과 이야기에 빛을 비추는 것이 피처 에디터로서 나의 소중한 책무이자 역할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순수한 믿음은 냉혹한 현실의 벽, 혹은 편집장의 ‘균형 감각’이라는 이름 아래 포장된 상업적 논리 앞에서 종종 무력해지곤 했다. 때로는 쓰디쓴 타협을 해야만 했다. 이를테면, 홍대의 작은 라이브 클럽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이름 없는 밴드의 진솔한 인터뷰가 실릴 단 한 페이지를 간신히 얻어내기 위해, 나는 개인적으로는 전혀 만나고 싶지도 않고 궁금한 것 하나 없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과 정해진 각본 같은, 영혼 없는 인터뷰를 몇 시간이고 기계처럼 진행해야 했다.


아이돌 인터뷰가 왜 그토록 하기 싫었냐고 묻는다면, 그 이유는 단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를 넘어선 곳에 있었다. 인터뷰 내내 옆자리에 그림자처럼 배석한 매니저는 마치 비밀경찰처럼 모든 질문과 답변을 날카롭게 검열했고, 미리 준비된 모범 답안 외의 이야기는 허락되지 않았다. 정작 아티스트 본인은 자신이 참여한 앨범의 수록곡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조차 부족한 경우가 허다했다. 어떤 앳된 여자 아이돌은 인터뷰 내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는 대신 따뜻한 이불속에서 단 몇 시간이라도 깊은 잠을 재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녀의 공허한 눈빛에서는 깊은 심리적 불안정이 고스란히 읽히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아이돌은 소속사에서 강요하는 혹독한 다이어트와 그로 인한 약물 부작용으로, 화보 촬영과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창백한 얼굴로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속을 게워내는 모습을 힘겹게 감추려 애썼다. 그 처참한 광경을 바로 곁에서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의 마음은 그야말로 갈가리 찢어지는 듯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사무실로 돌아와 깊은 죄책감과 격렬한 자기혐오에 시달렸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의미 있는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화려하게 포장된 상품들의 목록을 끝없이 전시하며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가속하는 데 충실히 일조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던 그 세계 안에서, 나는 어쩌면 그 꽃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자본주의의 독(毒)’을 퍼뜨리는 데 스스로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부끄러운 자각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회사에 직접적인 이윤을 많이 가져다주지 못하는 피처팀은 종종 ‘돈 안 되는 부서’로 치부되며 알게 모르게 구박을 받거나 예산 배정에서 밀리곤 했다. 돈을 벌지 못하니 밥을 조금만 먹으라는 사회 시스템의 논리였다. 그래서 안 그랬던 사람들도 결국 서럽고 더러워 돈을 결국 좇게 됐다. 심지어 인터뷰할 인물을 선정할 때조차, 그 아티스트의 창작물이 지닌 예술적 가치나 사회적 메시지보다는 ‘그에게 어떤 브랜드의 옷을 입히고, 어떤 명품 시계를 채워 얼마짜리 광고 페이지를 함께 실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기도 했다. 결국 모든 가치가 자본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재련되는 듯한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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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는 스스로가 시대의 감각을 이끌고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는 특별한 존재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조금씩 깨달았다. 나는 창조자가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소비 시스템의 충실한 일부, 그 화려한 잡지를 매끄럽게 움직이는 수많은 톱니바퀴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을. 내 손으로 정성껏 만들어낸 문장과 아름다운 이미지들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욕망을 심고, 그들의 지갑을 열게 하고, 나아가 끝없는 감각의 피로와 내면의 공허함에 일조했는지를 생각하면, 때로는 깊은 씁쓸함과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모두 그 시스템의 일부였고, 어쩌면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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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이 흐른 지금, 욕망을 학습시키는 컨베이어 벨트의 엔진은 종이 잡지를 넘어 더욱 강력하고 개인화된 플랫폼으로 진화했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나의 시청 기록을 바탕으로 다음번 볼 영상을 끊임없이 추천하고, 인스타그램의 인플루언서들은 매끈하게 보정된 화려한 일상을 전시하며 은근한 선망과 상대적 박탈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틱톡의 짧고 중독적인 영상들은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찰나의 자극을 끊임없이 공급한다. 이 새로운 매체들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교묘하고 깊숙하게 우리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부러워하며, 무엇을 가져야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쉴 새 없이 속삭인다. ‘보이지 않는 손’은 더욱 정교해졌고, 우리는 그 달콤한 유혹 앞에서 더욱 무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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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 거대한 욕망 학습 시스템 안에서 길들여진다. 마치 공장에서 규격화된 상품이 쉴 새 없이 생산되어 나오듯, 우리의 꿈과 열망, 심지어 행복의 기준마저도 사회가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틀 안에서 조립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으로 ‘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질문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컨베이어 벨트가 친절하게 제시하는 다음번 목표물을 향해 오늘도 우리는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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