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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중력으로부터의 해방, 유영하는 몸의 사유

2부. 경계를 넘어, 물의 언어를 배우다

by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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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모든 법칙이 그 효력을 상실하는 경계, 그곳은 바로 물의 표면이었다. 얇고 투명한 막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펼쳐진 세계는, 단지 풍경의 전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조건 자체가 변이하는, 완전히 다른 질서와 감각으로 직조된 우주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도시에서 나를 그토록 옥죄었던 콘크리트 정글의 불협화음과 중압감,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생존 경쟁의 소음과 불면의 불안은 아득한 심해의 기억처럼 희미해져 갔다. 대신,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물의 한없는 포용력, 그 다정한 압력과 더불어 심연을 닮은 정적(靜寂)만이 나를 에워쌌다. 그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마치 태어나 처음 숨을 쉬듯, 일평생 나를 지구의 표면에 속박했던 중력이라는 절대 권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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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간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육신을 끌어내리고 정신까지 짓눌러왔던 그 보이지 않는 운명의 사슬이 마침내 ‘툭’ 하고 풀어진 듯, 몸은 경이로울 정도로 가벼워졌다. 두 발로 땅을 견고하게 디디고 서야만 한다는 지상의 숙명에서 벗어나, 나는 마치 최초의 날갯짓을 시작한 새처럼, 혹은 무한한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어느 고독한 비행사처럼 자유로웠다. 아니, 어쩌면 망각했던 태초의 기억을 더듬어 어머니의 자궁 속 양수로 회귀한 태아처럼, 물의 품 안에서 그 어떤 방향으로든 의식적인 노력 없이 떠오르고 가라앉으며 유영할 수 있었다. 지상에서의 생존을 위해 익숙해졌던 팔다리의 부산한 휘젓기는 더 이상 의미 없는 몸짓이었다. 거대한 오리발을 신은 발의 느리고도 우아한 킥 한 번에, 몸은 마치 물과 한 몸이 된 듯 미끄러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움직임은 중력의 엄혹한 간섭에서 벗어나 유려하게 펼쳐졌고, 물의 미세한 저항마저 친구 삼아 그것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것은 마치 느린 호흡으로 연주되는 심해의 첼로 선율에 맞춰, 한 편의 명상적인 수중 발레를 추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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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의 숨이 너무나 당연하여 단 한 번도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적 없는 무의식의 영역이었다면, 물속에서의 숨결은 나의 현존과 직결된 가장 절박하고도 숭고한 의식(儀式)으로 변모했다. 탱크 속 압축공기가 생명선인 레귤레이터를 통해 전해지며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내 호흡 소리, ‘쉭- 후우-, 쉭- 후우-’ 하는 그 단조롭지만 신성한 마찰음은, 이 낯설고 신비로운 푸른 세계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자 내면의 북소리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미세한 부력의 변화로 몸이 부드럽게 떠올랐고, 존재의 무게를 모두 비워내듯 천천히 내쉬면 다시 안온하게 가라앉았다. 나의 폐는 어느새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정교한 부력 조절 장치가 되어 있었고, 나는 이 새로운 몸의 언어, 물의 언어를 어린아이가 옹알이를 배우듯 하나씩 경이롭게 익혀나갔다. 중력에 대항하느라 늘 긴장의 갑옷을 입고 있던 어깨와 목의 근육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드럽게 이완되었고, 몸은 마침내 물의 흐름이라는 거대한 질서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맡기는 법을, 마치 오랜 지혜를 문득 깨닫듯 터득해 갔다. 이것은 이성으로 해독하는 메마른 지식이 아닌,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체득하여 영혼에 새기는 살아있는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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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력이라는 오랜 독재자의 속박에서 풀려나자, 마치 무겁고 때 묻은 외투를 벗어던진 듯 사유마저 날갯짓을 하는 듯했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도시의 소음과 치열한 경쟁 속을 위태롭게 항해하던 지상의 ‘나’는 잠시 그 존재의 그림자를 거두었고, 오직 물속을 부유하는 몸과 그 몸을 통해 투명하게 느껴지는 순수한 감각들만이 온전한 현재로 현존했다.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지상의 상념들은 마치 수면 위로 떠올라 햇살에 부서지는 공기 방울처럼 덧없이 터지며 가볍게 사라지곤 했다.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판단하고 분석하며 미래를 계획해야 한다는 조급증에서 벗어나, 나는 그저 물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존재 자체의 경쾌함을 충만하게 만끽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거대한 자연의 숨결과의 황홀한 합일이었으며,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그저 ‘있음’ 자체로 평화롭고 완전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거대한 서곡의 시작에 불과했다. 육체의 해방이 가져다준 이 경이로운 자유는, 앞으로 내가 마주하게 될 더 깊고 푸른 수중 세계의 은밀한 비밀과, 삶의 근원을 향한 더욱 본질적인 질문들로 나를 이끄는 첫 번째 관문이자 정중한 초대장이었다. 물은 그렇게, 가장 부드럽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잊고 지냈던 고향의 언어를 다시 듣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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