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장. 땅의 기억을 상실한 도시, 부유하는 뿌리 없음

1부. 콘크리트 정글, 보이지 않는 감옥

by 조하나


Whisk_d0fed8dee4.jpg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빈틈없이 뒤덮인 거대 도시는 종종 스스로가 딛고 선 땅의 기억을 완벽하게 지워버린 것처럼 보인다. 마치 거대한 부표처럼, 수백만수천만의 사람들을 실은 채 시간이라는 망망대해 위를 정처 없이 떠다니는 존재. 그 육중한 구조물 아래 한때 숨 쉬었던 흙과 바위의 질감, 물줄기의 흐름, 바람의 길목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고, 그 위를 거닐었던 과거 세대들의 삶과 이야기들은 새로운 건물의 기초 아래 깊숙이 묻혀 망각의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는 그렇게 ‘뿌리 없음’을 현대 도시인의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 인공의 에덴동산에서 자연의 순환과 계절의 변화는 때로 성가신 방해물이나 희미한 배경음 정도로 치부된다. 첨단 냉난방 장치는 계절의 엄연한 명령을 무력화시키고, 밤의 장막을 삼켜버린 인공의 빛은 낮과 밤의 신성한 경계마저 흐릿하게 지워버린다. 대형 마트의 진열대에는 사시사철 전 세계에서 공수된 과일과 채소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제철 음식이라는 정겨운 말을 기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자연이 끊임없이 보내는 섬세하고 다정한 신호들 – 겨울눈을 뚫고 나오는 새싹의 경이로운 파릇함, 존재를 불태우며 낙하하는 단풍잎의 처연한 아름다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별자리의 장엄한 이동 – 은 도시의 요란한 소음과 현란한 불빛 속에 묻혀 그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이는 단순한 감상의 차원을 넘어, 환경 심리학자들이 지적하듯 인간의 ‘주의 회복 이론(Attention Restoration Theory)’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현실이다.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부드러운 ‘매혹(Soft Fascination)’이 고갈된 집중력을 회복시키는 반면, 도시의 지속적이고 강렬한 자극은 만성적인 인지적 피로와 신경학적 과부하를 초래한다. 나아가 진화생물학자 E.O. 윌슨이 제창한 ‘생명애(Biophilia)’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체 및 자연과 연결되려는 갈망을 지니는데, 이 본연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도시 환경은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적 공허감과 불안을 증폭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이라는 거대한 어머니의 품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시간의 마디 없이 흘러가는 영원한 현재, 혹은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 갇힌다.



Whisk_fa5f7419b2.jpg



오래된 골목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번쩍이는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서는 풍경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무심하게 목격하는가. 수백 년 된 아름드리나무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혹은 경제적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하룻밤 사이에 잘려 나가고, 한 시대의 숨결과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건물들은 ‘개발’이라는 거창한 미명 아래 맥없이 허물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의 변화를 넘어, ‘장소 애착’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심리와 정체성 형성에 깊은 상흔을 남긴다. 특정 장소에 얽힌 기억과 경험은 개인과 공동체의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실마리이지만, 도시의 끊임없는 파괴와 재창조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무참히 끊어내며 우리를 ‘장소 상실’의 시대로 내몬다. 그 결과 개인은 정체성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듯한 허탈감을 느끼고, 공동체는 공유된 기억의 터전을 상실하며 유대감마저 약화될 수 있다.


도시는 마치 강박증 환자처럼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현재를 건설하는 데에만 몰두한다. 그 과정에서 땅이 품고 있던 무수한 이야기, 그곳을 터전 삼아 울고 웃었던 사람들의 삶의 궤적들은 아스팔트 아래, 콘크리트 더미 속에 아무런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생매장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더 새롭고, 더 높고, 더 화려한 미래만을 향해 맹목적으로 질주한다.


이처럼 자연의 시간과 땅의 기억, 그리고 역사의 깊이로부터 뿌리 뽑힌 삶은 우리를 근시안적인 존재로 만든다. 만성적인 인지적 피로감과 정서적 불안정, 그리고 ‘장소 상실’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은 우리의 내면을 더욱 황폐하게 만들고, 과거로부터 배울 겸허한 교훈도, 미래를 향한 장기적인 안목도 없이, 오직 눈앞의 이익과 순간적인 만족, 그리고 바람처럼 사라질 덧없는 유행만을 좇게 되는 것이다.



Whisk_0b6c3d84f4.jpg



근원적인 안정감을 상실한 현대 도시인들은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외부의 것들, 즉 끝없는 감각적 자극, 학습된 욕망과 물질적 풍요, 사회적 성공과 타인의 인정에 매달리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려 몸부림친다. 이는 어쩌면 획일화되고 비인간적인 도시 공간이 야기하는 심리적 압박감과 고립감에 대한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과거 농경 사회나 부족 공동체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얻었던 소속감과 존재론적 안정감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현대인은, 그 빈자리를 인공적인 자극과 소유물, 혹은 타인의 시선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발 딛고 설 단단한 땅의 기억을 잃어버린 부유하는 삶 속에서, 그러한 것들은 결코 영원한 위안이나 진정한 뿌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우리는 점점 더 가벼워지고, 점점 더 불안해지며, 실체 없는 가치들의 파도 위를 위태롭게 떠다니는 존재가 되어간다.



Whisk_87cee243b4.jpg



이러한 현대 도시인의 위태로운 부유는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간 영혼의 근원적 필요와 깊이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베유는 ‘뿌리내림’을 “아마도 인간 영혼의 욕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무시되어 온 욕구”라고 갈파하며, 인간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영적·사회적 유산과 미래에 대한 예감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태어난 장소, 직업, 그리고 인간적 유대와 같은 다양한 통로를 통해 실질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연스럽게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뿌리내릴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이처럼 다양한 뿌리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도시는 어떠한가? 땅의 기억을 지우고, 공동체의 연결고리를 희석시키며, 끊임없는 변화와 경쟁 속에서 안정적인 참여의 장을 앗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베유가 말한 ‘다양한 뿌리’가 내릴 수 있는 토양 자체가 소실되고 있는 현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주한 ‘뿌리 없음’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땅의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그 속에서 뿌리 없이 부유하는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진정한 안정을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푸근한 흙냄새나 고풍스러운 옛 건물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기댈 수 있는 환경과의 건강한 상호작용, 그리고 시몬 베유가 말한 영혼의 가장 깊은 필요인 진정한 ‘뿌리내림’의 가능성, 시간의 장구한 연속성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존재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는 근원적인 삶의 좌표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Whisk_86124df7ac.jpg








04_메일.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