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비 온 날 다음 날 비 안온 날이었다. 어제는 몸과 마음이 모두 움츠렸다. 그랬는지 아침 햇살이 반가웠다. 혹시나 해서 다 젖은 등산화를 새벽에 일찍 밖에 내놨지만 그사이 신발이 말랐기를 바라다니. 젖은 신발을 신고 떠나는 기분만큼은 젖지 않고 상쾌했다. 다 햇빛 탓이리라.
결과적으로 돌로미티 산행 중에서 가장 들쑥날쑥한 하루였다. 꼴다이 산장에 도착해 보니, 이곳에 오르기까지 하루가 참 변화무쌍했다. 처음 출발한 산장은 크로다 라고 팔미에리(Croda da Lago/Palmieri)이었다. 크로다 = 절벽, 라고 = 호수, 팔미에리 = 순례자. 뭐 이렇게 이해되는 산장인데, 산장 뒤로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옆으로 엄청난 높이의 절벽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이 크로다 라고 였다. 이래서 이름이 이렇게 붙은 거군. 혼자 이해했다!
산장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떠날 때 완만한 산길을 오르는데, 벅찬 심정이 들었다. 그냥 드넓은 평야가 호탕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뒤로, 걷는 방향 오른편에는 절벽으로 이뤄진 바위가 호위하고 옆으로는 저 넓은 초원에서 소 몇 마리 어슬렁거리고 그 뒤로 다시 이어지는 산봉우리들. 이 봉우리들이 손에 잡힐 듯 서있는 것 같지만 그건 눈이 만든 착시일 뿐 멀어도 한참 먼 곳에 있는 봉우리들이지만, 바로 눈앞에 있는 듯이 보이는 건 가장 먼저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걷는 방향 앞쪽에는 역시나 잘 생긴 산이 떡하니 서있다. 산장을 나와 산길을 따라 서쪽 방향으로 걷다 보면 왼편으로 그 경치가 펼쳐진다.
알타 비아 1 중에서 가장 무난한 듯하면서 가장 트인 시야가 펼쳐지는 곳 같았다. 이곳 산장에서 다음 산장인 플루메(Flume)까지 가는 여정은 정말 시원시원했다. 평지길만도 아니고, 산길만도 아니고. 이번엔 일행들 가장 뒤에 섰다. 어떻게든 간절한 마음으로 돌로미티 풍경이 떠나지 않도록 보고 보고 또 보았다. 그렇다고 돌로미티가 마음을 주었다고 믿지 않지만, 짝사랑이면 어떠랴. 오른쪽으로 걷다가 왼쪽으로 걷다가, 대로변에서 어제 야영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만나고. 날씨는 좋고 햇빛은 짱짱하고 공기는 청량하고, 그러다 보니 도착한 곳이 플루메 산장이었다.
플루메 산장에 도착하니 많은 학생들이 보였다. 짐작건대, 도로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학생들이 많은가 추측했는데, 그곳에서 어느 정도 내려가면 큰 도로가 나왔다. 어쩌면 돌로미티가 사람들에게 가장 관심을 많이 받는 이유가 워낙 산군이 넓다 보니, 그 산군 여기저기 도로가 나있어 그 도로를 따라 조금만 걷다 보면 산장이 나온다는 것. 그러니 다양한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도 내려가다 산에 올라온 등산객들뿐만 아니라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만나고 그렇게 걷다 보면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게 도착한 다음 산장은 스타우란자였다. 대로변에 있는 산장. 이곳에서 미국에서 온 곧 헤어질 친구 3명을 다시 만났다. 스타우란자 산장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는데, 그들이 내려온 것이다. 얼마나 반갑던지. 제일 먼저 반긴 건 저널리스트라는 안경 쓴 친구였고, 다음이 블레이크였다. 잘생긴 친구는 어디 갔냐고 했더니 벌써 산장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신장 길이가 길어서 잘 걸었나? 결국 마지막이었다. 그 친구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한 것이다. 알고 보니 다음 산장인 꼴다이 산장을 예약하지 못해 부득이하게 하루 쉴 예정으로 스타우란자 산장을 예약했다고 한다. 그때는 아쉽고 보고 싶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다시 볼 것을 믿었기에.
여행의 묘미는 이런 것이다. 모르던 사람, 다시 헤어질 사람, 만날 걸 기약하는, 그런 걸 알면서도 순간순간 얼마나 즐겁고 반가웠는지. 도시에서 만나봐라. 이런 감정이 들까? 같이 걸었고, 서로 힘든 과정을 함께했다는 공감만으로도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들. 그들과 같이 알타 비아 1을 끝낼 줄 알았다. 다시 보지 못할 줄 예상을 못 했기에 같이 맥주 한 잔 나누지 못해 아쉽다. 우연히 마주친, 알고 보니 같은 산장에서 잤던, 어느 식당에서 마주친, 화장실에서 대기하다, 샤워를 준비하다가, 비슷한 속도로 서로 걷다가 만났던 친구들. 어느 날 어느 산장 앞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우리가 얼마나 반갑다고 떠들었는지, 주변에서 언제부터 알던 친구냐고 놀렸었는데. 보고 싶다!
그런 줄 모르고 스타우란자 산장을 지나는데, 누가 일어나 손을 흔든다. 그 친구였다. 키가 가장 크고 잘 생겼다고 놀린. 아, 정말 미안하다. 내가 한 살만 젊었어도 이름을 기억했을 텐데,라고 생각해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대로변에 있는 산장을 뒤로하고 다시 숲길로 들어서서 걸을 때만 하더라도 바로 꼴다이 산장이 나올 줄 알았다. 아니었다. 지도를 보고 걷지 않고 그냥 이정표만 보고 걷다 보니 내가 얼마큼 걸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걷다가 약간 고도가 높아지나 했더니 다시 야생화 밭이 나온다. 밭이라고 하니 이상하지만, 이곳 주변에, 오면서 널린 꽃에 대해 거의 관심이 가지 않았다. 어쩌다 남이 사진을 찍으니 덩달아 사진을 찍으며 나가니, 종국에 꼴다이 산장 가는 이정표가 나왔다. 이건 이정표다. 그쪽으로 가라는 거지 다 왔다는 표지가 아니다.
그러다 만난 식수대! 식수대? 하하! 구글맵으로 찾아보니 정말 표기가 되어 있었다. Fontana di acqua potabile. 흠. 꽤 유명한 곳인가 보다. 구글에도 나오고. 가축들 식수대로 만든 곳에 당연히 사람들이 모여들고. 물이 깨끗하니, 에비앙 생수 저리 가라니, 너도나도 잠시 배낭을 내려놓은 곳. 이렇게 돌로미티가 좋은 것은 정수 필터기를 따로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필터링이야 당연히 몸이 알아서 해주니. 뭔 걱정. 이제 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 과정이 그리 쉬웠을까?
돌로미티 특성이 다시 나왔다. 업힐이다. 얼마나 걸어 올라가야 하는지, 내내 구시렁구시렁. 특기가 다시 발동되었다. 나중에 올라보니 그곳이 치베타 산군의 시작이었다. 오다가 치베타라는 지명을 모르고 지나친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 친구가 될 치베타 산군을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