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문 Aug 16. 2024

비온 다음 날 라가주오이.

13.

어제처럼 오늘도 개 두 마리가 먼저 반긴다. 짓는데 반갑다고 짓는 건지 경계한다고 짓는 건지 알 수가 있나? 그냥 그렇게 믿는다. 어제 세네스 산장(Senes)을 떠날 때 시작된 비가 하루 종일 뿌린 덕에 이곳 카파나 알피나(capanna alpina) 레스토랑에서 마신 핫 초콜릿 향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어제 추웠었다. 이곳을 떠나 언덕길을 오르자 스코또니(Scotoni) 산장이 나왔다. 어제 여기서 잤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로 끌렸다. 왜 그랬지? 산장 앞 너른  공터에 야생화가 만발했다. 산장 모양새도 아늑해 보이고. 그런 산장을 벗어나자마자 조그만 기도처가 나온다. 나무로 만든. 여긴 누가 관리하는 걸까? 누가 기도하러 오지?

오늘은 여기서 라가주오이(Lagazuoi)산장을 경유해서 친퀘 테레 산장까지 가는 여정이다. 프랑스 샤모니에서도 느낀 거지만 고산지대에서 맞이하는 비가 다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예기치 않게 경치가 배가 되기도 한다. 몸은 고달파도. 비구름이 사방을 꽉 가려 시야를 막지만 않는다면 산등성이라든가 자연이 연출하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비가 그친 다음에 자연이 선물을 주는 것 같다. 그러니 어제 내린 비로 인해 오늘 시야가 기대된다. 비가 그친 돌로미티 지역이라니. 사방이 빵 트이겠지?

오늘 산장까지는 2시간 좀 넘게 걸릴 것 같다. 스코또니 산장 앞에서 예쁜 야생화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후, 날씨가 좋다고 하니. 힘차게 발을 내딛을까 했더니, 역시나 업힐이다. 그런데 익숙하다. 오르다 보면 산마루 어딘가에 도착하고, 또 걷다 보면 어느새 평지를 걷고 있고. 돌로미티 지역의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여기저기 풍화가 된 바위가 더해지면 묘한 화학적 반응이란. 여기에 점점이 인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제 갈 길을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런 걸 조화라고 하는 거지.

전쟁 박물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 막사

산 중턱쯤 젊은이들이 보인다. 캠퍼들이다. 그들을 지나니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들이 흩어져 있다. 여기 사람들이 살았었나? 아니면 옛날에 산장이 있던 자리? 이렇게 무상한 시간이 주는 감상에 젖어들며, 황량한 들판에 퍼진 야생화들을 감상할 때 가지 몰랐었다. 정말, 몰랐었다. 이곳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를. 이곳이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 군과 이탈리아군이 피 터지게 싸운 전적지라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곳에서, 자타 공인 알타 비아 1  최고의 풍경 맛집이란 것을 바위로 이뤄진 고개를 박박 기어오르기 전까지 몰랐었다.

누구에겐 인생사진을 누구에겐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어떻게 이런 공간에서 싸울 생각을 했을까 할 정도로 역설과 역설의 공간.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그런데 그곳에 펼쳐진 전망이라니. 돌로미티 자타 공인 최고의 전망 아닐는지. 이것이 뭐 중요할 까만은. 원래 계획에 의하면 이곳에서 잠을 자야만 했는데. 쯧쯧! 그런 아쉬움은 떨쳐버리고. 이곳이 왜 가장 인상적일 수밖에 없는지 주관적으로 적어보자. 우선, 라가주오이 산장의 위치이다. 듣기로는 다른 어떤 산장보다 예약하기가 어렵다는 곳이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다. 어찌 이곳 경치를 다른 곳과 비교하랴.

두 번째는 이곳을 리프트 혹은 곤돌라(Funi via Lagazuoi)를 타고 바로 올라올 수 있어서 그런지 어린아이들부터 할아버지까지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았다. 학교 선생님을 따라 기도하는 어여쁜 초등학생(?)들부터 원숙한 등산가들까지. 여기에 나 같은 외지인들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 이런 맛이다. 세 번째는 산장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죽은 자를 기리는 십자가 상이 나오는데, 구글에서 찾아보니 Monte Lagazuoi Piccolo라고 되어있다. 한글로는 야외 박물관. 박물관? 촌것이라 박물관 하면 반드시 건물 안을 말해야 하는데 아니었다. 정작, 어떻게 구분하는지 몰라도 라가주오이 피콜로는 정말 뷰에 관한 한 최고다. 최고!

하나 더. 산장에서 리프트를 타지 않고 하산하는 방법은 중간에 동굴 혹은 터널을 통해 내려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이를 모르고 그냥 가는 것 같기도 한데,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숙소에 따라 하산 방향이 달라서 일 것도 같다. 중요한 건 리프트 타고 쓩하고 빠르게 내려오면 뭐 하라고? 터널의 길이가 총 1,000미터 된다는데 30~40분 정도 걸린다고 했었다. 리프트만 빼면, 이 방법이 아래 대로변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도 같은데. 이곳을 혼자 내려가려다, 헤드랜턴도 안전모도 없이 혼자 온 이방인을 동굴 아래 입구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준 이탈리아 가족들 덕분에 편안히 내려왔다.

그런데 리프트 타는 곳 주변과 하산하는 지역 전체를 푼다 베리노 갤러리(Punda Berrino Galleries, Piccolo lagazuoi)라고 부르는데, 처음엔 이해가 가지 않다가 나중에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라가주오이 산 주변이 1차 세계대전 때 격전지라는 역사적인 사실과 더불어 주변 풍경이 좋아 박물관이라고 하건 갤러리라고 하건 이해가 되었다. 주변 경치를 한 컷 한 컷 찍어 말 그대로 갤러리에 전시하나 자연에 그대로 두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마는.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가 몇 수 더 위다. 사진은 순간을 잡지만, 여기는 영원을 잡아두는 곳이다. 그 변화무쌍함을 어찌 사진이 따를까?

터널을 지나기 전과 지나는 중에 터널 내부, 터널 밖 경치와 터널을 나온 후 맞이 한 광경들이 약간 비현실적이게 다가왔지만, 팔자레고 언덕(Falzarego Passo)에 도착해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가는 차들과 바이크족과 자전거 라이더들 때문에. 이곳이 지상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날씨 울렁증, 친퀘 토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