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울퉁불퉁. 오늘 걷는 것도 그랬고, 날씨도 그랬고. 평지에다 오르막에나 뭐 일관성이 없는. 그럼에도 즐거운. 이건 어제 첫날 기억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제는 날씨도 좋았거니만. 알타 비아 1 첫날 걷는 그 참맛을 느낀 후 세네스(Sennes) 떠날 때 오직 딱 하나 날씨만 좋기를 바랐다. 날씨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 걱정은 불필요했지만. 하루 종일 비 온다고 했는데, 비라는 것이 사람들 움츠러들게 만드니. 혹시나 모르겠다. 겨울에 돌로미티 트레킹이 가능하다면 눈보라와 비교도 해보련만.
세네스 산장 앞 그 넓은 공터엔 여전히 방목된 소들이 덜그럭 덜그럭 거리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먹이야 누가 주는 것 같지 않고. 주인은 있으니, 소들 귀에 표식이 달려있고. 한편에선 발정 난 수컷이 욕구를 해소하려 암컷 한 마리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는데. 어떻게 아냐고, 집요한지? 암컷에 차여 물러났다 다시 올라타려는 시도를 몇 번 하려다, 자연스럽게 자연이 주는 묘미에 다시 빠져들었다. 소들 말고. 진짜 자연!
어제는 세네스 산장 앞 작은 동산 위에 여성 한 명이 벤치에 앉아 어딘가로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물어보려다, 따귀를 맞을 것 같아 뒤에서 조용히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했었다. 다시 그곳을 보니 빈 벤치가 주는 썰렁함이 뚝뚝 떨어졌다. 벤치가 외롭다는 듯 그저 있었다. 한때 비행장이었다는 벌판은 온통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어느 날 신이 꽃씨를 한 드럼 가져와 확 뿌려놓은 듯한. 그곳에 이리저리 주인인 양 소들이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무심히 노니는 광경. 개중에 송아지 한 놈이 텃세를 부린다. 이 땅은 우리 땅이라는 듯, 씩씩거리고 다가왔다가 엄마 소가 뒤를 받쳐주지 않으니 줄행랑.
그렇게 걸으니 평지였을까? 오르다 내리다 만난 베르가스트하우스(Berggasthous)에서 젖은 옷가지를 말렸다. 왜냐고? 해가 나왔으니. 비가 그쳤냐고? 그때만 그랬다. 잠시 요기를 한 후 다시 오르막. 이건 일상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시야가 더 명료해졌다. 물안개도 여기저기 피어올라 신비감을 주는 평온한 트레킹. 오늘 점심은 파네스(Fanes) 산장에서 먹기로 했다. 뭘 먹을까. 파네스 산장 주변은 온통 개울이었다. 비가 와서 더 그랬는지 몰라도. 그 와중에 사람들이 모여 라면을 끓여 먹었다. 정수하지 않은 물이라 펄펄 끓였고 그곳에 라면을 풍덩. 이곳에서 미국 친구 삼 인방을 만나고. 이런 와중에 아는 체할 사람도 생기다니. 돌로미티에서 말이다.
그렇게 배를 채운 후 산장을 지나쳐 다시 역시나 오르막에 들어서고. 원래는 이곳 산장에서 자기로 했는데 예약이 되지 않는 바람에 더 걷고 더 걸었는데. 요게 요게 대박이었다. 주변에 유명한 바위도 경치도 없었는데, 이 모양이 어쩌면 진짜 돌로미티 속살 같기도 했다. 평범한 듯한데, 걸으며 비범함을 느낀. 그렇다고 걷는 자체가 힘들지도 않고 간간이 언덕길이 있었도 고행길도 아닌. 구간 구간 강우량이 달라 마음가짐이 달라지긴 했어도 진짜 이 맛이 진짜 돌로 미리 맛이 아닐는지.
세네스에서 떠나 베르가스트하우스를 지나 파네스를 거쳐 걷고 또 걷는 길. 주변은 온통 낮은 구릉지와 벌판과 야생화와 간간이 보이는 저 멀리 산봉우리와 작은 시내가 마주치는 곳. 갑자기 이동원 '향수'가 생각나다니. 그곳에 그 개울가에 몇 명이 청개구리 짓을 했다. 남들 비 덜 맞으려 열심히 시야에서 사라져도 급할 게 없다고 모인 그들이 뭔 짓을 했을까? 배낭에 숨겨둔 커피와 녹차를 꺼내 즉석에서 멋진 카페를. 무료 카페. 빨리 내려가서 뭐 하냐는. 하긴 그랬다. 산장에 도착해서 간단히 다음 날 여장을 챙기고 잠자는 것 외에 딱히 할 것이 없다. 벙커 형태의 침대에서 펜대를 굴리며 글이나 쓸까 했던 기대는 애초 사라졌다. 불가능했으니. 공간 상. 육체적으로도 피곤했으니.
버너에 물을 끓여 개울가에 서서, 비가 오니 앉을 수는 없고, 마시는 차 한 잔 커피 한 잔. 몇몇 청개구리들이 그날 가출을 했다나 말았다나. 몸을 덥히니 좀 대응이 되었다. 사실, 기온이 내려가 있긴 했다. 그건 몸이 쌀쌀하다고 신호를 준 것인데. 뭐, 어떠랴. 다시 걸으니 몸이 훈훈해졌다. 그렇게 우중 트레킹이 끝나긴 했는데, 여전히 그날 그 순간이 잊히질 않는 걸 보니. 그날이 그리워지긴 한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 빗물이 스며든 커피라니. 맛은 따봉! 분위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돌로미티가 산악지대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하루. 드디어 마침에 카파나 알피나에 도착했다. 반겨줄 것 같은 개 두 마리. 그날 그렇게 하루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