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치메 디 라바레도. 그냥 트레치메라고 하는 곳. 좋았다. 날씨도 좋고. 걷는 것도 좋고. 눈도 즐거웠고. 그건 어제다. 그럼 오늘은? 드디어 기대하고 고대하던 알타 비아 1 첫날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곳. 어디든 그렇지!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곳. 아는 사람이 점차 많아지는 곳. 돌로미티. 그곳에는 총 10개의 트레킹 루트가 있다. 이걸 다 해본 사람이 있을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알타 비아 1만 해도 좋으니까, 걸을 수 있을 때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중에야 알게 될 것 같다. 아직은 다행이다!
브라이에스 호수와 예배당
벼르고 별러 왔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제 걸어보니 그래야겠다. 그럴만한 곳이다. 시작은 브라이에스(Braies) 호수. 아름답다. 호수가 시작되는 초입에 작은 예배당이 있다. 이탈리아 국교가 가톨릭이 아니지만 왠만한 곳에 다 있는 성당이 그렇다고 호수 바로 앞에 있을 줄은 몰랐다. 이탈리아에서 국교가 된 시점이 다시 국교가 되지 않은 시점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성당은 아마도 무사 산행을 비는 곳 아니었을까? 호숫가에 머물 다 돌아갈 사람들이 성당에 들어가 뭔가를 간절히 기도할까? 그래도 하겠지? 성당 때문인지 아니지. 호수 때문에 성당이 돋보이다.
오르고 오르다 보니 올랐다.
풍경 맛집!
호수를 뒤로하고 무료 해우소를 거쳐 오르는 산길. 누가 그랬다. 올라갈 때는 북한산 백운대 정도 오른다고 하던데. 그러려니 하고 걷다가 보니 그럴만했다. 계속 오르막이다. 오르고 오르면 또 오를 리 없건만은. 딱 그랬다. 오르니 올라졌다. 내가 걸었건만 걸어진 것 같다. 달리 방법이 없다. 돌아내려간다는 건 포기를 의미하니. 첫날부터 그럴 수는 없지 않을까? 다행인 건, 경치가 좋다. 끝내준다. 그러니 걸은 거다. 걷다가 포기하고 싶었던 건 저 높은 바윗덩어리 때문이었다. 저게 먼고 하니 지코펠(Seekofel). 산?
바위가 비현실적인데, 개는 현실적이다.
남들이 산등성이에서 저길 오른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어떻게 올라갈까 하던 차에, 까마득히 매달린 듯 걸어 올라가는 이들을 보다 보니. 어라, 아래 길이 나있다. 가는 사람만 갔던 것이다. 내가 가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다. 내려다보니 산장이다. 비엘라(Biella) 산장. 그럼 내가 선 곳은? 작은 기도처. 성모마리아가 계시다. 이곳이 어딘고 하니 소라 포르노(Verso la Forcella Sora Forno) 고개다. 돌로미티 산행 중 갈림길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기도처. 하느님 덕분이다. 올라오느라 힘들었는데. 이곳이 뭐지라는 호기심이 없다면, 난 정말 저 지코펠 정상에 올라갔을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국인들이 왜 거길 바득바득 올라갔는지 알 것도 같다. 거기서 보는 경치도 대단했을 듯. 올라갔어야 했나?
소라 포르노 고개와 지코펠. 산이겠지?
비엘라 산장에서 일행이 도착하는 걸 보고 후다닥 발걸음을 재촉했다. 혼자 걷고 싶었다. 호젓함. 이걸 느끼려고 왔으니. 잠시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다 동유럽에서 온 트래커의 도움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거기 있던 누군가 말을 따랐다면 난 아직도 돌로미티를 헤매고 있을 것이다! 맙소사!! 걷는 방향을 반대로 알려줬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시야가 그저 황량함이다. 온통 보이는 것이라곤 지코펠 산 닮은 색깔이 온통 지천이다. 어디 야생화라도 찾아보련만 거의 드문드문. 이건 나중에 걷다가 걷다가 지칠 때 되면 나온다. 원래 주인공이 늦게 나오는거다. 걷는 맛이 걷는 느낌이 상쾌하다. 더 할 나위가 없다!
이곳에도 꽃이 있어요!
지난 알프스에서의 트레킹이 높은 설산과 영봉들로 우거진 산맥 그곳에 걸터앉은 구름까지 주인이라면 이곳은 아득함이다. 비록 산장과 산장 사이를 오르내리는 울퉁불퉁 그곳을 연결하는 건 오늘 같은 아득함과 더불어 아찔함까지. 아찔함은 그냥 돌로미티가 6월과 7월에 선사하는 야생화를 말한다. 꽃밭이 아찔하다니. 바위와 바위 사이, 돌들과 돌들 사이를 걷는 듯 꽃들을 보며 걷는 느긋한 산행이라니. 이건 산행이 아니다. 산책 혹은 산보. 눈도 즐겁고 발도 즐거울 이 맛. 걷는 맛이 이렇게 좋을까. 이건 전적으로 주변 풍경이 주는 대가 같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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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보니 드는 아득함이란.
걷다 보니 점차 목초지가 눈에 더 들어온다. 황량함이 점차 줄어들면서 늘어나는 이끼처럼 푸른 풀밭. 듬성듬성 이름을 모르는 야생화가 더 많이 눈에 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잠시 일행이 된 트래커들과 즐겁게 인사를 나누다 보니 저 멀리 점점이 눈에 들어오는 저게 뭔고 하니 소다. 소! 풀밭이 늘어나면서 소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좀 더 걸어가니 이제 소들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이곳에 웬? 걷다가 걷다가 얼마인지 시간이 간 후 작은 언덕배기. 거기서 내게 예쁘게 웃으며 아는 체를 하던 유럽(?) 아가씨를 뒤로 하고 걷다 보니. 보인다.
산장이다. 세네스(Sennes)산장. 오늘 저곳에서 잘 텐데. 주변은 완전히 소 밭이다. 소들이 이렇게 많을까? 산장 앞은 무슨 벌판처럼 평평하고. 이곳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비행장으로 사용되었다는 곳이다. 나쁜 머리를 굴려보니, 원래 돌로미티 지역이 오스트리아 땅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1차 세계대전이 준 참혹함은 온데간데없고, 소들과 트레커들과 자전거 라이더들과 야생화만 그저 유화 한 폭으로 남겨질 곳 같은.
그림이다.
배낭을 숙소에 두고 얼쩡거리니 나한테 반해서(?) 아는 체를 하던 유럽(?) 아가씨가 산장에서 목을 축인 후 반갑게 안녕을 고한다. 그녀는 어디로 가는 건지? 트래킹은 이래서 좋다. 깊이 알 수 없어도 오가는 인사 한마디에 피로가 풀려서 다시 걷는. 일찍 도착한 덕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소가 많다. 소가 많다는 건 주변이 풀밭이라는 것. 그냥 다 풀밭이다. 그러다 산장 정면 쪽을 보니 누가 외로이 앉아있다. 한참을 쳐다봐다 한참을 앉아있는. 여성 같았는데 말이다.
잠시 돌다 다시 보니 그녀가 사라졌다. 나도 고독을 씹는 남자가 될 것 같아 홀로 벤치에 앉아 처음 와본 세상을 음미했다. 맛이 어땠을까? 낯설어서 좋은. 보지 못했던 풍경이라 더 좋은. 옆에 발정 난 수소가 암소를 따라다니는 것만 빼면. 그걸 옥에 티라고 할 수 있으련만.
그저 아름다운 한 컷이다. 오늘도 누가 컷 할 것 같다. 컷! 그렇게 첫날이 갔다. 오늘도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