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문 Sep 26. 2024

사라진다. 재미까지?

구병모(2018). 파과. 위즈덤하우스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뜨거운 찬사"라길래 아주 심오한 책인 줄 알았다. 그랬더니 웬걸? 심오하지 않았다. 주인공이 사라질 것 같았는데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런 책과 이런 소설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소설이 재미있으니까. 이걸 현실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게 하니 그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이걸 현실에서 취재한 소설이라면 나도 어쩜 사라졌을 것도 같아 께름칙하다.


남들을 이땅에서 이세상에서 저세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게 특기인 여자가 있다. 이름이 조각(爪角)이다. 손톱조, 뿔각이라는 한자를 쓰는 여자다. 손톱이란 단어. 이것도 찾아봐야 했다. 문장 곳곳에 생소한 한자나 조어들이 많아, 얼마나 아는 것이 별로 없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읽다가 자꾸만 생경한 단어들 때문에 걸리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아주 문맥을 벗어나지 않는다. 작가가 과거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게 해주는 단서이다. 주인공 이름을 왜 이렇게 붙였는지는 소설 마지막에 가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해석이 맞는지 모르지만.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p.342).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해석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누군가를 사라지게 만드는 살인청부업자가 어느 날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들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


이건 위험신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 나이가 이미 60대 중반에 들어섰다. 늙은 것이다. 직업을 유지하기에도 그렇고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그러니 사라지는 것들에 연민을 갖게 되는데. 에이전시에서도 이를 알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조각이 맡은 일들이 점차 수월한 일들이 주로 주어진다. 그러다 조각이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일들도 벌어지고. 이런 틈새를 누군가 지켜보는데 그 이름은 투우다.


지금 아니 이미 한물가기 시작하는 업자와 점차 물오르는 패기의 업자 간에 미묘한 파장들이 커져 결국에는 둘이 끝장을 보게 된다. 이때 끝장이란 것이 누군가를 누군가가 사라지게 만드는 것. 조각 주변에서 머무르며 조각이 늙는 증후들을 옆에서 자극하는 투우 덕에 소설은 점점 냉혈한에서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조각에 더 몰입하게 된다. 이건 어쩌면 자기도 곧 사라질 것이라는, 그것이 에이전시에 소속된 전문가들이 결국에는 누군가에 의해서 청소가 되는 것을 떠나, 전체적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에 애정을 갖게 되는 것인데. 이건 조각 같은 업자들에겐 치명적이다.


변화는 조각이 파양 된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는 복선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조각에게 의뢰를 하는 의뢰자들의 공허한 눈빛을 생각하는 것으로 균열이 진행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어느 날 업자들을 치료해 주는 장 박사가 아닌 강 박사를 만나면서 결정적으로 조각이 위기에 처하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조각이 소설에서 사라질 줄 알았다. 주인공이지만. 투우가 예전 같지 않게 머뭇거리는 조각을 지켜보는 이유는 언젠가 조각이 해결했던 대상이 투우의 아버지였던 것이 결정적으로 소설을 더 재미있게 만든다.  


같은 해결사 투우 입장에서 자기가 보는 눈앞에서 아버지를 보내버린, 가차 없이 제거한 조각이기에 더욱더 조각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조각을 사라지게 만들려고 하는데, 그건 이미 냉혹함을 잃어가는 조각의 연민을 자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투우가 강 박사 딸을 납치해서 조각을 유인하고, 함정이란 걸 알면서도 빠지는 조각을 제거하려 하는데. 결과적으로 사라지는 건 조각이 아니다.


결과가 이러니 제목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제목 파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 첫 번째는 흠집 나고 부서진 과일이고 두 번째는 가장 빛나는 시절이 여자한테 이팔청춘 16세라서, 이 나이에 조각에 전문가의 길에 들어서지만, 둘 다 사라지는 것이라서. 작가는 대립되는 두 의미를 파과라는 단어로 생각할 여지를 만드는 데, 그건 언젠가 누구든 무엇이든 과일이 부서지듯이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 소설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며 읽지 않았다. 작가의 기대와는 다르게 비장함도 허망함도 아쉬움도 마지막에 손톱을 예쁘게 다듬으면서 조각이 깨닫는 내용까지도 깊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건 전적으로 작가 탓이다. 작가가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썼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젠가 작가 이름도 내용도 사라질 테지만. 그러고 보니 소설이 재밌었다는 것 자체도 사라질 것 같기는 하다. 그럼 작가의 의도에 말린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그렇고 그런 소설인 줄 알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