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정집에 들렀더니 팔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께서는 늘 그렇듯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시고 계셨다. 어느덧 마당에도 봄이 찾아들어 이름 모를 꽃들이 수줍게 머리를 내밀고 있었고 마당 한 귀퉁이에는 상추와 고추들이 초록을 뽐내며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잠시 주인 없는 마당이었는데 어머니는 힘들다고 하시면서도 그 뒤를 이어 지금껏 마당을 가꾸고 계시다.
늘 바지런하신 어머니는 고령임에도 늘 집안을 깔끔하게 청소하신다. 가끔 내 집보다 더 빛나는 방바닥과 가지런한 살림들을 보면 부끄러움이 올라온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 여기저기 물걸레질을 하다 보니 아버지께서 쓰셨던 방에 어머니의 분신과도 같은 오래된 미싱이 눈에 띄었다. 어머니 혼수품으로 이 집에 들어왔으니 우리 4형제의 맏이인 언니보다 더 나이가 많은 셈이다. 환갑을 넘긴 세월에서 짙은 여운이 느껴진다.
어머니는 평생을 손에서 바늘을 놓지 않고 사셨다. 젊어서도 결혼해서도 온전히 가족을 위해 바느질을 하셨고 지금은 남루한 당신의 옷들을 꿰매고 계시다. 어렸을 때 학교 갔다 돌아오면 항상 바느질하고 계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옆집이 한복집이어서 버리는 자투리 천들을 살뜰히 챙겨 오셨었는데 가끔은 어머니 옆에서 잘려 나간 온갖 모양의 자투리 천으로 퍼즐 놀이도 하고 처음 보는 오묘한 빛깔에 신기해하면서 천 구경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자투리 천들이 어느 날 마술처럼 식구들의 옷과 이불, 방석 등 집안의 생활 물품들로 화려하게 변신을 하였다.
예전에 어머니로부터 젊은 시절에 재봉 학원을 다니고 싶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금도 가장 아쉽고 미련이 남는다는 말씀을 하신다. 재봉틀은 어머니가 아닌 한 여성으로서 꿈꾸었던 희망의 상징이었고 비록 어머니의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어도 미싱을 돌리던 그 방은 가장 가까이서 어머니의 꿈을 펼칠 수 있었던 당신만의 공간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바람 잘 날 없던 세월을 무심하게 바느질을 하시며 견뎌내셨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충만한 자애를 몸소 보여주셨다.
생각해 보니 이 방은 결혼 전에 내가 쓰던 방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내게 새집을 짓자마자 고향으로 돌아와 턱 하니 좋은 방을 차지했다며 그해 제대한 작은오빠는 어쩔 수 없이 쪽방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얘기를 한동안 하셨다. 늘 내 편이셨던 아버지께서는 아들은 잠이나 자면 그만이지만 과년한 딸이 자기 방은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염치없지만 다 지은 새집에 공주처럼 들어가 전망 좋은 방을 차지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만의 방'은 사색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이면서 물질적, 정신적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가부장제에서 남성에게 의존하는 여성이 아닌 독립된 주체로 사는 삶을 사는데 자기만의 방은 꼭 필요하다고 했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때는 이 방 저 방을 전전하며 잠만 잤을 뿐 딱히 내 방이 없었다. 제대로 된 내 방을 갖게 되면서 푸르른 20대를 그 방에서 보냈고, 결혼 후에는 두 딸의 산후조리를 했다.
나의 결혼을 끝으로 4형제 모두 독립하여 그 집을 떠나자 아버지께서 그 방을 쓰셨는데 산후조리하러 친정집에 갔을 때 아버지께서는 이미 자신의 짐을 모두 다른 방으로 옮겨놓으셨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꼬물락거리는 두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세상과 첫 교신을 하였다. 꿈 많았던 젊은 시절의 사연들이 오롯이 담긴 그 방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옛 생각에 잠기니 길고 긴 밤의 속삭임이 들린다.
천 조각의 화려함 같은 젊음 뒤에는 늘 불안과 상처로 뒤엉킨 미숙함이 나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때 그 방은 젊음의 성장통을 견뎌낸 인고의 공간이요 사색과 성찰로 일구어낸 성장의 공간이었다. 결국, 자기만의 방은 온전한 나와 마주하는 공간이자 나를 나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곳이었으며 삶의 영역의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케렌시아였다.
세월은 흘러 그 방의 주인은 떠났지만, 또 다른 자기만의 방에서 여전히 나와의 교신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제 더는 외형적인 방에 얽매이지 않고 나만의 전망 좋은 방에서 진정한 나와 오롯이 만나고 있기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푸르르고 향기롭다. 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나만의 빛깔과 향기가 있는 그 방에는 늘 설렘이 있다. 오늘도 그 방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