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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케렌시아, 한라수목원

by 풍경 Apr 1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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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하늘이 눈부시도록 파랗다. 주말 아침 집안일을 대충 끝내고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필수품인 이어폰을 챙겼다. 주말이면 으레 나서는 곳이 있으니 집에서 도보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한라수목원이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 이어폰을 장착하고 늘 다니는 길이 아닌 반대편 사잇길을 따라 수목원으로 향한다. 지난해부터는 수목원 가는 길의 패턴이 일정해졌다. 집에서 수목원 입구까지 20분 정도는 법상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걷는다. 입구에 도착하면 이어폰을 주머니에 넣고 핸드폰을 끈다. 이제부터 숲과의 진정한 만남이 시작된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수목원 입구에 발을 디디니 숲은 손님맞이로 분주하다. 오랜만에 온갖 새들의 지절거림이 들려온다. 소프라노로 호이 호로로 목청껏 소리를 높이면 저기 어디선가 안정적인 알토의 조로롱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대체 어디서 몇 마리의 새가 울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지만 여기저기 울려 퍼지는 새들의 협연에 가던 길을 멈추고 숲 속 빈 의자에 앉아 감상했다. 

뒤통수에서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지고, 기울어진 그림자는 가만히 앉아있는 내 형상을 보란 듯이 진하게 그려낸다. 새들이 연주하는 봄의 교향곡을 듣다 보니 마음은 어느새 평화롭다. 지나가는 새소리에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다!’ 아버지는 새소리 흉내를 잘 내셨다. 어릴 때 과수원을 따라나서면 반갑게 맞아주는 새소리에 아버지는 항상 휘파람으로 화답을 하셨다. 언젠가는 새소리인지 아버지의 휘파람 소리인지 분간이 안 될 때도 있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오름 위에서 바라본 한라산 능선의 자태는 의젓하다. 잠시 오름 정상에 서서 한눈에 펼쳐진 제주 시내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한 발 한 발 내려오다가 늘 다니던 경로를 벗어나 반대편으로 가보았다. 그곳은 온통 꽃천지였다. 산당화, 앵두나무, 두릅나무 꽃, 진달래, 수선화, 동백, 개나리, 그 외에도 이름표를 부여받지 못한 자그마한 이름 모를 풀꽃까지 천연색 물감으로 톡톡 찍어놓은 듯한 모습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얼어붙은 마음이 눈 녹듯이 평온해졌다. 



법정 스님은 생전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머물렀던 월든 호숫가를 많이 사랑하셨다. 소로우는 단순하고 검소한 삶을 살기 위해 월든 호숫가로 들어갔다. 단순하고 검소한 삶은 정신이 감각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하여 정신적인 힘을 집중하고 청정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로우는 <월든>에서 자신의 순수한 자아와 자연에 깃들인 영혼은 하나라고 생각하였고, 자연에 깃든 정신을 알려고 노력한다면 자연은 우주적인 정신을 내보인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을 삶에서 실천했던 지성인 소로우. 월든 호숫가 주변 오두막집에서 그의 삶은 더욱 빛이 났다. 소로우의 삶을 동경했던 법정 스님 또한 강원도 산중의 오두막집에서 주옥같은 글들을 쓰면서 맑고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셨다. 숲을 걷다 보면 두 사람의 맑은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자연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느낀다. 


숲은 이제 나의 오랜 벗이 되어 숲에 오면 늘 바짝 긴장했던 일상에서 벗어나 심신이 이완되고 내 안에 꽉 막혀있던 기운이 터져나가는 샘솟음을 느낀다. 그저 빈 몸 하나 이끌고 무심히 들어오면 숲은 내게 삶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고, 나쁜 기운을 잔뜩 품고 들어가도 늘 툴툴 털어내게 해 주었다. 가끔 삶의 물음표를 하나 가득 머리에 이고 가도 돌아올 때는 텅 빈 마음이 되게 해 주었으니 숲은 단순히 볼거리가 아니라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지음자(知音者) 같은 존재가 되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그러던 어느 날부터 숲은 나보고 시인이 되라고 했다. 꽃피는 봄날이면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들으며 홀로 숲을 거닐었고 신록의 계절을 지나 하나둘 지는 낙엽들을 밟으며 비로소 모든 것을 다 비워내는 겨울의 진리를 알아갈 무렵 나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시를 따로 공부해 본 적도 없고 써 본 적도 없던 내게 숲은 저절로 시를 읊도록 하였다. 내가 가진 것은 그저 가슴 하나밖에 없었다. 숲을 통해 굳게 닫힌 가슴이 조금씩 열리더니 어느새 서서히  스며들었고 봇물 터지듯 가슴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요즘은 숲을 거닐 때면 마치 내면의 뜰을 거니는 듯하다. 사계절의 흐름 속에서 변함없이 제 빛깔을 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늘 내 안의 뜰을 잘 가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온갖 비바람에 쓰러지면 쓰러진 채로, 햇살 머금은 채로, 늘 여여하게 살아가는 숲에서 삶의 이치를 배우고 있다. 수목원은 삶의 스승이자 글쓰기의 원천이요, 나의 케렌시아이다. 오늘도 나는 이곳에서 나의 맑은 영혼을 만나 시를 노래한다. 언젠가 시절 인연이 닿는다면 이 세상에 잠시 선보일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5

봄의 정령


깨어나라

봄의 정령이여


숲은

희망의 찬가로

봄을 열고


꽃들은

의기양양

울긋불긋하니


얼어붙은

봄의 정령이여


긴 잠에서 깨어나 

그대의 봄을 맞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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