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가을은 억새들의 세상이다. 억새들은 제주의 거친 바람에 맥없이 누워버릴 것 같아도 바람에 응하며 출렁거릴 뿐 절대 쓰러지는 법이 없다.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 하여 책 읽기 좋은 때라 말한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일 년 중 가장 책이 읽히지 않는 계절이 가을이라 했다. 맑은 공기와 푸르른 날씨 때문에 방안의 책상 앞에 버티고 앉아 있을 수 없다며 가을에는 바람만 불어도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인다고 했다. 스님 말씀처럼 가을은 버리고 떠나는 계절이라 해야 할 듯하다. 문득 일상의 번거로움을 잠시 내려놓고 친구와 떠난 가을날의 송악산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빛나는 가을의 어느 주말이었다. 몇 해 전에 우연히 갔던 송악산 둘레길이 자꾸 마음에 맴돌아서 무작정 가보기로 했다. 자고로 여행은 마음이 통하는 이와 함께할 때 빛을 발하며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은 한껏 고개를 뒤로 젖혀 쳐다봐야 제맛이다. 송악산 둘레길 초입부터 저 멀리 산방산과 이름 모를 작은 섬들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왔다. 길 양쪽으로 가을 들녘을 수놓은 억새들의 행렬은 세속의 일을 다 잊고 산으로 드는 선인(仙人) 같다고 할까.
제주의 명소인 올레길은 굽이굽이 제주의 속살을 헤치며 보물찾기 하듯이 하나하나 찾아내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다면 둘레길은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를 휘돌아 걸을 수 있어 대장부의 위풍당당한 면모가 느껴지는 맛이 있다. 그러면서도 산세를 끼고 가을 산의 장엄한 정경을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하늘을 우러르듯 올려다보며 산의 전체적인 형상을 한눈에 볼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짜릿한 전율인가.
그야말로 좌해우산(左海右山)인 둘레길을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 놓으면 그 위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카메라의 셔터를 정신없이 누르다가 문득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넉넉한 자연을 눈앞에 두고도 그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 것으로 담아내려는 욕심이 파도보다 더 높게 일렁이고 있었다. 자연에 들어서 그들을 응시하고 그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들의 향기를 온전히 느끼는 것으로 나를 충분히 채우면 될 것인데 오로지 소유의 관점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 자연을 상하 관계로 대하는 한 나는 절대 그들과 벗이 될 수 없음을, 내가 아무리 다가가도 그들이 마음을 내주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왼쪽으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의 숨결은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준엄한 산의 형세는 침묵으로 들여다보는 내면의 보는 자로 다가왔다. 그러자 지금 서 있는 이 공간에 대한 하나의 생각이 일어났다. 더 큰 존재의 내면에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큰 존재가 우주라면 대우주 안의 소우주는 어쩌면 내가 아닐까 싶었다. 자연에 들면 자연의 외관에 취하여 나를 잊을 것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이치를 겸허히 받아들여 참된 나를 알아봐야 함을 가슴으로 배웠다.
도종환 시인의 <노란 잎>이라는 시에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흔히 가을을 고독의 계절이라 하여 외롭고 쓸쓸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하지만 인간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근원적인 공허감을 느낀다. 나는 법정 스님의 글 중에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는 표현을 참 좋아한다. 세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때로는 옆구리께 스쳐 가는 외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는 스님의 말에 공감한다.
그 가을의 송악산 하늘 아래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온전한 나로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인생의 가을을 초라하고 쓸쓸하게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함으로 조금씩 채워갈 수 있도록 때로는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즐길 줄 알아야겠다. 또한 내 삶에서도 풍요로움과 결실을 누릴 수 있으려면 충분한 자기 정화의 시간을 가져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