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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흐르는 여름밤의 다경 선원

by 풍경

제주의 여름밤은 낭만적이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 한낮에는 폭염으로 진땀이 온몸을 감싸고 끈적이는 살갗의 접촉만으로도 불쾌지수가 하늘을 찌르듯 고공 행진한다. 하지만 한낮의 열기가 서서히 사그라지면 석양의 노을은 화려한 파스텔 톤 물감으로 은은히 번지면서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낸다. 그리고 시나브로 사위가 차츰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 밤이 될 무렵이면 보고 싶은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여름밤을 생각하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른다. 젊은 날의 단 하룻밤 사랑을 잊지 못해 평생 시골 장터를 떠도는 허 생원과 그런 주인을 닮은 늙은 나귀의 처량한 처지가 아련하게 다가온다. 특히 허 생원과 성처녀의 애틋한 사연은 하얀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여름밤의 메밀밭 정경과 한데 어우러져 오래도록 긴 여운을 남긴다. 그래서일까, 유독 여름밤의 추억이 더 짙게 간직되는 듯하다.


2년 전 여름, 우연히 친구가 여름휴가로 템플스테이 간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따라나섰던 다경 선원에서의 1박 2일이 내게는 그런 사연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예전부터 템플스테이에 관심이 있었는데 자그마한 선원에서 비구니 스님 혼자 운영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계속 가야만 하는 당위성을 찾고 있었다. 사실 지난주에 독일 여행을 다녀온 지라 가족들 눈치가 보였음에도 그 강렬한 끌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와 일정을 맞추기 위해 거짓말로 연수 핑계를 댔고 일말의 양심 때문에 친구보다 하루 늦은 다음 날 낮에 선원에 가기로 했다.

선원은 자그마하면서도 깔끔하고 단아했다. 게다가 처음 보는 형형색색의 꽃들과 나무들은 작은 정원을 떠올릴 만큼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섬세했다. 그야말로 대웅전을 둘러싼 주변 정경이 운치 있고 고즈넉하였다. 도량에 대한 스님의 열정과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스님과 마주 앉아 나눈 차담, 정성 가득한 사찰음식, 다도와 족욕 체험, 절 예법 등 그곳에서의 모든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중에서도 스님과 차담을 하며 나눈 선원에 얽힌 사연과 미얀마 봉사활동 등 소소한 산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이 참 좋았다.

스님께서는 제주에 오시기 전에 선원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타향인 제주와 인연이 닿아 제주에서 손수 땅을 일구어 선원을 짓고 꾸미는 데도 몇 년이 걸렸다고 한다. 꿈속에 펼쳐진 선원을 거의 그대로 갖다 놓았다고 했다. 스님 밑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서 선원을 운영하시느라 힘들지만 아무나 두고 싶지 않다는 말씀 속에 스님의 완고함이 느껴졌다.


미얀마 봉사활동에서 만난 눈이 맑고 깊은 아이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매일 새벽에 높은 절벽에 자리 잡은 선원을 향해 기도하러 갈 때마다 먹을 것을 달라며 손 내밀고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가지고 간 돈을 모두 다 줘버렸다는 말에 겉으로 보이는 스님의 단호한 모습과는 달리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이 전해져 왔다.


내가 거처했던 방 이름은 불교의 육바라밀 중 네 번째 수행 덕목인 ‘정진(精進)’이었는데 방문을 열면 대웅전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부처님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원 자체가 숲 속 깊은 곳에 있어 사위는 고요한데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불법승 삼보를 의미하는 소나무 세 그루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풀벌레 소리는 왜 그렇게 우렁차게 들리는지 숲 속의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하면서도 요란스럽지 않았다. 한참을 방 앞에 걸터앉아 여름밤의 정기를 느끼며 상념에 젖어들었다. 숨 막힐 듯 고요하면서도 가슴은 충만하고 아련하여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문득 대웅전 외벽에 걸린 주련(柱聯)의 의미를 내일 스님께 여쭈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가지고 갔던 법정 스님의 책을 펼쳤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대웅전 주련에 적힌 글 중의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卽時現金 更無時節(바로 지금이지 다시 시절은 없다.)’ 순간 주위가 밝아지면서 이 글귀가 가슴으로 들어왔다. -과거는 강물처럼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과거나 미래 쪽에 한눈을 팔면 현재의 삶은 소멸해 버린다. 저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라.- 평소에 법정 스님을 존경해왔고 스님 책을 곁에 두고 자주 읽는 터라 마치 스님이 내 곁에서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인지라 밤잠을 설치다가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이 날 지켜보실 것’이라 가물가물 생각하였는데 깨어보니 신기하게도 아침이었다.


꿈같았던 시간을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충만함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스님께 두서없이 편지를 썼다. 지금도 그 선원을 생각하면 허 생원이 성 처녀와 함께 보낸 그 여름날의 밤을 평생 잊지 못했던 것처럼 그날의 여름밤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신기하게도 그날 이후로 불가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여러모로 감사할 일이 많아 이렇게 글로 스님께 고마운 마음을 다시 전합니다. 그리고 인연이 닿는다면 스님을 다시 뵙고 싶은 마음도 가득하고요. 선원에서의 행복했던 추억은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겨울날의 선원을 고대해 봅니다. 스님의 고운 미소와 열정적인 삶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늘 건강 유의하시고 뜻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기를 진심으로 서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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